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낸 지 3개월쯤 되던 날이었다. 모처럼 한인 마트에서 김치를 샀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매일같이 레토르트 파스타와 2.99파운드짜리 샌드위치만 먹고 살 순 없었다. 하숙집에서는 미국인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저녁이 돼 내가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자 그녀가 부엌에 코를 슬쩍 들이밀었다. 때마침 김치 포장지를 자르고 있던 나는 예의상 “한번 먹어볼래?” 하고 물었고, 그녀는 역겨운 냄새를 맡은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NO!”라고 답했다. 오랜만에 먹는 김치는 분명 맛있었던 것 같은데 먹은 건 생각 안 나고 룸메이트의 반응만 기억나는 걸 보니 적잖이 문화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이렇게 맛있고 몸에도 좋은 김치를 저렇게 천대하다니?’ 이상하게 요즘 기시감이 든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취존’이 대세였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극혐’이 더 많이 들리고 보이는 것 같아서다. 회사에서 헤어롤 말고 있는 사람도 극혐, 향수 냄새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극혐, 카페에서 아이가 운다고 극혐. 단순히 ‘거슬린다’는 이유로 ‘극혐’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쓰는 분위기다. 감정사회학 연구자 김신식은 저서 〈다소 곤란한 감정〉에서 영화 〈기생충〉에 깔린 혐오의 정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영화에서 줄곧 복선으로 작용하던 ‘냄새’를 둘러싼 미묘한 갈등은 후반부에 이르러 결국 살인의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발전한다. “저는 요즘 ‘후각’을 둘러싼 사람들의 혐오와 충돌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이 서울 지하철 1호선의 냄새를 특징 지어 얘기하는 것을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상에서 쉽게 볼 수 있죠. 최근 뉴스에 나온 바로는 ‘월세 사는 사람이 원룸에서 고기를 구워 먹어도 되느냐’라고 지적한 다른 층 주민과 당사자 간 갈등이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역겨운 냄새가 나는 걸 어쩌라고?’ 그러나 특정 냄새를 ‘역겨운 냄새’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미 자신이 받아들인 감각을 스스로 ‘역겹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에 등장하는 ‘한정우’와 ‘한그루’, 두 유품정리사 부자는 남들이 고약한 냄새가 난다며 고개 돌리는 고인의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시신이 있던 자리의 잔해물을 처리하고, 그 과정에서 고인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유품을 골라낸다. 김신식은 “감각에 대한 정서나 감정은 학습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무언가를 ‘느끼는’ 과정에는 개인의 기질만큼이나 주변 환경, 그리고 그 환경에 속한 타인이 관계하기 마련이죠”라고 말한다. 미국 오클랜드 대학의 인류학부 강사와 교수인 수재나 턴카, 크리스틴 듀로, 그리고 줄리 박은 ‘역겨움’이라는 정서와 ‘시민권’의 관련성을 연구한다. 〈Senses and Citizenships: Embodying Political Life(감각과 시민권: 정치적 삶을 체화하기)〉라는 이들의 책은 개인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을 갖는 데 ‘감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감각을 통한 정서 표현으로 사람들은 ‘나와 우리’, 그리고 ‘너와 그들’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지하철 1호선의 냄새가 역겹다고 느끼는 것은 언뜻 본능적인 반응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치적인 견해를 품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느낀 감각과 그에 뒤따라오는 감정을 충분히 의식하고 사유하는 것이 바로 시민 된 의무라는 이야기다. 이들은 “감정이 사고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감각은 몸 자체를 중심으로 일어난다”며 감각과 감정의 시작점을 구분 짓는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감각 행위가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에 그 사람의 성향이 개입된다는 것은 다수의 학자가 동의하는 바다.” 한국인이 중국 음식인 취두부에 호불호를 갖듯, 한국인이 구수하다고 느끼는 청국장 냄새를 외국인들은 ‘역겹다’고 표현할 수 있다. 점심시간에 내 식탁 위에 놓인 샌드위치 냄새는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지만 지하철에서 옆자리 사람이 먹는 샌드위치 냄새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특정 감각에 대해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다.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각적 자극은 무의식중에 특정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거다. 그 결과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차별하는 사람이 된다. 한마디로 ‘차별을 체화한’ 사람이다. 〈기생충〉 속 ‘박동익’이 ‘김기택’을 대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하는 동남아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그들의 피부색에 대한 시각적 인식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고, 노숙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후각적 인식과 구별하지 못하며, 어린아이에 대한 차별과 ‘시끄러움’에 대한 청각적 인식 또한 구별하지 못한다. 때로 건강하게 태운 까만 피부를 찬양하고, 스스로에게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지 못하며, 시끄러운 노랫소리와 각종 소음 공해에도 불구하고 포차와 클럽에 가면서도 말이다. 책 속에 인용된 철학자 사라 아메드의 연구에 따르면 감각과 정서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이나, 실제 상황에서는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 아메드는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때, 사람들은 그 만남뿐 아니라 내게 영향을 준 그 사람의 특성에 대해 자동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아프게 했다면 우리는 그 아픔을 ‘누군가’(혹은 ‘누군가’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 누군가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형성한다. 다른 말로 ‘나 아프네’는 ‘네가 날 아프게 하네’가 되고, 심지어 ‘너는 유해하다’ 혹은 ‘(그래서) 네가 싫어’로 발전한다. 이런 감정적인 반응은 나와 타인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판단 과정이다. 사람은 타인을 나와 구분 짓는 동시에 타인에 대해 특정한 가치를 부여한다”라고 분석한다. 4년 전, 아파트 외벽 도색 작업 중인 근로자가 튼 휴대폰 음악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입주민이 근로자가 의지하던 밧줄을 커터 칼로 끊어 사망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입주민은 음악 소리라는 자극을 ‘짜증’이라는 정서로 치환했고, 급기야 그 감정을 차단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이다. 층간 소음 때문에 일어나는 여타 살인 사건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일상과 관계없는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일까? 예를 들어 얼마 전 혜화역에서 지하철 출입구를 막고 “이동권을 보장하라!”라고 외쳤던 장애인들을 생각해보자. 비장애인 지하철 이용자들이 막힌 출근길에 짜증을 느낄 때, 이들의 눈에 보이는 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다. 그렇다면 이 짜증을 이동권 시위 중인 ‘장애인’과 연결시키는 것은 과연 합당한가? 부실한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숨진 장애인들에 대해 비장애인들은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반대로 장애인들이 계단으로 가득한 지하철을 이용하며 힘들다는 감각과 좌절감이라는 감정을 함께 느낄 때, 이들의 좌절감은 과연 어디를 향해야 하나? 어른이 된다는 건 올바른 ‘시민 의식’을 갖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시민’을 인간의 기본 단위로 생각한다. 시민이라는 건 좁게는 그가 속한 직장이나 가정 내에서의 구성원, 크게는 지역사회와 한 국가의 구성원, 그리고 세계 속의 행동 주체를 의미한다. 우리를 ‘1인분의 사람’으로 만드는 건 소속과 그에 따른 정체성이다. 결국 개인의 정체성은 ‘내가 어디에 속하느냐’의 문제인데, 이 물음은 필연적으로 ‘누가 우리에 속하지 않느냐’라는 또 다른 물음을 낳는다. 올림픽에서 우리는 같은 국민이라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국가대표팀을 응원한다. 반대로, 조선시대에 천민은 양반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존재하던 시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흑인이 백인과 같은 버스에 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21세기 한국에서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직업군인이 강제 전역당하고, 이에 당사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차별은 ‘한 공간에 같이 존재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감각’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영영 봉쇄해버리겠다는 거다. 이렇게 배제를 거듭한 탓에 사회가 ‘견딜 수 있는 감각’의 다양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교통 시스템에서 장애인이 배제되고, 키오스크로 무장한 ‘첨단’ 식당에서 노인들이 배제되고, 직장에서 성 소수자가 배제되고, 카페와 미술관에서 아이들이 배제된다. 나와 다른 몸을 가진 존재, ‘일반적이지 않은’ 감각을 주는 존재 앞에서 사람들은 어쩔 줄 모른다. 인간은 노화가 진행될수록 고음이 잘 들리지 않는데, 단순히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노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노인들은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될 뿐이다. 노키즈 존은 아이들이 타인과 함께 이용하는 공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배울 기회를 박탈한다. ‘가녀린’ 몸에 머리는 짧게 자르고 겨드랑이 털을 기른 여성, 하이힐을 신고 파우더리한 향수를 뿌린 채 어딘가 ‘남성스럽지 못한’ 몸짓을 하는 남성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판단하고 그와 거리를 둔다. 이처럼 우리의 감각은 상당히 제한적이고 편협하다. ‘일반적인’ 몸과 감각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당신이 늦은 오후, 햇살이 잘 드는 2층의 어느 조용하고 ‘쾌적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려 할 때, 이 감각적 경험에는 어떤 존재들이 배제됐을까? “감각 시민권에서 ‘시민권’이란, 내 감각으로 느끼는 예민함을 존중받기 위한 권리의 추구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감각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 각각 다르기에, 이를 존중하기 위해 타인에 대한 배려의 의무와 책임의 선을 미리 정해두는 거죠. 서로를 위해 노력하는 실천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얘기입니다”라고 김신식은 꼬집는다. 물론 지하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옆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나, 집에서 운동을 하면서 바닥에 매트조차 깔지 않아 소음 공해를 일으키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회사에서 헤어롤을 말고 있는 게 ‘거슬린다’는 이유로 혐오감을 표출할 권리, 또는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이때 ‘거슬린다’는 감정은 ‘여성은 언제 어디서든 정돈된 상태여야 한다’는 편견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환기가 원활하지 않은 다세대주택에서 고기를 구워 먹은 것은 민폐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층에 사는 사람에게 “월세 사니까 고기 구워 먹으면 안 된다”고 공격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난에 대한 차별이므로. 만약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의 ‘예민함’을 거침없이 표출할 수 있었다면, 당신에게 특권이 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라 얘기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이 다양한 종류의 ‘예상치 못한 자극’으로부터 줄곧 보호받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한마디로 온실 속 화초였다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느끼는 ‘혐오감’이 상대방에게서 온 것인지, 나로부터 나온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혐오스러운 건지, 아니면 혐오하고 있는 건지. 그게 시민으로서 우리가 응당 가져야 할 의무다. 사회는 바뀌고, 감각과 감정의 맥락도 바뀐다. 예전에는 여성의 생리를 불경한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생리대 광고가 버젓이 TV에 나오는 시대가 됐다. 영국에서 함께 지냈던 미국인 룸메이트를 다시 떠올린다. K-콘텐츠 열풍이 미국을 휩쓴 지금도 그 친구는 김치를 보자마자 “으웩!” 하며 고개를 돌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