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는 자신의 성공담을 근거로 평소 ‘얼빠’에 ‘짝사랑’만 하다 끝나는 Y에게 동호회에서 괜찮은 남자를 만나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라며 조언했다. 그런데 Y는 동호회에서도 고질적인 짝사랑 패턴을 되풀이했다. K는 잘생긴 외모에 번듯한 직장과 유머 감각, 세련된 매너를 갖춘 훈남이었다. 자전거 동호회 총무인 K는 신입 회원들을 살뜰히 챙겼고, Y는 그런 그의 자상한 면모에 반해 J를 붙잡고 마침내 이상형을 만난 것 같다며 들떠 했다. 오늘 그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나왔는지, 아인슈페너를 좋아하는 취향이 자신과 닮지 않았는지,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었는지, 자전거 초보인지라 페이스를 따라가기 힘든 자신을 위해 동호회 회원들에게 좀 쉬다가 달리자고 제안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지 아냐는 식이었다. 그의 행동에 사사건건 의미를 부여하는 Y가 답답했던 J는 은근슬쩍 끼를 부려 마음을 드러내보라고 권하거나, 자신의 애인과 넷이서 자연스럽게 더블 데이트하는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Y는 매번 단호히 ‘NO’라고 외쳤다. K에게 호감을 느끼는 지금 이 상태가 충분히 행복하고 좋기 때문에, 굳이 그에게 고백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막상 사귀어보니 자신이 기대한 유형의 남자가 아니라 실망했던 과거 연애사까지 들먹이며 말이다. Y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연애를 하다 보면 내가 바라는 환상 속의 모습과 다른 현실 속 상대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법이다. 밖에서 데이트할 때 보던 댄디한 패션 대신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추레한 추리닝 바지를 입은 모습도 보게 되고, 예민하고 섬세해서 좋았던 상대의 취향이 한편으로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작용해 나를 힘들게 하거나, 친구들 사이에서 의리남이라 불리는 모습이 때때로 남에게는 오지랖을 부리면서 나에게는 소홀한 것 같은 서운함으로 남을 때도 있다.
짝사랑을 즐기는 사람은 사랑을 할 때 상대가 항상 매력적인 모습으로 존재하길 기대한다. 실망하거나 변하지 않고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중요한 건 현실이 어떻냐는 사실보다는, 혼자 하는 이 ‘썸’이 늘 핑크빛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전제다. 무엇보다도 이런 일방적인 사랑 관계에서는 상처받을 일이 하나도 없다. 나 혼자 시작하고 때가 되면 나 혼자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데 주연과 연출, 편집을 오롯이 혼자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리하고 만족스러운 일인가. 인간은 짝사랑에 익숙하며 오랫동안 짝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존재다. 쉽게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부모의 헌신은 자식을 향한 일방향 짝사랑의 결과다. 우리는 내리사랑이라는 말로 이런 짝사랑을 당연시해왔으며, 부모가 되면 자신이 받은 사랑을 자식에게 똑같이 베푼다. 모성애 혹은 부성애라는 이름하에,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의 성장과 행복을 바라며 쏟아내는 위대한 짝사랑 DNA를 타고난 것이다.
또한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도 짝사랑 단계를 거친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B. 헐록은 청소년기에 이르러 2차 성징의 출현과 호르몬의 분비로 인한 사춘기의 성적 기능의 성숙이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고 봤다. 헐록은 이 시기 이후에 나타나는 이성 관계의 양상을 크게 송아지 사랑, 강아지 사랑, 연애 단계 3단계로 구분했는데, 15~16세 사이에 시작되는 송아지 사랑 단계에서는 주로 연상인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만 용기가 없어 혼자 짝사랑을 하곤 한다. 주로 선생님이나 친구 오빠, 연예인 등이 그 대상이 된다. 16~18세 사이의 강아지 사랑 단계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연장자에서 또래 이성으로 옮겨가며, 일대일 관계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또래와 함께 어울리는 모임을 선호한다. 동아리 친구나 교회 오빠를 짝사랑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런 풋사랑을 거쳐 연애 단계인 19~20세에 이르러 비로소 짝사랑의 형태를 벗어나 한 사람의 이성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정식으로 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성인으로 성장하더라도 반복되는 짝사랑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성숙한 성인으로서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상황은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현실에서 이성을 만날 기회가 적은 경우로, 이 유형은 실제 사랑보다는 짝사랑의 환상에 빠지기 쉽다. 두 번째는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는 경우다. 스스로의 외모나 성격, 능력에 콤플렉스가 있거나 과거의 실연 경험이 상처로 남아 이성과의 만남을 회피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이성에 대해 너무 높은 이상을 기대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이상형에 대한 기준과 마지노선이 높으며, 나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사람이 현실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들은 주변의 누군가를 이상형으로 설정해두고, 그 환상을 깨기 싫어 실제 사랑에 뛰어들지 않는다. 네 번째는 성인이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 같은 사람으로, 아직 현실 속에 뛰어들고 싶지 않은 피터팬적 성향을 지닌 어른아이다. 현실 연애를 회피하고 짝사랑의 환상에 갇혀 사는 Y의 사례도 피터팬 증후군(Peter Pan Syndrome)적 모습을 띤다.
한 번이라도 짝사랑을 해본 이라면 짝사랑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지 잘 알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상대를 향한 마음을 포기하기 어려워 혼자 울며 견뎌내야 하는 것이 짝사랑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보여주는 작은 호감의 싹을 부여잡고 그 싹이 트이지 않을까 스스로를 희망 고문하는 기약 없는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짝사랑이다. 이렇게 일방적인 사랑의 결말은 그리 아름답지 않으며, 가슴을 슬프고 아프게 한 채 훗날 뒤돌아보면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뿐이다. 혹 Y처럼 짝사랑의 환상에 젖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과 전문의로서 얼른 빠져나오길 바란다는 조언을 전하고 싶다. 송아지와 강아지가 아닌 소와 개가 하는 성숙한 사랑을 하라고 격려하고 싶다. 짝사랑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감정이 아니라며 합리화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혼자 하는 짝사랑은 스스로를 그 상황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뱅뱅 돌게 만든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개인의 인간적 성숙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다. 애석하게도 짝사랑의 결말은 정해져 있으며, 잠시 나의 마음을 풍족하게 해준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짝사랑을 통해 심리적으로 얻는 것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때로 힘들고 상처받더라도 누군가와 정말로 사랑을 주고받는 ‘찐사랑’을 하는 성숙한 존재가 돼야 한다. 타인에게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이 사랑도 받을 줄 아는 것처럼, 그 모든 것에 앞서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더 잘 받는 법이니까.
Who?
▶ 전미경
천안 굿모닝 정신건강 의학과 의원에서 환자들을 상담하며, 유튜브 채널 〈Dr.전미경의 닥전TV〉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저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을 닮았다〉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