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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은 왜 하필 미국에서 터졌을까?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출품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요즘. 아닌 게 아니라 <기생충>의 성공 이후 한국 문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지금 K-콘텐츠를 향한 그들의 관심은 전보다 더 지속적이고, 동시에 주류적이다.

BY강보라2021.12.18
지난 핼러윈 데이, 나는 아침부터 설탕을 녹였다. 안 그래도 코로나19의 여파로 핼러윈용 벌크 캔디가 미국 곳곳에서 매진됐다는데, 대신 달고나를 만들어 나눠주면 동네의 힙한 한국 이민자로 등극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오징어 게임〉 코스튬보다 돈도 덜 들 테고 말이다. 하지만 아마존에서 구매한 달고나 키트는 결국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내가 사는 이곳 포틀랜드의 한인 마트에서 한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달고나 키트 역시 드라마 방영 이후 모두 팔려나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전 미국이 달고나 캔디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열을 올리는 모양이었다. 결국 스테인리스 국자 하나를 희생시켰고, 호떡을 만들려고 샀던 햄버거 프레스를 꺼내 들었다. 우리 집에 달콤한 노스탤지어 향이 퍼졌다. 〈오징어 게임〉의 ‘새벽’이 환기구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가. 비슷한 일이 2년 전에도 있었다. 〈기생충〉이 개봉하던 날, 포틀랜드의 유명 극장 밖에 길게 늘어선 백인들을 보고 우쭐해했던 기억. 한동안 이곳 한인 마트에서 너구리와 짜파게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포틀랜드는 인구의 77%가 백인인 도시다. 지난 이민 생활 동안 내가 거쳐왔던 뉴욕이나 LA에 비하면 외국 문화, 특히 타 인종 문화의 열풍에 덤덤한 편이다. 우리 동네에서 나는 거의 유일한 비백인인데 그런 나에게 동네 주민들이 먼저 다가와 〈기생충〉을 이야기하거나 〈오징어 게임〉에 대해 물어볼 때, 그리고 내가 준비한 달고나를 받고 신이 나서는 “한국 토피(toffee)”라며 맛 평가를 할 때,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안 순간 눈을 빛내며 “서울에 가고 싶다.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데, 그곳의 문화가 흥미롭다”라고 말한 뒤 마치 서울 가이드라도 해달라는 듯 나의 대답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릴 때, 이젠 정말 이 백인들의 소도시에서도 K-문화가 이슈임을 새삼 체감한다.
 
9년 전 뉴욕으로 이민 왔을 때 내가 미국인들에게 주로 소개했던 (그들이 알 만한) K-콘텐츠는 여전히 박찬욱의 〈올드보이〉와 봉준호의 〈괴물〉 정도였고, 그것도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먼저 조짐을 보인 건 K팝이다. 당시 일 때문에 만났던 패션업계 사람들은 내게 2NE1 같은 K팝 아이돌 이야기를 먼저 꺼내곤 했다. 트렌드에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는 뉴욕 하이엔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의 백인 남자 홍보 담당자가 내 앞에서 K팝 아이돌 이름을 줄줄 읊어 깜짝 놀랐던 기억도 난다. 취재차 미국의 배우 지망생들을 인터뷰했을 때 그들은 내게 BTS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BTS? 고개를 갸웃대던 내게 누군가 어눌한 발음으로 ‘방탄소년단’이라 했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한국에서는 그들이 그 정도로 인기 있지는 않다”라고 대답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한국보다 해외에서 먼저 만들어졌던 BTS 팬덤을 직접 확인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영국 매거진 〈모노클〉의 타일러 브륄레 같은 힙스터들이 뉴욕 패션계에 등장했다고 해서, 그들의 취향이 꼭 주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 문화가 미국의 심장까지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부산행〉과 〈킹덤〉을 보고 한국 좀비는 다르다 이야기하는 ‘외국 콘텐츠 좀 아는 미국인’들의 리뷰를 읽으며 한국 문화가 적어도 과거 일본 문화에 버금가는 비주류적인 인기는 얻을 수 있겠다고 예상했지만, 콜드플레이가 ‘BTS 효과’를 누리기 위해 먼저 협업 제안을 하고, 블랙핑크 멤버들이 하이엔드 패션 캠페인 메인 모델로 뉴욕 5번가를 장식할 줄은 정말 몰랐다. 사실 미국 사람 대다수는 해외여행은커녕 자신이 살고 있는 주(州) 바깥으로 벗어나는 일이 많지 않다. 매년 어떻게든 해외로 나갈 구실을 찾는 나 같은 반도인에게는 뜻밖의 통계기도 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인들이 얼마나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놀랄 때가 많다. 심지어 같은 영어권 국가에서 온 비틀스가 미국을 흔들었을 때, 미국인들이 “영국의 미국 침공”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놀라워했던 건 평소 그들이 자국 문화 이외의 대중문화를 거의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에서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내부에서도 비자국 문화에 대한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이슈며, 특히 그 대상이 영어권이나 유럽권이 아닌 아시아, 일본이 아닌 한국이라는 점은 미국인들에게도 큰 문화적 전환점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의 K-콘텐츠 열풍을 두고 많은 전문가가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틀린 접근은 아니지만 애초에 넷플릭스가 미국인들이 해외 콘텐츠를 쉽게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잘 만들어뒀다는 점 역시 함께 생각해볼 일이다. 넷플릭스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광고 없이 정액제로 볼 수 있는 OTT 서비스를 론칭하기 전까지 미국에는 국외의 다양한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거의 없었다. 온디맨드(주문형 서비스)나 DVD로 생소한 외국 콘텐츠를 구매하는 건 너무 수고스러웠을뿐더러, 케이블 채널에서도 외국 콘텐츠를 방영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의 전 세계적 흥행은 사실 넷플릭스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이 작품이 뜻밖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넷플릭스가 뒤늦게 부랴부랴 홍보에 뛰어들었을 정도다. 〈종이의 집〉의 사례는 넷플릭스에 비영어권 작품도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경험을 안겨줬고, 이후 넷플릭스로 하여금 전 세계 로컬 작품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지난 10년 동안 ‘Me Too’, ‘Black Lives Matter’, ‘Stop Asian Hate’ 등의 인권 운동을 거치며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바뀐 것도 미국의 콘텐츠 다양화를 이끈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백인 남성 중심의 제작 환경과 남녀 임금 격차 이슈부터 하비 와인스타인을 위시한 성 추문 폭로, 다양성 영화를 배제하는 아카데미 위원회를 향한 ‘화이트 오스카’ 논란 등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성난 파도에 K-콘텐츠라는 솜씨 좋은 서퍼가 사뿐히 올라탄 것이다. 이런 흐름을 가장 빨리 반영한 건 제작사들이다. 특히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HBO맥스 등 콘텐츠 파이를 늘릴 시기를 맞은 플랫폼들은 문화적 다양성이 보장된 영화 및 드라마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해외 각국의 콘텐츠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각성에 떠밀린 것이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동안 할리우드 제작사에서 내세웠던 “흥행이 안 돼서”라는 핑계가 그저 편견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캐나다의 한인 가족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은 아시안 가족의 코미디가 그 자체로 오롯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줬고, 중국인 이민자 2세 소녀의 첫사랑을 다룬 퀴어 영화 〈반쪽의 이야기〉는 트라이베카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 이후 넷플릭스가 ‘업둥이’로 데려갔으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작가 케빈 콴은 영화 판권을 요청하는 제작사가 아시안이 아닌 백인 배우를 쓰고 싶어 해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공식 석상에서 여러 번 언급하며 아시안 제작 콘텐츠를 향한 할리우드의 편협한 태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봉준호 감독과 같은 해 아카데미 시상식 캠페인을 벌였던 〈페어웰〉, 한국에서 꼭꼭 숨겨두었던 배우 윤여정을 세계인의 귀여운 할머니로 만든 영화 〈미나리〉, 산드라 오가 주연을 맡은 넷플릭스 시리즈 〈더 체어〉 등 아시아인의 이야기를 다룬 콘텐츠 또한 현재 평론과 상업성 측면 모두에서 꾸준히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다양성 콘텐츠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OTT 플랫폼이 로컬 작품 제작을 가속화하는 것은 제작비 측면에서도 충분히 유리하다. 특히 한국처럼 콘텐츠 제작의 퀄리티가 보장되는 국가라면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기업 입장에서는 더욱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가 한국 기업들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자본을 통 크게 투자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의 대중문화 역시 동아시아 시장을 넘어 전 세계에 어필할 만큼 충분히 성장한 상태다. 이미 상업 영화 제작 편수에 비해 지나치게 많았던 한국 영화계의 고급 인력들이 조금씩 드라마로 옮겨가던 가운데, 넷플릭스가 국내에 진출하면서 글로벌 로컬 시장의 왕좌를 한국이 때맞춰 차지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오징어 게임〉은 작품의 호불호나 질적 완성도를 떠나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콘텐츠의 요건, 즉 다양한 캐릭터와 사회적 함의, 판타지와 스릴러적 장르 요소(〈왕좌의 게임〉이나 〈헝거 게임〉 같은 판타지 스릴러), 그리고 가면과 코스튬(〈스타워즈〉나 마블, DC 코믹스 등에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등이 공식에 들어맞게 구성돼 있는데, 이것은 이전의 〈종이의 집〉과도 비슷하다. 수많은 미국 언론이 〈오징어 게임〉 이후 챙겨 봐야 할 한국 드라마 리스트를 추리고 있는 요즘, 나는 역이민을 고민하기도 한다(재미있는 게 한국에 다 있는데 미국에서 살 이유가 뭐람?).
 
〈오징어 게임〉의 뒤를 이은 〈마이 네임〉이 미국 순위 10위 안에 든 걸 보면 확실히 현재 미국인들은 한국의 새 드라마 소식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눈치다.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 나는 넷플릭스의 〈지옥〉을 기다리고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좀비 영화 마니아들을 흥분시켰던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만든 작품이니, 어쩌면 〈오징어 게임〉 이후 연속 안타를 날릴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이 드라마에도 먹방 장면이 나올까? 그럼 나는 또 무슨 음식을 이웃들에게 대접하게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