어릴 적 <007> 시리즈를 좋아하던 소녀는 <007: 네버다이>를 보고 본드가 아닌 본드걸과 사랑에 빠졌다. 본드와 등을 맞대고 격투를 벌이고, 같이 일하자는 제안에 “난 혼자 일해요”라고 싱긋 웃으며 돌아서던 웨이린 대령. 세상에 없던 본드걸에 반해 양자경을 액션 스타로 만든 <예스마담> 시리즈와 성룡과 자웅을 겨룬 <폴리스 스토리3>를 섭렵하며 CG도 스턴트도 없는 홍콩식 ‘노빠꾸’ 액션의 손맛을 깨치고, <와호장룡>을 보며 우아한 액션에 눈물도 흘릴 줄 아는 나이가 되는 동안, 양자경은 줄곧 나의 영웅이었다. 내가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하는 나이가 됐을 때 그는 중년의 나이에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의 선장이 됐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로 마블 유니버스에 입성,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을 주연으로 내세운 기념비적 작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 이르기까지 무대를 넓혀갔다. 양자경은 언제나 전성기였으나, 그의 진짜 때는 바로 올해였으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 이민자 에블린은 딸을 구하기 위해 수천 개의 우주를 누비며 회환과 허무를 넘어 마침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난 너와 여기 있을 거야”라며 딸과 포옹한다. 영화는 쿵푸하는 양자경, 멜로 속의 양자경, 그간 양자경이 연기한 수많은 배역을 연상케 하는 모든 양자경을 모아 우주와도 같은 하나의 삶을 집대성해냈다. 양자경은 후일담에서 “대본을 받고 생각했어요. 이건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회다. 관객을 웃기고 울리며 내 진짜 역량을 보여줄 기회. 마침내 날 알아봐준 거죠”라며 눈물을 닦았다. 같이 눈물콧물 빼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나의 영웅, 이건 분명 시작일뿐일 거랍니다. 놀랍게도 이건 당신의 첫 할리우드 원톱 주연작이니까요. 그리고 이 실패한 우주에 있는 나는 생각한다. 좀 더 힘을 내어봐야겠다고. 이예지(<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
김신영
」
나의 결핍과 외로움은 다른 사람을 웃게 하는 재능이 됐다.
코미디언이 갖춰야 할 자질을 평가한다면 김신영의 그래프는 연기력, 언변, 재치, 끼, 에너지의 오각형이 가득 찰 것이다. 누군가의 탁월한 재능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되면 그만큼 세상이 그 재능을 몰라줄까 마음 졸이는 불안을 겪는다. 나는 늘 이 시대 최고의 코미디언에게 토크쇼 호스트 간판 하나 내어주지 않는 한국 방송계를 미워했고,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혀 쉽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들을 원망했다. 그런 원망 때문인지 나는 어느 날 갑작스레 전해진 속보를 믿을 수 없었다. ‘KBS <전국노래자랑> 새 진행자에 방송인 김신영’. 그날 밤은 축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적임자라 확신했고 자기가 알고 있는 김신영의 재능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무한걸스>를 통해 뽐낸 연기력, <판벌려>에서 보여준 무대 장악력, <정오의 희망곡>으로 증명한 성실함과 ‘둘째이모 김다비’를 통해 굳힌 독보적인 스타성에 대해서. 팔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누구든 모사해내는 김신영의 재능이 60번이 넘는 이사와 전학을 다니고 경상도의 친할머니 집, 전라도의 외할머니 집을 오가며 습득한 결과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동안 수많은 이름도 함께 호명됐다. 김신영의 재능을 누구보다 믿고 지지하며 판을 벌려준 기획자 송은이, 그가 놀 수 있는 판을 지탱하고 힘을 보탠 선배 이영자·박미선·이경실, 그와 함께 판을 만들어나간 동료 김숙·신봉선·안영미, 그리고 그를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자로 결정한 김상미 PD와 그가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개그우먼>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날 밤 사람들의 말과 글엔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 묻어 있었다. 어떤 이의 재능을 끝까지 믿고 밀어주며 결국 장벽을 무너트린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나의 신념에 따라 누군가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일. 올해의 영웅 김신영은 그것을 지속해도 된다고 흔쾌히 답했다. 복길(<아무튼, 예능> 저자)
「
이영지
」
Man I’m Still Climbing, Look.
<쇼미더머니11> 체육관 심사에서 이영지의 랩 마지막 파트다. <고등래퍼3> 우승자 이영지가 다시 랩 컴퍼티션에 도전자로 출연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올라야 할 정상이 남아 있다는 한마디가, 랩이 끝난 뒤에도 뭉근하게 남았다. 이영지는 인기 정점에 있는 것일까? 아니, 이제 시작일 뿐이다. 2022년은 이영지의 해였다고, 감히 생각하는 중이다. 특히 하반기 활약상 면에서는 성별 불문하고 이영지를 앞선 개인을 떠올리기 어렵다. 이제 20살을 갓 넘긴 이영지는 유튜브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과 예능 <뿅뿅 지구오락실>을 성공시켰다. <뿅뿅 지구오락실>은 함께 출연하는 안유진·미미·이은지의 합 역시 좋지만, 이영지는 오디오가 절대 비지 않게 하는 동시에 하이 텐션을 유지한다.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의 성공은 더 눈길을 끈다. 이영지가 스타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술을 마신다는 콘셉트의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은 어느새 210만 구독자를 넘겼다. 이제 갓 20살을 넘긴 이영지는 ‘동료 연예인’으로서, 시시콜콜해 보이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꺼내 든다. 출연자들은 마음껏 웃고 이야기하고 집에 가기 싫다고 토로하곤 한다. 인터뷰어 이영지는 덕력과 애정, 동료애로 인터뷰이들을 대한다.(음주 인터뷰 형식은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편하고 즐거운 음주 인터뷰는 없었다.) <쇼미더머니11> 체육관 심사를 맡은 박재범은 이영지에게 합격 목걸이를 준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너의 시간이구나. 너의 시기구나. 마음껏 해라.” 이것이 이영지가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전성기의 첫 번째 시기를 보내는 방식이다. 이다혜(작가,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