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비와 핑크의 귀환이 왜 이렇게 애틋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아주 어릴 때부터 핑크색 옷이나 신발이 아니면 외출을 거부할 만큼 우리의 핑크 사랑은 뜨거웠는데. 당시 모두의 ‘최애’였던 핑크 컬러는 언젠가부터 마음 놓고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가 돼 있었다. 핑크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아도 됐던 마지막 시기는 2000년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바비처럼 글램한 몸과 외모를 뽐내는 팝스타의 모습을 모두가 선망했다. 빅토리아 시크릿 쇼를 기억하나? 아드리아나 리마, 지젤 번천, 타이라 뱅크스… 달콤한 캔디 컬러 란제리를 입은 ‘앤젤’들이 있는 대로 치장하고 등장하던 란제리 쇼가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그러나 예쁜 외모만을 뽐내는 단순한 화법은 곧 외모 지상주의, 성 역할 고착화 등 이면의 문제에 직면하며 서서히 외면당했다. 영화 〈금발이 너무해〉에서 ‘엘 우즈’의 전형적인 ‘바비 룩’, 빛나는 금발과 핑크색 옷차림은 백치미를 나타내는 직관적 표현으로 인용됐다. 언제나 핑크빛 바비 걸 바이브를 뿜는 패리스 힐튼을 두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철없는 상속녀’라며 조롱했던가! 사실 바비는 당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염원하며 탄생됐다. 1959년 세상에 바비를 선보인 루스 핸들러는 어린 소녀들이 다양한 전문직을 접하며 미래를 꿈꾸길 바라는 마음을 인형에 담았다. 1960년대 초 패션 에디터, 간호사, 스튜어디스부터 1965년 우주 비행사, 1985년 CEO, 1992년 대선 출마한 바비 등 60년에 걸쳐 200여 개 직업을 선보였다는 사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바비에 대한 오해가 깊은 걸까? 무엇보다 바비의 금발, 파란 눈, 과장된 보디라인 탓이다. 인기를 얻을수록 ‘백인 여성의 성 상품화’라는 비난과 함께 외모 지상주의의 상징이 된 것. 무려 50여 년 전이지만, 미처 성숙하지 못한 성 역할 의식이 드러나기도 했다. 쇼핑과 치장에만 집중된 바비의 일상 스토리텔링, 1992년 말하는 인형 ‘틴 토크 바비’가 했던 “수학은 어려워”라는 말처럼.
땡큐, 제레미
2010년대 초, 성 역할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움직임과 함께 핑크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 쏟아지던 열기가 식어간 것도 그즈음이었다. 보여주기 위한 불편한 속옷, 현실감 없는 선망을 종용한다는 거부감. 졸지에 구시대의 상징이 된 바비와 핑크는 은둔의 시기를 보냈다. 2015 S/S 시즌, 제레미 스캇이 모스키노 런웨이에 핑크 바비들을 불러내기 전까지는! 그는 바비를 어느 상황에서나 패셔너블한 “디자이너의 완벽한 뮤즈”라며 애정을 표했다. 직전 시즌에도 맥도날드 같은 팝 문화로 키치하고 사랑스러운 것, 유쾌한 패션에 대한 애정을 폭발시킨 제레미 스캇이 바비라는 전대미문의 패셔니스타가 마음에 안 들 리 없지! 2015년 11월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스키노로 치장한 ‘모스키노 바비’ 인형도 출시했다. 모스키노 바비 광고에는 바비 역사상 최초로 남자아이가 등장하기도! 제레미 스캇의 유쾌한 정면 돌파 덕에 핑크 바비 룩은 양지로 다시 떠올랐다. 2019년 멧 갈라에 참석한 헤일리 비버를 보라. 세상 모던한 룩만 즐기던 그가 리본까지 묶은 ‘리얼 바비’ 룩으로 등장했다.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는 제레미 스캇의 핫 핑크 드레스로 터프한 버전의 바비 룩을 연출했다. 그리고 올해, 바비와 핑크가 다시 한번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바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Y2K와 하이틴 룩에 이어 도래한 ‘핑크핑크’한 바비 코어 트렌드. 블루마린, 마린 세르 같은 힙한 브랜드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특유의 글램한 매력을 살린 베르사체, 심지어는 발렌티노와 디올 같은 우아한 하우스마저 동참했다. 베이비 핑크부터 쇼킹 핑크, 실크부터 라텍스에 이르기까지 핑크의 질주는 이미 시작됐다. 바비 룩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이유가 뭐냐고? 마고 로비는 인터뷰에서 바비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간단히 설명했다. “바비는 짧은 치마를 입을 수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 바비의 엉덩이를 보길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짧은 치마를 입고 싶고 그게 재미있고 핑크색을 좋아하기 때문일 뿐이죠.” 시대에 발맞추고자 고군분투한 바비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타이니 숄더, 바비 인형을 다시 보다〉에서도 고정관념을 벗겨낸 바비에 대해 언급한다. “바비 자체에는 별다른 힘이 없어요. 바비를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건 우리가 바비에게 쏟아내는 감정과 이야기예요.” 그러니 핑크와 바비를 어떻게 즐길지는 이제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 바비 코어를 리얼웨이에서 즐기는 방법은 2가지다. 바비 특유의 레트로 코드를 중요시한다면 2000년대 핑크 뮤즈를 참고하라. 그 대명사는 단연 패리스 힐튼. 20~40대까지 핑크 바비로 지내온 장본인으로, 그의 핑크 연대기는 한 권의 책으로 엮어야 할 정도다. 주변 소음에 개의치 않고 바비로 살고자 하는 그의 ‘중꺾마’적 애티튜드는 이미 어떤 경지에 이른 듯. 사랑스러움의 표상으로는 머라이어 캐리도 빼놓을 수 없다. SNS에서 알려진 ‘패대기 시구’ 장면을 기억하나? 시구는 실패했어도 흔들림 없는 미소와 여유 탓에 도무지 미워할 수 없다. 당시 착용한 무테 선글라스는 지금 다시 써도 손색없는 수준! 트렌디하고 쿨하게 핑크를 입는 법은 두아 리파가 잘 알고 있다. 지난 투어 중 핫 핑크 란제리를 입고 무대에 올랐는데, 파워풀한 에너지와 건강미 때문에 란제리라는 부담감을 느낄 새가 없었다. 레드 카펫에서도 미래적인 메탈릭 핑크부터 고전적인 핫 핑크 드레스까지 자유자재. 사복에도 쨍한 핫 핑크 아이템을 즐겨 착용한다. 풍성한 퍼 모자, 크롭트 니트 톱 같은 아이템을 대범하게 매치하는 편. 그뿐인가? 이제 옷 좀 입는다는 남자들도 핑크를 입는 데 거침이 없다. JW 앤더슨, 로에베 같은 컬렉션엔 이미 핑크 보이들이 수시로 등장했으니! 여전히 핑크 컬러가 부담스럽다면,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묵은 오해를 걷어내보길. 영화 〈바비〉가 오랜 고정관념을 밀어내고 요즘 여자들의 마음에 닿은 것처럼 천진하고 주체적인, 어디서나 존재감을 잃지 않는 핑크의 진짜 매력을 발견하게 될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