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어느 동네 사세요

한 동네에 오래 사는 것이 사치가 된 서울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는 동네의 의미까지 퇴색된 건 아니다. 생활 반경이 훨씬 줄어든 요즘 같은 때는 더더욱. 서울 거주 N년 차인 4명에게 오래 봐야 보이는 동네 풍경을 물었다.

BYCOSMOPOLITAN2020.11.23
 
 

망원동과 연남동 사이, 성산동

표기식(포토그래퍼), 성산동 거주 11년 차
이곳에 살게 된 이유 홍대 앞에서 오래 살았고 작업도 주로 그 근처에서 했는데, 2009년쯤 점점 어수선해지는 분위기가 싫어 이사할 동네를 알아봤다. 홍대의 힙 플레이스 특수를 어느 정도 누릴 수는 있으면서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 결정했다. 그동안 바로 옆 동네인 망원동이나 연남동 모두 ‘핫플’로 성장해 유동 인구가 많아졌으니 사람 북적이는 곳을 싫어하는 내겐 신의 한 수였다.
자주 다니는 산책 루트 짧게는 홍제천을 따라 걷거나 경성고등학교 주변 골목을 돈다. 길게는 홍제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나가기도 하는데, 멀리 갈 땐 난지지구를 지나 가양대교나 행주산성, 파주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보통은 휴대폰만 들고 음악을 들으면서 걷지만, 종종 작은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나간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구경한다. 주택마다 봄에는 개나리와 목련, 장미가 차례로 피었다가 지고, 요즘처럼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날씨에는 가로수들이 색을 입는다. 
가장 좋아하는 풍경 한여름 저녁 직전의 홍제천. 해가 비스듬히 넘어가면서 늘어지는 그림자와 반짝이는 물결을 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에는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 여름에는 장마로 물이 불어나다 보니 가까이서 보면 흙탕물인 경우가 많은 반면 겨울에는 물이 깨끗하다. 사람도 적어 촬영하기 편하고.
자주 가는 공간 88파운드라는 파운드케이크 전문점. 처음 성산동에 살기 시작할 무렵 작업실 공간으로 알아봤다가 월세가 비싸 포기했던 자리에 최근 문을 열었다. 또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지만 테일러커피는 종종 다녔는데, 요즘은 거기서 알게 된 바리스타가 독립해 차린 망원동 비전스트롤이라는 카페에 가기도 한다. TMI지만 성산동 리치몬드 본점에서 운영하는 오전 빵 뷔페에 갔다가 그 바리스타 부부를 우연히 마주쳤다. 그러고 보면 서울 참 좁다. 같은 동네 산다는 게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내 동네를 다시 보게 된 순간 처음 이사 와서 몇 년간은 성산에 올라 토끼도 찍고 골목도 찍었지만, 요즘은 스튜디오 작업량이 많아 집 근처에 상주하는 시간이 줄었다. 그렇게 동네에 대한 느낌이 휘발됐다고 생각할 무렵 오래 미뤄뒀던 플라타너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플라타너스가 껍질을 벗는 면들이 회화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구에 살던 어린 시절, 8살에 126번 버스를 타고 통학하면서 내 생애 제일 먼저 알게 된 나무의 이름이 플라타너스였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무에 흠집을 내서 낙서하곤 했는데, 몇 년이 지나니 낙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성산동 내 집 앞에도 열 발자국만 걸으면 플라타너스가 즐비하다. 존재감 없던 나무들을 바짝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성수동이 자라는 동안

김선아(건축가), 성수동 거주 26년차
이곳에 살게 된 이유 5살 때 부모님을 따라 자양동으로 이사 온 이후 줄곧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초·중·고를 비롯해 대학교도 근처에서 나왔고, 첫 직장도 성수동 그리고 지금 작업실도 성수동에 있으니 이 동네와 인연이 참 깊다. 
자주 다니는 산책 루트 점심 식사 후 서울숲을 한 바퀴 걷는다. 한강도 자주 가곤 하지만, 서울숲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한강은 직선의 도로를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서울숲은 숲을 한 바퀴 동그랗게 도는 느낌. 그래서인지 풍경도 훨씬 다양한 것 같다.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 서울숲의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숲과 그 건너편으로 보이는 스카이라인. 서울숲 근처로 높은 건물이 많이 들어서는데, 숲도 함께 울창해지고 있어 근래에는 뉴욕 센트럴파크와 꽤 비슷해졌다. 서울숲에 가면 많은 사람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멀리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서울숲을 즐기는데, 그 모습이 하나하나 다 좋아 보인다. 
자주 가는 공간 자그마치부터 오르에르, WxDxH 그리고 최근에는 오드투스윗까지, 김재원 대표가 운영하는 공간은 참 매력적이다. 따스한 감성이 묻어나지만 아기자기하지는 않고, 오래된 가구가 주로 놓여 있지만 앤티크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편집숍이자 문구점인 WxDxH와 포인트오브뷰는 그 주변을 지나칠 때마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 번씩 들른다. 물건마다 놓인 섬세한 큐레이션 메모를 읽다 보면 이건 내게 꼭 필요한 거라고, 이걸 사면 오래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는 동안 가장 크게 바뀐 것 동네에 대한 인식. 사람 생각이 이렇게 빨리 바뀌나 싶다. 공장이 밀집해 있는 성수동은 밤엔 인적이 드물어 우범 지역처럼 여겨졌다. 막차를 타고 성수역에 내리면 택시를 잡기까지 무섭고 떨렸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성수동은 ‘서울의 브루클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잡지에도 자주 소개되고, 친구들이 내게 성수동 ‘핫플’을 묻는다. 내가 사는 동네가 서울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 됐다는 게 신기하다. 다만 신축 서울숲 아파트가 서울에서 손꼽히게 비싸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부동산이 들썩거릴 정도니, 아파트가 다 지어지고 나면 동네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르겠다.
 
 
 

북촌 방향으로

한량(작가), 북촌 거주 8년 차 
가장 좋아하는 풍경 북촌에선 방위를 따지기가 참 쉽다. 광화문은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북악산은 경복궁과 청와대의 북쪽을 지키고 섰다. 그렇다면 서쪽은? 너른 바위가 치마폭처럼 펼쳐진 인왕산을 찾아본다. 해가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별들이 흐린 빛을 발할 때의 풍경. 인왕산 둘레길의 가로등이 점점이 켜질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시대를 막론한 아름다움, 국립현대미술관의 잔디 마당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속 인왕산을 볼 수 있는 스폿이 표시돼 있다. 해 질 녘 그곳에 서서 정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원경을 사랑한다. 
자주 가는 공간 부영도가니탕은 삼청공원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에 있는 작은 가게다. 간판의 ‘30년 전통’이란 글씨도 이미 낡은 지 오래. 그만큼 유서 깊은 가게다. 메뉴는 곰탕, 도가니탕, 수육 3가지로 사장님인 할머니께서 새벽부터 부지런히 고기를 썬다. 고기 국물은 담백하고 깍두기는 신선한 맛이다. 동네커피는 창덕궁 담벼락길에서 10년이 넘도록 한자리를 지키는 카페다. 커다란 창 너머로는 궁궐의 나무들과 작은 놀이터, 동네 꼬마들이 세워놓은 킥보드를 마주할 수 있다. 직접 굽는 스콘과 제철 재료로 만드는 라테의 조합이 좋다. 마지막으로 삼청공원. 옛날부터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세심하게 잘 가꾼 공원을 걷다 보면 계절의 흐름이 절로 느껴진다. 와룡공원과 말바위 전망대로 이어지는 등산 코스도 있어 보다 긴 호흡의 트레킹도 가능하다.
멀리 사는 친구가 놀러 온다면 데려가고 싶은 곳 따뜻한 커피 한 잔씩 들고 현대원서공원에 가고 싶다. 야트막한 언덕, 걷기 좋은 길에 작은 벤치가 점점이 놓여 있다. 이곳에 오르면 율곡로의 소음도 멀어진 느낌이다. 자박자박 낙엽을 밟으며 돌계단을 올라 창덕궁 돈화문과 궁궐 안 전각을 바라보는 거다. 친구와 함께 오래된 건축물의 뺨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는 동안 가장 크게 바뀐 것 예전에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경복궁 인근 도로에 전국에서 당도한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평일에도 좁은 골목엔 이국의 언어가 넘실거렸다. 주말 아침 눈 비비며 빵을 사러 가는 길에 여기저기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몸 둘 바를 몰라 난감해하곤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 이후 모든 풍경이 조용해졌다. 한산해진 골목은 한편으론 반갑지만 가게를 운영하는 분들은 많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동네에 대한 편견과 진실 “북촌은 다 한옥 아닌가요?”, “다 관광지 아닌가요?” 하는 이들을 자주 접한다. 실제로 북촌의 한옥은 신식 건물로 바꿀 수 없으며, 한옥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보수해야 한다. 이 동네의 정경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북촌에서 삶을 꾸려가는 이들이 많다. 팬시한 레스토랑과 줄을 서는 카페 사이에 작은 세탁소와 미용실이 있다. 백 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엔 만국기가 펄럭인다. 당근과 양파, 배추와 사과를 실은 트럭이 골목을 누비면 어디선가 강아지가 컹컹 짖는다. 이곳에 마음을 두고 정 붙이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성북동 빵집 투어의 진짜 묘미

김수아(편집 디자이너), 혜화동 거주 20년 차 
자주 다니는 산책 루트 말 그대로 동네 한 바퀴를 돈다. 대략 3km의 거리를 슬리퍼 끌고 어슬렁거리는 모양에 가깝다. 혜화동인 집에서 나와 서울과학고등학교, 경신고등학교를 지나서 유명한 돈가스집과 성곽길을 지나 꺾으면 최순우옛집, 간송미술관, 자수박물관과 국숫집, 빵집이 줄줄이 있어 심심하지 않다. 언덕과 평지가 적절히 섞여 있어 운동 삼아 걷기에도 좋다. 여유가 있을 땐 크게 한 바퀴 돌기보다 골목골목 돌아다니곤 한다.
가장 좋아하는 풍경 하나는 서울성북초등학교나 홍익대학교 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해 질 녘 풍경. 근처에 사는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종종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데, 주말 늦은 오후 사람 없는 운동장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성북동 일대의 풍경이 좋다. 다른 하나는 단골 카페 테라스. 말이 테라스지 실상은 ‘처마 아래’에 가깝지만,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평일 동네 산책을 자주 하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다. 거기 앉아 있으면 학교에 못 가서 심심한 아이들(조카들 포함),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온 노인들,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을 볼 수 있다. 코로나19 특수로 생긴 친근하고 다정한 풍경이다.
자주 가는 공간 요즘 성북동 빵집 투어에 빠져 있다. 성북동 초입의 베이커리 밀곳간은 최근 다녀본 곳 중 베스트. 강남의 유명 베이커리 못지않은데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 하루 세 번 굽는 시오빵이 내 최애다. 갓 구운 시오빵을 들고 산책 코스 두 번째 스폿으로 향한다. 온갖 동네 주민이 모이는 이곳은 성북동콩집. 2개뿐인 야외 좌석 쟁탈전이 치열하다. 
사람이 가장 붐비는 곳 한성대 앞 스타벅스, 나폴레옹과자점. 전체적으로 성북동에 관광 코스가 많아지고 카페와 맛집이 들어서 주말이면 골목마다 사람들이 복닥거린다. 
멀리 사는 친구가 놀러 온다면 데려가고 싶은 곳 그동안 줄곧 가고 싶었는데 예약이 어려워 번번이 실패했던 한국가구박물관. 내가 좋아하는 목가구도 구경하고 평소 산책 코스를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박물관을 둘러본 뒤에는 계열사 성북동점에 데려갈 생각. 계열사는 맛있기로 입소문 난 부암동 치킨집으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곳인데, 몇 달 전 내 산책 코스에 지점을 오픈했다.
절대로 바뀌지 말았으면 하는 것 관광 코스가 많아지니 인도도 넓어지고 유동 인구가 늘어나 분위기도 활달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임대료도 큰 폭으로 껑충 뛰었다. 빈 상가가 눈에 보이게 늘어나는 중인데, 부디 경리단길이나 익선동 같은 케이스는 되지 않기를 빌고 있다. 대규모 아파트 재개발도 추진과 무산을 반복하고 있다던데…. 
내 동네에 대한 편견과 진실 성곽길이나 박물관을 순례하러 관광 오는 사람들은 성북동을 고즈넉하고 낭만적인 곳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오래된 동네라 분위기가 점잖은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주차 공간이나 골목이 정비되지 않아 사는 데는 불편함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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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김예린
  • Design 조예슬
  • Photo by 각 인터뷰이(성산동/성수동/북촌) / 김예린(성북동)
  • 기사등록 온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