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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과 연애해도 괜찮을까?

너무 많은 것을 알아 용기 내기가 쉽지 않아졌다. 페미니즘을 접한 뒤로 연애가 한층 더 망설여지는 여자들을 위해, 4명의 여자가 조언을 건넸다.

BYCOSMOPOLITAN2020.12.01
 
이렇게 여성 혐오가 만연한 세상에서 남자와 연애하는 게 가능할까? 한남과의 연애 잔혹사를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처음 만난 남자가 조금이라도 여성 혐오적인 뉘앙스의 말을 하면 마음속에는 이미 빨간불이 켜진다. 그 남자 어땠냐고 묻는 친구에게 “그냥 한남이야”라는 말로 얼버무리면서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남’은 모든 한국 남자를 싸잡아 조롱하는 게 아니라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 사고를 비판 의식 없이 그대로 답습하는 습관을 꼬집는 말인데,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너무 많다 보니 ‘한남’과 ‘한국 남자’ 사이의 경계가 조금씩 희미해졌다. 하지만 한남이라며 무조건 ‘거르기’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한남 문화’를 캔슬하는 것이지, 한국 남자를 캔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어쩌면 가장 친밀한 관계 맺기 방식인 연애야말로 한남과의 투쟁 최전선이 될 수도 있다.
 
 

페미니즘은 여자의 투정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회사원 김주리(가명, 28세) 씨는 3년째 사귀는 남자 친구가 처음에는 한남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여겼다. 남자 친구는 언제나 다정했고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밴드를 하는 그의 곁에는 늘 마초 친구들이 득시글거렸지만 주리 씨가 버닝썬 사태나 N번방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며 비난하면 그는 서슴없이 범죄자들을 함께 욕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저와 관련성이 적어 보이는 사안에 대해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했어요. 예를 들면 동성애는 페미니즘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식이죠.” 남자 친구가 밴드 동료를 오래도록 불러온 별명이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단어인 걸 알고 나서 여러 번 불편하다고 얘기했지만 그는 “쓰면 안 되는 표현인 건 알지만 우리끼리 부르는 말이니 상관없다”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우리가 그 형을 너무 오랫동안 그 별명으로 불러서 본래 뜻과 맥락은 상관없게 됐다”라는 나름의 그럴싸한 논리도 폈다. 주리 씨는 남자 친구가 그동안 자신의 말에 동조한 게 실제로 여성 혐오의 현실에 통감해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여자 친구인 자신에게 동조하려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부러 다른 친구들과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페미니즘을 대화 주제로 꺼내기 시작했어요. 남친이 챙겨 보는 제 SNS 계정에도 차별금지법부터 흑인 인권 시위에 관한 내용까지 평소 제가 자주 보는 콘텐츠를 꾸준히 올리고요.” 주리 씨는 자신이 하는 말들이 단순히 분노하거나 남자 친구를 ‘계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세계관의 일부분임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표현하는 중이다. “가끔 저를 바라보는 남자 친구의 눈빛에서 어딘가 복잡한 마음이 보일 때가 있어요. 마냥 꿀 떨어지던 예전과는 좀 달라요. 그제야 진짜로 ‘연애’한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제가 여성 혐오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걸 투정받아주듯 들었다면, 이제는 사안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인지하기 시작한 것 같거든요.” 주리 씨는 그와 2년 넘게 만난 시간보다 최근의 10개월 남짓한 시간이 훨씬 더 농밀하다고 말한다.
 
 

말은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남자

대학원생인 한지연(가명, 25세) 씨는 1년 넘게 사귄 남자 친구가 HPV 예방 주사를 맞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처음에 맞겠다고 얘기한 뒤로 첫 접종을 하기까지 6개월이 걸렸어요. 비결이 뭐냐고요? 그냥 계속 쉬지 않고 얘기했어요. 잊을 만하면 슬며시 얘기를 꺼내고, 또 잊을 만하면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화도 내면서요.” HPV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바이러스지만, 유독 남성들은 경각심이 낮은 편이다. 지연 씨의 남자 친구 역시 그녀와 함께 HPV를 공부한 적 있고, 여아와 달리 남아에게는 국가 예방 접종이 지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같이 분노하기도 했지만, 접종 가격을 알고 나서 한 발짝 물러섰다. “저라고 그 돈을 낼 때 아깝지 않았겠어요? 이중적인 모습에 엄청 화가 났죠.” 끈질긴 설득 끝에 남자 친구는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접종할 수 있는 병원을 검색했고, 세 차례의 접종을 모두 마쳤다. 지연 씨는 남자 친구의 접종 확인서를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다. “혹시라도 나중에 헤어지게 되면 돌려줄 생각이에요. 이걸 갖고 있으면 나중에 다른 여자 만날 때 제게 고마워하지 않을까요? HPV 예방 접종한 남자가 얼마나 드문데요.” 지연 씨가 남자 친구를 끈질기게 설득해 변화를 유도한 게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다른 남자 친구에게 페미니즘 총서를 읽힌 적도 있어요. 둘 다 해외에서 공부할 때였는데, 오랜만에 만남을 앞두고 ‘책 읽고 독후감까지 써서 보내지 않으면 약속 장소에 안 나갈 거다’라고 못 박았죠. 결국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더라고요.” 지연 씨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저는 연애할 때마다 ‘어디 가서 네가 나 같은 여자 만날 수 있나 봐’라는 심정으로 만나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저를 위해 행동을 고치지 않는 남자는 만날 필요가 없어요.” 지연 씨는 무엇보다 본인이 확고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연애는 대신해줄 수 없으니 말이다.
 
저를 바라보는 남자 친구의 눈빛에서 어딘가 복잡한 마음이 보일 때가 있어요. 마냥 꿀 떨어지던 예전과는 좀 달라요. 그제야 진짜로 ‘연애’한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자기도 모르게 가스라이팅하는 남자

은행원인 박미소(가명, 29세) 씨는 요즘 남자 친구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원래 싸우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제가 논리적으로 말을 잘 못하는 편이거든요.” 순하다면 순한 성격 때문에, 연애할 때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끌려가는 건 아닌지 고민한 적도 많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가스라이팅에 대한 기사를 봤어요. 연애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관점에 물들기 마련인데, 어디서부터 가스라이팅인지 경계가 모호하다고 생각했죠.” 미소 씨의 남자 친구는 화를 내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평소 그녀에게 소소한 불만을 늘어놓던 그가 언제부턴가 그녀의 사고방식까지 트집 잡기 시작하자 미소 씨는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생각 없이 말하는 습관이라든지, 정리 정돈을 잘 못하고 심하게 덜렁대는 성격은 저도 고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번은 ‘너는 진짜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발단은 혜화역 시위였다. 남자 친구는 왜 여성들이 일부러 불법 촬영을 저질렀는지, ‘미러링’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미소 씨는 “너무 감정적인 시위다”라며 거리를 두는 남자 친구를 보며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쌓이고 쌓이니 어느 순간 저도 ‘참지 말자’며 마음을 굳게 먹었고, 그러다 보니 만날 때마다 사사건건 싸울 일이 천지더라고요. 한번은 다툼 끝에 헤어진 적도 있지만, 곧 자연스럽게 다시 만났죠. 좀처럼 사과라는 걸 하지 않던 남자 친구가 사과를 하기 시작했고요. 그러면서 깨달았어요. 그 전까지 제가 너무 많이 참았다는 걸요.” 미소 씨는 지금 자신의 연애가 남들 보기에 어떨지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연애를 이겨 먹기 위해 하는 건 아니죠. 그런데 둘이 함께 있을 때 적어도 제가 남자 친구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면 안 되잖아요?” 미소 씨는 중요한 건 늘 좋은 게 아니라, 날아갈 만큼 좋기도,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지긋지긋해지기도 하면서 계속 관계가 이어지는 거라고 말한다. “남자 친구가 정말 잘못을 인정해 사과하는 건지, 제 말을 이해한 건지 저는 알 길이 없잖아요. 이해라는 건 측정할 수 없는 거니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지금처럼 끊임없이 부딪혀보는 것뿐이죠.”
 
 

집안일에 소홀한 동거남

프리랜서 최이서(가명, 35세) 씨는 같이 사는 남자 친구와 집안일을 동등하게 분담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늘 답답한 마음이다. “같이 사는 중형견 두 마리를 산책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커요. 중형견은 활동량이 많아 자주 놀아줘야 하거든요.” 프리랜서인 그녀는 코로나19 이후 일이 줄어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반면, 남자 친구는 한창 일이 바쁜 시기라 5:5로 정확히 집안일을 배분할 수가 없어졌다. 미국인인 남자 친구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도 배려해야 한다. “실은 성격 차도 커요. 저는 반려견들이 조금만 짖어도 이웃집에 피해를 줄까 봐 노심초사하는데,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거든요. 평소에도 ‘밥을 먹였냐’, ‘물은 잘 마셨냐’ 챙기는 게 늘 제 몫이다 보니 그런 제 모습이 ‘잔소리하는 엄마’와 겹쳐 보이는 순간도 많아요.” 이서 씨는 이런 부분에 대해 늘 터놓고 얘기하는 편이다. 하지만 각자 경제적으로 가정에 기여하는 바가 다르다 보니 어느 시점에서는 수입이 더 많고 안정적이며, 따라서 업무가 더 바쁠 수밖에 없는 남자 친구를 배려해야 하는 입장이 되곤 한다. “이렇게 생각하기 싫지만, 저는 나름 미국 유학도 다녀온 사람이고 페미니즘 공부도 오래 했으니 꿈꿔왔던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이서 씨의 남자 친구가 집안일에 소홀한 건 바빠서일까? 아니면 그저 성격 탓일까? 이서 씨가 남들한테 피해를 줄까 봐 전전긍긍하는 성격을 갖게 된 것과 남자 친구가 그 반대의 성격을 갖게 된 데는 여성에게 조신하고 꼼꼼한 성격을, 남성에게 호방한 성격을 강요하는 사회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저는 제가 동거를 선택한 만큼 계속 노력하고 싶어요. 혼자 살 때보다 함께 사는 게 더 좋거든요. 다만 저처럼 남녀가 모든 것을 동등하게 나누는 관계를 꿈꾼다면 책임져야 할 일을 너무 많이 만들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또 웬만한 남자에 비해 꿇리지 않을 정도의 경제력은 갖추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럼에도 연애하는 이유

혹자는 그렇게 한남이 싫으면 ‘한남 같지 않은’ 남자를 골라 연애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많은 여성이 자조적으로 답한다. 여성 혐오 이슈에 대해 공감하는 남자를 만나면 썸 타는 게 아니라 동지애가 생긴다고 말이다. 설렘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분노가 대신하고, 그러다 보니 상대에 대해 이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 애초에 “한남이 아닌 남자를 만나라” 혹은 “외국인을 만나라”라는 건 미봉책일 뿐이다.  좋아하는 감정은 잘 모르는 사람을 더 알고 싶고 궁금해하는 과정에서 시작되며, 관계라는 건 서로의 세계관 속에서 함께 헤매며 끊임없이 부딪히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타협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한다는 건 내 세계를 상대방과 나누는 일이고, 그 과정을 우리는 연애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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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김예린
  • Design 조예슬
  • Photo by 다음 영화(영화 스틸 컷) / GettyImagesBank(나머지)
  • 기사등록 온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