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는 싶은데, 만나고 싶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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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 소개팅에 대처하는 연상녀의 자세
소개팅 성공 여부의 5할은 메뉴 선택이 좌우한다. 좋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역량은 상대의 센스를 판가름하는 척도이니 말이다. 이는 소개팅에서 암묵적으로 남자의 영역이지만, 상대가 연하라는 말에 ‘K-장녀’ 끼가 발동한 내가 나서서 주선자와 소개팅남의 집으로 음식을 주문했다. 소개팅하기 귀찮다는 볼멘소리와는 달리 마음만은 누구보다 신났던 걸까? 서비스라도 하나 줄까 싶어 배달 앱 주문 요청 사항에 “랜선 소개팅남에게 보낼 거예요. 맛있고 예쁘게 해주세요”라는 간지러운 메모까지 남겼다.
6:30 PM
비대면 소개팅용 꾸안꾸 스타일
줌 소개팅 시작 30분 전. 의외로 고민된 건 의상 선택이었다. 외출하는 것도 아닌데 각 잡고 꾸미는 건 부자연스럽고, 그렇다고 ‘재택근무 패션’ 그대로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모니터 앞에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프라인이라면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오라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상반신 위주의 영상에서는 매력 발산 범위도 제한적이었다. 전략은 어깨.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틀어 그나마 예쁜 구석이 어깨인 만큼 팔이 잘 보이는 슬리브리스 의상을 선택해 장점을 부각했다. 상의는 오프라인 소개팅에서는 엄두도 못 낼 블랙 미니드레스를 꺼내 입은 반면, 화면에 보이지 않는 하의는 후줄근한 파자마를 고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꽤 짜릿하기도 했다. 반면 비대면 소개팅에 임하는 N의 온도는 나와 극명하게 달랐다. 오늘의 만남을 문자 그대로 ‘방구석’ 소개팅이라 받아들인 그는, 갓 씻고 나와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툭툭 털어내는 털털한 모습을 보였다. 비대면 소개팅을 해석하는 두 사람의 온도 차도 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관전 포인트였다.
TIP
초면에 어색한 침묵에 휩싸이는 것만큼 난감한 일도 없다. 먹방과 랜선 집들이 등, 촘촘한 프로그램 짜 ‘오디오가 비는’ 상황에 대비하자.

3, 2, 1! 랜선 치얼스
줌 소개팅의 시작은 업무 화상회의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예약한 시간에 맞춰 서버가 열리고, ‘줌으로 OO이를 줌해보기’라는 귀여운 방제도 설정했고, 나와 주선자 K 그리고 N 셋이 참석했다. 랜선 소개팅에서는 오프라인에 비해 주선자의 역할이 크다. 주선자는 처음 보는 사람과 비대면으로 대화를 나누는 일을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브리지이자, ‘그룹 영통’의 진행자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만남에서는 주선자가 중간에 자리를 뜨는 것이 관례이기도 하나, 온라인의 경우 갑자기 접속을 종료하는 것이 더 어색하기 때문에 소개팅 내내 대화를 주도하며 활기를 더한다. 셋의 대화는 간단한 자기소개로 시작해 미리 주문해놓은 배달 음식 상차림을 소개하는 ‘먹방’으로 이어졌다. 각자 거주하는 동네가 달라 완전히 같은 메뉴를 주문할 수는 없었지만, 식단의 공통 콘셉트는 아시안 요리로 정했다. 각각 로메인 볶음 누들과 팟타이 누들, 제너럴 쏘 소스맛 치킨을 시켰는데, 이국적인 요리라는 유사성 덕분에 신기하게도 마주 앉아 함께 식사하는 기분이 들었다. 각자의 공간에서 와인잔을 들고 랜선 치얼스를 하는 모습이 퍽 귀엽기도 했고 말이다. 점점 어색함이 사라지고 N과 나는 요즘 관심사, 가치관 등과 관련한 질문을 토대로 교집합을 발견해나갔다. 둘의 공통 관심사는 〈슬램덩크〉의 영화화 소식이었다. 명작은 그냥 명작으로 남겨두면 좋겠는데, 공연히 영화로 만들어 아름다운 유년의 추억이 부관참시당하는 기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마포구와 용산구 사이의 아득한 거리와는 달리, 둘의 심리적 거리감은 차츰 좁혀지고 있었다.
7:30 PM
랜선 도슨트
N은 N5BRA(엔오브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라고 했다. 이 시대를 사는 MZ세대가 겪는 상황을 그림으로 확장시켜 이야기한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작업에 대해 묻던 중에 즉석 전시회도 열어봤다. 상대의 모니터 화면을 자료 화면처럼 볼 수 있는 화면 공유 기능을 활용하니 그럴싸한 도슨트 프로그램이 완성됐다. N은 채팅창에 자신의 작품 이미지를 띄워가며 화가로서 지닌 생각을 들려줬다. N의 그림체에서 도드라진 특징은 인물의 눈에 표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 주제에서는 ‘내 친구는~’ 식의 카더라 리액션이 도움이 됐다. 글에서 진심은 괄호 안에 넣듯, 사람의 감정이 담긴 눈을 ‘괄호( )’ 모양으로 그린다는 친구의 일화를 공유했는데, N 역시 정보가 표정으로 과잉 전달되는 것이 싫어 인물을 무표정하게 그린다며 공감했다. 젊은 작가로서의 고민을 터놓는 진지한 이야기도 오갔다. 3년 전만 해도 공사장 노동을 하며 그림 재료를 샀는데 지난해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림이 팔린 이후로, 그림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돈을 버는 상황에 감사하면서도, 과거에 비해 너무 급진적으로 환경이 달라져 허무주의에 빠진 것이 요즘 고민이라고 했다. 처음엔 연하남이라 어리게만 봤는데, 풋내 나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는 삶의 중심을 잘 잡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듬직함도 느껴졌다.
8:00 PM
랜선 집들이
취향을 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공간을 관찰하는 일. 오프라인이라면 원나이트 스탠드가 아니고서야 초면에 소개팅남의 집에 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줌에서는 타인을 나의 사적인 공간으로 초대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일어난다. 영상 채팅의 배경이 제 방인 탓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집과 공간, 인테리어 취향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 달 반 전에 작업실 겸 거주 공간인 스리 룸 빌라로 이사했다는 그의 공간은 작업실 2개와 휴식을 취하는 침실로 나누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팔지 않고 개인 소장 중이라는 그림에 얽힌 사연을 들을 때는 정말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간 기분이 들었고, 하나둘 사 모으다 보니 어느덧 거실 벽 빼곡히 찼다는 그림 컬렉션에선 수집가로서의 취향도 엿볼 수 있었다. 카메라에 비치는 앵글만 슬쩍 청소해놨다가 예기치 않게 집들이를 하다 보니, 미처 치우지 못한 집 안 곳곳이 드러날 때 풍기는 인간미도 비대면 소개팅만의 묘미였다. 마침내 질릴 만큼 알찬 랜선 소개팅의 모든 프로그램이 마무리됐다.
TIP
사랑을 쓸 때는 화이트보드로 쓰세요~.
N에게 오늘 비대면 소개팅에 대한 감상을 줌 앱 내 화이트보드에 써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그림 그리는 사람답게 문자 대신 일러스트 한 점을 그려줬다. 무형의 분위기가 그림이라는 유형물로 완성돼가는 과정이 흡사 근사한 라이브 페인팅을 방불케 했다. 온라인 강의를 들을 때 필기용으로 주로 활용되는 화이트보드 기능도 때로는 이토록 로맨틱할 수 있다.

End
」지금 만나러 갑니다
먹방 라방부터 온라인 전시, 랜선 집들이까지, 오직 비대면 소개팅이기에 가능한 일이 주는 즐거움은 기대 이상으로 특별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못하는 환경을 위해, 온택트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앱에서 인간의 교류는 어느 범위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비대면 커뮤니케이션만으로도 인간은 서로가 지나온 시간의 조각을 내어주며 친구가 될 수 있는 걸까? 그 가능성은 줌 소개팅의 결말로 대신한다. N은 “누나네 집들이는 제가 직접 가서 할게요!”라는 말로 화답했고, K와 N이 우리 집으로 건너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고, 눈을 마주하며 대화하는, 코로나 시대 이전에는 대수로울 게 없었던 일상의 기쁨과 소중함이 더욱 간절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