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6년생이다. 윤정희가 남정임, 문희와 여배우 트로이카로 활동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내 기억에 없다. 그의 마지막 상업적 흥행작인 영화 〈위기의 여자〉가 개봉한 1987년, 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나에게 윤정희라는 이름은 과거의 영광이었다. 현재의 영예도, 미래의 영화도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이 66세의 윤정희를 〈시〉에 끌어들였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윤정희가 언제 적 윤정희니. 결혼하고 은퇴하더니 뭐하려고 또 영화에 나와.
그건 비판이 아니었다.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세대가 능히 내뱉을 수 있는 일종의 염려였을 것이다. 〈시〉를 시사회에서 처음 보고 나오며 생각했다. 이창동. 이 무서운 사람. 20년간 은막을 떠난 배우를 카메라 앞으로 불러들여 기가 막히게 써먹었구나. 그건 비난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었다. 배우는 써먹히는 것이다. 윤정희는 멋지게 써먹히기를 선택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택했다. 나는 그보다 더 용감무쌍한 커리어 선택을 본 적이 없다.
김도훈(영화 평론가)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당연히) 현미의 전성기를 직접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현미는 화려한 외모와 구수한 입담을 가진, 그리고 이봉조와의 눈물겨운 로맨스를 종종 토크쇼에서 들려주곤 했던 원로 가수였다. 과거의 기록이나 음악을 찾아봐도 현미는 그 유명세에 비해 그다지 많은 히트곡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솔직히 동시대 가수 패티김이나 이미자와의 비교는 무리가 있고, 후배인 정훈희나 혜은이와 비교해도 임팩트는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히트곡 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법이다. 시원치 않은 녹음 퀄리티지만 ‘밤안개’ 속 현미의 목소리는 당대 한국 가수들에게 좀처럼 듣기 힘든 엄청난 파워와 소울을 담고 있었다. 서구적인 벨팅이 매력적인 그의 목소리는 아마도 오리지널 가요 레퍼토리보다는 미8군 라이브 무대에서 커버한 팝송들에서 그 매력을 더 잘 보여줬으리라. 그는 평생 이봉조의 곡만을 불렀지만, 단순히 가수였던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곡을 구상하고 편곡하기도 했던, 진정한 뮤즈이자 음악 파트너였다. 이 점은 꼭 기억됐으면 좋겠다.
김영대(음악 평론가) 아마드 자말이 시카고에 문을 연 ‘알함브라’라는 클럽이 있다. 이곳에서 그는 재즈를 연주했고 주방에선 이슬람과 미국 식문화를 아우르는 요리가 손님을 맞았다. 음악을 사랑했고 이슬람교 안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았던 그에게 그곳은 천국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곳에 지금은 가볼 수 없다. 1961년 2월 개관한 뒤 1년도 안 돼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비흡연자이자 비음주자였던 그는 알코올이 약간이라도 들어간 음료는 팔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그 방식만이 이 클럽을 성공시킬 것이라고 믿었다는데, 폐관 소식을 전한 매체들은 그 고집스러운 신념이 대중의 욕망에 부합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아마드 자말은 그런 음악가였다. 외부의 소음보단 자기 안에서 샘솟는 마음에 집중했던 명상가. 화려한 기교가 주목받던 비밥의 시대, 음악 속에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선구자. 재즈 역사를 혁신했던 마일스 데이비스조차 깊이 존경했던 재즈의 마스터. 지금 나는 알함브라에서 녹음된 라이브 음반 〈Ahmad Jamal’s Alhambra〉(1961)를 들으며 그를 그리워한다.
김민주(시나리오 작가, 〈재즈의 계절〉 저자) 지난해 12월 말 부산으로 가던 날 아침,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부고를 읽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오래도록 났는데, 그건 나의 어떤 한 시절 자체를 통째로 유실한 기분 때문이었을까? 떠나는 기차 안에서 눈물을 후두둑 흘려가며 그간 너무나도 당연했던 그녀의 업적들을 하나하나 복기하기 시작했다. 말콤 맥라렌과 섹스 피스톨즈와의 1970년대, 펑크를 하이패션으로 변주해 아방가르드로 정의한 1980년대, 내가 동시대로 경험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모든 것. 정의와 항쟁 그 어딘가에 서서 늘 자유롭던 그녀를 성의껏 추억했다. 옷과 패션을 초월해 문화 자체를 통으로 ‘덕질’하게 만든 내 인생 차원의 아이콘! 당신은 입는 것과 듣는 것, 생각하고 뱉는 것 모두가 유기적이라는 걸 알게 해줬어요. 덕분에 행복한 20대를 보냈습니다. 즐거웠어요, 비비안! Forever a Queen of Punk!
김소정(스타일리스트, 크리에이터) 무엇을 만들지 의식하지 않고, 그저 ‘소리’를 뒤집어썼다.
올해 1월 말 발매된 류이치 사카모토의 신보 〈12〉 앨범 재킷을 넘겨보다가 그곳에 적힌 한 문장을 한참 곱씹었다. ‘소리(音)’라는 단어만큼 그와 잘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는 그가 〈Async〉 앨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소리를 채집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낙엽 밟는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숲길을 힘주어 걷고, 빗물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집 안에서 온갖 기구를 꺼내더니 급기야 직접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비를 맞으며 한참 동안 서 있는다. 그렇게 채집한 소리를 모아뒀다가 곡을 지으며 제자리를 찾아주는데, 그것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는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천진한 미소는 꼭 직접 본 것처럼 눈에 선하다. ‘거장 음악가의 암 투병 생활 중 빚어낸 소리 일기’라는 소개가 붙은 그의 신보를 틀면 역시나 수많은 소리가 쏟아진다. 어느 주말 아침, 흘러나오는 곡에 귀 기울이며 잠시 눈을 감아보았는데 순간적으로 눈물이 흘렀다. 생의 마지막에 다다랐음을 직감하고 많은 것을 비워낸 이가 골라낸 세상의 소리에서 어떤 그리움과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그의 마지막 공식 발언은 메이지 진구 야구장 재개발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재개발에 반대 의사를 표하며 도쿄시 측에 공식 서한을 보내고, 기력을 끌어모아 언론사 서면 인터뷰에도 응했다. 소중한 것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그가 채집해 내보인 세상의 소리에서 느껴지는 그 애정 어린 온기와 맞닿아 있다.
박혜미(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