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욕 감퇴? 감정 기복? 불임 유발? 피임약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한때 여성해방의 아이콘이었던 피임약은 언제부터 부작용의 아이콘이 된걸까? 피임약을 둘러싼 여성들의 인식 현주소와 그 뒤에 숨은 정치적 의도까지. 피임약에 대해 몰랐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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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변화는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이별로 인해 참담했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고, 어느 날 문득 내가 다시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처럼. 나는 피임약을 다시 복용했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다. 2022년 2월 나는 ‘데소게스트렐’이라는 프로게스테론 단일 피임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늘 당연하게 여겼던 월경 전 스트레스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가슴 통증, 극심한 불안감, 과도한 흥분 상태 등 PMS(월경 전 증후군)가 현저히 줄어든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줄까 두려워 수년간 피했던 피임약이 정신 건강 개선에 놀라운 효과를 준 것이다. 그동안 나는 왜 피임약이 당연히 몸에 해로울 것이라 생각했을까? 이 오해는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부작용의 그림자
」‘마이크로지논’은 영국에서 가장 흔한 피임약의 종류이자, 많은 여성이 첫 경험으로 마주하는 약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18살, 처음 그 약을 처방받았을 때 부작용은 끔찍했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인해 10년 넘게 피임약을 끊고, 대신 비호르몬 피임법인 구리 IUD(자궁 내 장치)를 택했다. 그때의 우울감이 사춘기 호르몬 탓인지, 정말로 피임약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안에 자리 잡은 ‘피임약 불신’은 단순히 내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의식 속에서 시대가 만들어낸 광범위한 불신을 흡수한 결과였다. 1950년대, 피임약은 ‘여성해방’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70여 년이 흐른 지금, 비판과 회의론은 절정에 달했다. <BMJ 성·생식 건강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2018년 호르몬 피임제를 사용한 여성은 19%였지만, 2023년엔 11%로 떨어졌다. 심지어 자연주의 피임법(생리 주기를 계산해 임신 가능성이 높은 기간에 성관계를 피하는 방법)을 따르면서도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여성이 늘었다. 피임을 전혀 하지 않는 여성 비율은 2018년 56%에서 2023년 70%로 치솟았다. 2023년 다큐멘터리 <데이비나 맥콜의 피임약 혁명(Davina McCall’s Pill Revolution)>은 성욕 저하부터 정신 건강 악화까지, 피임약이 남긴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조사 대상 4000명 중 77%가 부작용을 겪었고, 36%는 불안과 우울, 기분 저하를 호소했다. 문제는 여전히 부작용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영국 성·생식 건강관리학회 회장인 자넷 바터 박사는 “피임약의 종류는 많지만, 누구에게 어떤 약이 맞는지는 연구가 부족해요. 여성 건강 연구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죠”라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이어 자신에게 맞는 피임약을 찾는 과정에는 시행착오가 따른다고 설명했다. “어떤 여성들은 한 가지 브랜드의 피임약을 복용하다 부정적인 경험을 한 뒤 피임약 자체를 완전히 포기해버리죠.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어요.” MSI 리프로덕티브 초이스(피임 및 안전한 낙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제 NGO) UK의 부의료국장 세라 설켈드는 피임약 복용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다고 설명한다. 일부 피임약은 특정 암의 위험을 줄이고, 생리통이나 과다 출혈을 겪는 여성 또는 자궁내막증·자궁선근증·PMS가 있는 여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험쥐’처럼 맞는 피임약을 찾을 때까지 계속 시도해보는 게 과연 맞는 방법일까?
SNS, 그리고 숨겨진 의도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 ‘#naturalbirthcontrol’을 검색하면 수많은 게시물이 쏟아져 나온다.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이 매일같이 뉴스에 오르내리며, 자연 속에서 푸른 하늘을 보는 시간보다 화면에서 쏟아지는 블루라이트에 더 많이 노출되는 시대에 사람들이 피임약 같은 호르몬 피임제보다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의 피임법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일상 속 필수품을 친환경 제품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말이다. 이렇듯 ‘#naturalbirthcontrol’ 콘텐츠는 언뜻 선한 영향력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영국 애스턴 대학교에서 반(反)낙태 운동을 연구하는 사회학·정책학 선임 강사 팸 로 박사는 “영국의 많은 반낙태 운동가들은 ‘인공적인’ 피임 방법에 반대하는데, 여기에 피임약도 포함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2022년 미국에서 수백만 명의 여성이 합법적인 낙태 권리를 잃은 이후 피임에 대한 반발은 유명인, 웰니스 인플루언서, 우파 성향의 정치인까지 다양한 집단에서 쏟아지고 있다. 인플루언서이자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인 크리스틴 루엘 가프니는 “매력 있고, 행복하며, 건강한 진보 성향 여성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며, 그들이 ‘행복’하고 ‘건강’해지려면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피임약’부터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AXA 헬스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30%의 젊은 성인이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 건강 정보를 얻고 있으며, 48%는 온라인 정보를 바탕으로 자가 진단을 한다고. MSI 리프로덕티브 초이스 UK에서 일하는 루이즈 맥커든은 “게시물이 이념적 의도를 가진 단체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자금을 받는 경우라도, 그게 드러나는 일은 많지 않아요. 우리는 일부 SNS 인플루언서들이 전 세계적인 ‘반권리(anti-rights)’ 운동과 매우 유사한 메시지를 퍼뜨리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 운동이 반대하는 것은 낙태뿐만이 아니라, 피임 전반에 해당하죠”라고 말한다. 피임약을 반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부작용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부각시키는 이들이 모두 여성의 이익을 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피임에 대한 연구 공백을 악용해 두려움을 조장하고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세력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 그러니 피임약이 무조건 안 좋다는 생각은 접어두자. 핵심은 의료 전문가와 상의해 장단점을 따져보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피임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피임약에 관한 오해 바로잡기 O/X
“피임약은 불임을 유발한다?”
영국 성·생식 건강관리학회 회장 자넷 바터 박사는, 피임약 복용이 임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단언한다. “그건 전적으로 잘못된 정보입니다.”
“피임약은 성욕을 떨어뜨린다?”
바터 박사는, 피임약이 일부 사람들의 성욕을 낮출 수는 있지만 약을 바꾸면 정상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성욕에는 다른 요인들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울과 불안, 항우울제 복용, 관계에서의 불만족, 전반적인 성에 대한 불안 등이 그렇죠. 만약 걱정된다면, 의료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좋습니다.”
“피임약은 정신 건강을 악화시킨다?”
바터 박사에 따르면, 이 주제에 관한 연구 결과는 상충되고, 의료계의 합의도 부족하다. 일부 최신 피임약은 정신 건강에 더 좋을 수 있지만, 약 간의 효과를 비교한 연구는 없다는 것. “일부 사람들은 정신 건강이 나빠질 수 있지만, 이 경우 약을 바꾸면 확실히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정신 건강에는 피임약 외에도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녀는 특히 PMS가 있는 여성들의 경우 피임약 복용이 오히려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Writer 마야 오펜하임(코스모폴리탄 UK 에디터)
Credit
- Editor 김미나
- Writer 마야 오펜하임(코스모폴리탄 Uk 에디터)
- Photo By 곽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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