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여성을 위한 나라는 있는가
여자라서 맞았다. 여자라서 죽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나? 실제로 그랬다. 남편에게, 남자 친구에게, 스토킹하던 남자에게, 성욕이 끓어오른 남자에게, 그날따라 기분이 나빴던 남자에게….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맞고, 강간당하고, 죽는 여성의 숫자는 해마다 늘고 있는데,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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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대상으로 발생하는 폭력과 살해는 슬프지만 전자에 가깝다. 너무 흔하고 진부하게 발생하는 일이라서다. 수많은 여성 폭력 사건 중에서도 특히 잔혹하거나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폭력이 발생했을 때 기사가 되는데, 이 ‘일부’만 셈해도 한 해 수백 건에 달한다. 이런 경우다. 단지 쇼트커트를 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냐” 추궁받으며 폭행당해 청력을 잃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여성은 결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서울 강남역 건물 옥상에서, 선릉역 오피스텔에서, 경남 거제에서, 경기도 화성에서 살해당했다. 최근 발생한 사건 피해자만 추려도 10대부터 60대까지 연령을 불문한다. 특히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2020년 4만9225건에서 2022년 7만790건으로 급증(경찰청)할 정도로 끊이지 않는데 최근 5년간(2019~2023) 피의자 구속률은 2.21%(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실, 경찰청)에 불과하다. 이 명백한 비극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자주 발생해서 모두를 무감하게 만든다.
BBC 뉴스 코리아가 유튜브를 통해 지난 5월 19일 공개한 다큐멘터리 <버닝썬: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미동조차 없는 수면에 다시 파문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사건을 가장 가깝게 들여다봤던 취재 기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이 다큐멘터리는 공개한 지 불과 3주 만에 980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다큐는 ‘버닝썬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는 과정과 함께 이때 들춰진 문제점들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 집중한다. 승리, 정준영, 최종훈 등 가해자 일부가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과연 이것만으로 마땅한 정의가 실현됐느냐는 의문도 시청자들에게 던진다. 가해자와 피해자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클럽에선 유사한 범죄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 유착 의혹이 제기됐던 윤규근 총경이 송파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장으로 버젓이 근무 중이었다는 점(BBC 다큐멘터리가 공개된 후 그는 서울경찰청 치안지도관으로 사실상 ‘대기발령’ 성격의 인사가 났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사건을 알리려 노력한 여성이 있었다는 점 등도 이런 폭발적인 반응의 배경일 터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짜 비극은 ‘버닝썬 사건’이 무결한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여성을, 여성의 몸을 거래와 착취 대상으로 여기고 너무나 쉽게 소비해온 사회는 결코 이 사건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맥락이다. 이 맥을 끊어내지 못한 탓에 ‘버닝썬’ 이후 한국 사회는 한 발짝도 채 나아가지 못했다.
이런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건 숫자다. 통계청이 올해 4월 발간한 <한국의 안전보고서 2023>을 보면 여성으로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일이 환상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다. 2022년 성폭력 범죄 발생 건수는 4만1433건으로 전년(3만2898건)에 견줘 8535건(25.9%) 늘었다. 성범죄는 2020년 3만105건으로 소폭 감소했지만(팬데믹 초기라 사람 간 접촉이 극도로 줄었던 점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2021년부터 다시 증가세를 보인다.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건 ‘통신매체 이용음란, 촬영 또는 촬영물이용 협박’ 등 디지털 성범죄의 증가다. 특히 2022년 기준 ‘통신매체 이용음란’은 1만605건(25.6%)으로 전년(5079건)에 견줘 2배 이상 늘었다.
혹자는 성범죄 피해자를 ‘여성’으로 단정할 수 없지 않냐고 묻겠지만, 성범죄만큼 피해가 특정 성별에 쏠린 범죄는 찾기 어렵다. 법무부가 2008년부터 2021년까지 발생한 성범죄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전체 11만4420건 가운데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가 10만5546건(92.2%)으로 압도적이다. 특히 ‘성매매 강요, 허위영상물 등의 반포 등’ 범죄에서 피해자가 남성인 경우는 없었다. ‘강간’(98.3%), ‘공중밀집장소 추행’(93.4%), ‘촬영물 등 이용협박’(94.2%), ‘성매수’(97.9%) 범죄의 여성 피해자 비율도 평균을 웃돈다.
성범죄뿐일까. 여성 대상 폭력은 교제 또는 부부 관계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한겨레21>에서 2016년 1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판결이 선고된 여성 살해 범죄(페미사이드) 판결문 427건을 분석했을 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이렇게도 손쉬운 일이라는 데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여성을 살해하는 원인은 지극히 사소한데, 이를테면 ‘나를 무시해서’, ‘반말을 듣자 화가 나서’, ‘말투가 기분 나빠서’ 등이다. 427건의 판결문 중 300건(70.3%)에서 남성은 이 ‘기분’을 이유로 여성을 살해했다.
이 거대한 죽음의 디스토피아를 완성하는 건 다름 아닌 국가다. 수사는 여전히 굼뜨고 판결은 아직도 마뜩잖다. 우리는 ‘웰컴 투 비디오’ 사건과 N번방 사건을 겪고도 여전히 디지털 성범죄 피해 당사자가 또 다른 개인(추적단 불꽃의 원은지 씨)과 함께 추적해야만 범인 검거가 가능한 현실에 산다(‘서울대 불법합성물 사건’ 얘기다). 페미사이드는 개인의 일탈이 아닌 “가장 극단적 형태의 성차별적 테러리즘”이자 ‘“여성에 대한 혐오, 경멸, 쾌락 또는 소유 의식”(<페미사이드>, 다이애나 E. H. 러셀·질 래드퍼드 엮음)이 동기로 작용하는 범죄다. 하지만 여성 살해 기사가 수도 없이 쏟아져도, 이를 줄이기 위해 어떤 국가적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움직임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기괴함의 정점은 여성의 몸을 오로지 ‘출산 가능한 자원’으로 소환할 때다. 2019년 낙태죄가 폐지됐지만 임신 중지를 포함해 여성의 재생산권을 포괄적으로 보장하는 법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꼬박 5년이 지났는데도 여성은 법이 부재한 공백의 틈에서 불안정한 곡예를 타야만 한다. 입법권을 지닌 국회의원 누구도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다가 오로지 ‘저출생’이란 수식어를 대동할 때만 갑자기 여성의 생식능력에 주목한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건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뒤, 빠르게 부서명에서 ‘여성’ 또는 ‘성평등’을 지워버리고 이를 ‘인구’ 또는 ‘가족’으로 대체한 지방자치단체만도 여럿이다. 범죄 피해자로서 여성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을 방기하는 거라면, 이렇게 여성을 ‘생식용 도구’로만 바라보고 활용하고자 하는 건 사실상 국가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 아닐까?
여기까지 적고 보니 여성은 영원히 주체로서 실존하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여성의 몸은 여성이 사라진 전장이다. 그 몸 위를 할퀴고 휩쓸며 지나가는 이들은 어쩌면 영영 여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버티는 방법은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되뇌는 것이다. 좌절과 분노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 온 크고 작은 변화를, 연대가 만들어낸 승리의 순간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일이다. “나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니 내가 돕겠다”는 구하라의 단단한 용기를, “아직도 반성 않는 가해자와 끝까지 싸워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겠다”는 김지은의 단호한 의지를 되새기는 일이다.
기자로 일하며 성범죄 또는 페미사이드 피해자나 유족을 직접 만나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기 시작한 게 2016년부터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로지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마주하며 부디 이들의 싸움이 외롭지 않기만을 바랐다. 폐허 속에서도 싹을 틔우듯 변화를 만들어가는 동안 더 많은 사람이 이들 곁에 서서 함께 목소리를 내주길 바랐다. 지난한 싸움을 지켜보며 깨달은 건 이 모든 폭력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단 점이다. 대신 최선은 영원히 무뎌지지 않는 것, 그러면서 기꺼이 목소리를 내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힘은 여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Writer 박다해 <한겨레신문> 기자. 여성·소수자·인권 문제 등에 관심이 많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Credit
- Editor 이예지
- Writer 박다해
- Art designer 김지은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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