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힙스터들은 다시 블로그로 모인다

숏츠와 릴스 사이에서 피어난 블로그의 진가

프로필 by 천일홍 2024.08.08
New York_guilty pleasure

New York_guilty pleasure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Y2K 시절의 패션을 입고 향수를 자극하는 사운드의 음악을 듣는 것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2024년. 별안간 ‘텍스트 힙(Text Hip)’이라는 두 단어의 생경한 조합이 Z세대의 신조어로 떠올랐다. 활자를 의미하는 ‘텍스트’와 멋짐을 뜻하는 은어 ‘힙’의 합성어로 책, 독서, 기록과 같은 아날로그 콘텐츠를 힙하다고 여기는 세태가 바로 지금 Z세대의 추구미다. 이런 흐름은 트렌드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SNS에도 드러나는데 그것이 블로그의 역주행을 일으켰다. 2년 전 네이버 블로그가 대대적으로 진행한 ‘주간 일기 챌린지’를 기점으로 Z세대의 유입이 시작되더니 그 수는 조금씩 증가해 올해 새로 개설된 블로그만 126만 개, 블로그 이용자의 약 80%가 20대라는 정점의 수치를 찍었다. 왜 블로그일까? 앞서 말한 텍스트 힙이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SNS에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인증하거나 좋았던 구절을 공유하는 것이 그들에겐 일종의 놀이가 됐는데, 그것을 기록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그릇이 블로그이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강한 도파민을 자극하는 숏츠, 릴스와 같은 콘텐츠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들에게도 블로그는 근사한 도피처가 됐다. 여기에 밴드 라쿠나, 나상현씨밴드, 축구 선수 김주환 등 또래의 핫한 인물들까지 하나둘 블로그로 모여들며 Z세대에게 블로그는 힙한 SNS로 환골탈태를 한 셈이다. 그런데 어쩌면 블로그의 진짜 미덕은 ‘있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속성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요’ 수와 조회 수로 모든 걸 평가받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엔 무작정 멋져 보이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은 밑바닥의 욕망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블로그에선 사진 한 장 올리지 않아도 되고, 그 누구도 ‘좋아요’ 수에 목매지도 않는다. 그저 일상, 내가 좋아하는 것, 여행이나 맛집 기록 등 수많은 주제의 글, 그러니까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온전한 ‘나’의 글들이 블로그에 차오른다. 이것이 블로그가 시대에 잊히지 않은 채, 도파민의 대척점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곽슬비_서점 스태프

꽤 오랜 시간 나의 블로그 이름은 ‘단상집’이었다. 단편적인 생각을 모아두는 곳. 생각이 많은 나에게는 최적의 제목이었고, 이런 간판을 내걸 수 있는 곳은 생각을 길게 늘어놓아도 눈치 보이지 않는 블로그뿐이었다. 이게 내가 오랫동안 꾸준히 블로그를 할 수 있던 이유다. 단상집은 대부분 일상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일기지만 월마다 올려서 ‘월기’라고 불리는 이 포스팅엔 주로 내게 일어난 사건들, 인상 깊던 대화들, 좋아하는 것들, 보고 듣고 읽은 것에 대한 감상평과 함께 당시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유하자면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억 구슬을 만들어 보관하는 행위와 같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기억 구슬 보관소를 현실에서 운영하는 건 나의 삶을 추적하는 데 아주 용이하게 쓰인다. 가장 편리한 건 검색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기능은 대개 영화나 책에 대한 감상평을 다시 꺼내야 할 때 혹은 과거의 생각을 곱씹을 때 주로 쓴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는 것이 참맛이라지만, 나는 이 검색 기능을 잃을 수 없어 모든 걸 블로그에 기록한다. 미래의 나를 위해 더 세세하게. 물론 블로그를 사랑하는 이유가 검색 기능 때문만은 아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할 기억 구슬을 빚을 땐 생각과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다른 SNS와 달리 블로그에서는 내 생각을 과감히 표현하고 여러 감정을 앞다투어 쏟아내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과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기록하며 위로받기도 한다.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기록을 보관하는 공간. 솔직한 생각과 감정이 형형색색의 구슬에 담겨 빛나는 곳, 그곳이 곧 나의 단상집이자 우리의 블로그가 아닐까?― 블로그 ‘단상집’ 운영

완_변호사

어렸을 때부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벽돌처럼 무거운 아빠의 DSLR을 몰래 들고 다니며 내 첫 카메라를 꿈꿨다. 처음 사게 된 니콘의 카메라를 들고 첫 뉴욕 여행에 나섰다. 타임스스퀘어, 길가의 노란 택시들, 마그놀리아 베이커리까지 신나게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메모리 카드를 잃어버렸다. 사진이 통째로 사라지니 행복했던 기억마저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이 찾아왔다. 그때부터 사진을 백업하고 블로그에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블로그와 함께한 지 10년. 한 달을 정리해보는 먼슬리 일기. 블로그에 시시콜콜하고 좋아하는 순간의 사진을 기록했다. 블로그는 누군가에게 말하기 애매한 고민이나 걱정도 편하게 털어낼 수 있는 일기장이었고, 블로그를 통해 한 해를 정리하는 나만의 연말 정산 리추얼을 만들기도 했다. 일상의 어느 한편에선 24시간 뒤면 사라지는 인스타그램 스토리, DM 창에 친구가 보내준 웃긴 릴스를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도 많고 사진을 찍고 정리하는 걸 즐기는 나는 결국 블로그로 돌아오게 된다. 오래전 뉴욕 여행 포스팅을 보다 잃어버린 메모리 카드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블로그는 어떤 날의 좋았던 기억들과 이젠 희미해진 고민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하나뿐인 공간이다. ―블로그 ‘guilty pleasure’ 운영

박한나_<코스모폴리탄> 피처 어시스턴트

“원래 오타쿠들은 물어보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를 나불거리고는 한다”. 내게 블로그는 일종의 대나무숲이었다. 평소에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타쿠 스피치’를 자주 선보이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얘기하다 보면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킨 말들을 블로그에 쏟아냈다. 현실과 달리 말도 사진도 다다익선인 곳이라 오타쿠 스피치가 길면 길어질수록 방문자 수와 반응은 폭발했다. 느낀 점을 길게 주절거린 포스팅 하나로 한 달에 20만원 정도를 벌기도 했다(블로그 포스팅을 꾸준히 하면 ‘애드포스트’ 자격을 얻어 광고비를 벌 수 있다). 텍스트보단 비주얼이, 긴 호흡의 서사보다 강렬한 카피 한 줄이 더 중요한 시대 같아 보여도 여전히 누군가의 나불거림을 찾고 들어주는 플랫폼이 있다는 게 안심되고 좋다. 툭하면 벅차올라 빼곡한 문단을 이어가며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맘껏 얘기해도, 유별나다는 시선 대신 서로 사랑스럽게 여기는 이웃들의 존재 또한 블로그를 계속 찾게 되는 이유다. ―블로그 ‘낭만주의자’ 운영

장경민_라쿠나 멤버

무언가를 생각할 때 글로 써보지 않으면 중요한 걸 빠뜨린 기분이 든다. 활자라는 건 언어를 차곡차곡 모아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때 포착한 것들을 스스로 알아차리며 내 생각에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말보다 글로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건 그런 이유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번거로울지라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의 원본 그대로를 담을 수 있는 건 내게는 글이니까. 나의 블로그엔 특별하진 않지만 ‘나’에 가장 가까운 일기들이, 음악 작업을 하며 떠오른 사사로운 생각이 올라온다. 작업물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모양새는 되도록 지양하고 싶지만, 음악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전하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매번 이야기가 새로 쓰여지는 책 같다. 포스트마다 주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엔 이 이야기를 한데 모아주는 구심이 블로그에 존재한다. 하나씩 글을 올리고 나면 물리적으로 더 깊어진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 느낌이 왠지 좋다. 그래서일까? 내게 블로그는 단순한 플랫폼이라기보단 실제적인 공간처럼 느껴진다. 쾌락은 느릴수록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블로그를 통해 나눌 수 있는 콘텐츠야말로 느리고 건강한 즐거움이 아닐까? 쉴 새 없이 범람했다가 금세 휩쓸려 지나가는 콘텐츠는 그 자리에서 끝나고 말지만,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블로그 속 이야기는 나무처럼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블로그 ‘Happily Ever After’ 운영

Credit

  • Editor 천일홍
  • Art designer 진남혁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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