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장’의 작품이 옥션에 쏟아져 나오면서 매출 지표도 껑충 뛰어올랐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발표한 ‘2021년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상반기 결산’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총 거래액은 약 1천4백38억원으로, 2020년 약 4백90억원, 2019년 약 8백26억원, 2018년 약 1천30억원에 비해 상당히 큰 폭으로 늘어났다. 출품 즉시 낙찰돼 ‘경매 5대장’으로 불리는 마스터급 작가들 외에 젊은 작가들의 약진도 만만치 않다. 지난 8월 서울옥션에서 열린 경매에서 문형태 작가의 2018년 작 ‘Diamond’가 4백50만원에서 4천만원에 낙찰되는가 하면, ‘도도새 시리즈’로 알려진 김선우 작가의 ‘모리셔스 섬의 비극’이라는 작품은 1천만원에 시작해 최종 7천9백만원에 낙찰됐다. 최근 아트 시장에서 가장 입소문을 많이 타고 있는 젊은 작가, 우국원의 작품은 3천만원에 시작해 1억2백만원에 낙찰됐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미술 관계자 B씨의 말이다. “미술 시장도 거시적인 경제 흐름 안에서 같이 움직이는 시장이에요. 2006~2007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글로벌 자금 유동성이 전보다 훨씬 높아진 상태죠. 당시 미술계 기사를 훑어보면 지금과 놀라우리만치 내용이 흡사해요. 사람들의 여유 자금이 주식, 채권, 부동산을 거쳐 미술 시장으로 흘러오기까지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려요. 2020년 5월 금리가 0%대를 찍으면서 올해 초 미술 시장이 그 덕을 본 거죠.” 케이옥션 손이천 이사는 오히려 덤덤했다. 시장의 흐름도 흐름이지만, 국내 미술 시장이 갑자기 ‘불장’이 된 건 확실히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황규진 디렉터는 홍콩 대신 서울이 아시아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세계 유수의 아트 페어가 줄줄이 취소되던 상황에서 올해 아트부산이 히트를 친 거예요. 훌륭한 방역 덕분이었죠.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단색화 열풍을 이끈 거장들, 백남준과 그 밖에 실험 미술 작가들의 역사가 깊어요. 타데우스 로팍의 말로는 중국이나 홍콩 등지의 작가와 달리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1940~50년대부터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의 작가들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역사를 자랑하는 공공 미술관의 존재도 한몫하고요.” 손이천 이사는 이제야 우리나라 시장이 ‘제자리’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에 비해 미술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아요. 해외 OECD 국가들은 GDP 대비 미술 시장 규모가 최소 0.1%에서 0.4%인데, 우리나라는 0.01% 정도죠.” 판교에서 갤러리 에이치 컨템포러리를 운영하는 한동민 대표는 “내년에 (세계 3대 아트 페어 중 하나로 꼽히는) ‘프리즈’ 서울이 예정돼 있고, 또 다른 유명 아트 페어가 한국을 노크하고 있다”라고 귀띔한다.
물론 미술 시장에 ‘아트테크’ 바람이 불며 어쩔 수 없이 함께 일어나는 부작용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쏠림과 과잉 현상이다. 손이천 이사는 “2차 시장에 나오는 작가들의 폭이 너무 좁아요. 거의 0.1%도 안 돼요. 경매에 출품할 작품을 선정하다 보면 아무래도 입지가 뚜렷하고 낙찰이 보장되는 작가를 선정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나마 컬렉터의 폭이 넓어져서 우국원, 문형태 같은 젊은 작가들이 조심스럽게 한두 번 출품된 거예요. 그게 결과가 좋으니까 해당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던 사람들이 물밀듯이 위탁을 하고 있는 거고요” 한편 익명의 미술품 컬렉터 C씨는 말한다.
한동민 대표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아트 페어에서 어느 한 작가의 작품에 빨간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사람들은 ‘아, 이 작가 인기가 좋은가 보다’ 생각해요. 완전히 오판이에요. 작품이 팔리는 데는 컬렉터의 취향, 컨디션, 그림을 소장할 공간 여건이 되는지 등 너무 많은 변수가 있거든요. 잘 팔리는 작가라고 해서 무조건 좋을까요? 10개 중에 8개 그림이 팔렸는데 나중에는 사람들이 남은 2개의 그림을 ‘이상한 작품’이라 생각하기 시작해요. 뭔가 하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빨간 스티커가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까 봐 걱정스러워요.”
2차 시장인 경매에 불이 붙으니 1차 시장인 갤러리에도 당연히 영향이 갈 것. 그러나 갤러리들은 대체로 ‘경매 시장’과 선을 긋는 모양새다. “같은 아트 시장이라도 저희는 2차 시장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는 편이에요. 저희가 최근에 박서보 작가 전시를 시작했다고 해서 ‘시기적절하다’ 생각하는 분도 많을 텐데 이런 전시는 보통 1~2년 전부터 작가와 교류하며 진행해온 전시거든요.” 국제갤러리 이승민 디렉터의 말이다.
황규진 디렉터는 “1차 시장은 2차 시장을 따라가면 안 돼요. 갤러리는 주변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작가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죠”라고 말한다. “옥션을 잘 살펴보면 작품 추정가와 시작가가 다른 경우가 많아요. 시장가가 1백만원인 젊은 작가 작품이 30만~40만원에 팔리는 경우가 허다하죠. 다들 김선우·문형태 작가처럼 잘되는 건 아니니까요. 가격이 확 뜬 작가들의 경우에도 이후 작품이 과거 낙찰가에 못 미치면 인식이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거든요.” 젊은 작가를 주로 소개해온 갤러리 대표 A씨는 지금의 이 불장 탓에 공든 탑이 무너질까 봐 조마조마하다. 물론 경매 주최 측도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다.
손이천 이사에 따르면 ‘시작가’는 주로 위탁 판매자가 생각하는 내정가다. “저희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출품작의 낮은 추정가와 높은 추정가를 산정해요. 대부분 낮은 추정가를 경매 시작가로 권해드리지만, 위탁 판매자가 빠른 ‘처분’을 원할 경우 시작가를 그 이하로 맞춰드리기도 하죠.”
갤러리 입장에서는 작가를 보호해야 할 의무도 생긴다. 한동민 대표의 경우 얼마 전 진행한 신진 작가 특별 기획 전시에서 가격표와 빨간 스티커를 과감히 없앴다.
규모 있는 갤러리만의 방식도 따로 있다. 황규진 디렉터는 “저희 갤러리의 경우 역사가 40년에 달하다 보니 경매시장을 조심스레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 팔았던 구작이 유찰될 위기에 놓인 경우, 저희가 먼저 응찰해 작품을 구매하기도 합니다. 갤러리 역시 경매사의 큰 고객이죠”라고 설명한다. 컬렉터 C씨는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옥션에서 가격 장난을 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해요”라고 말한다. “사실 우연히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예요. 경매에서는 응찰자 2명만 있어도 가격이 굉장히 많이 올라갈 수밖에 없죠. 하지만 미술 시장에서 그 작품의 전체적인 수요가 올라갔느냐 하면 그건 아니잖아요.” 갤러리라고 해서 모두 1차 시장인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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