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쓱쓱, 밤 긋는 시간

엄유정은 밤하늘에 흔들리는 나뭇잎, 누군가가 말할 때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는 모습 같은 일상의 순간을 2차원 평면에 되살린다. 대단치 않은 그 순간에 인생의 진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하는 듯.

BY강보라2021.12.22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엄유정 개인전 〈밤-긋기〉에서 선보인 〈밤 얼굴〉(2021) 시리즈.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엄유정 개인전 〈밤-긋기〉에서 선보인 〈밤 얼굴〉(2021) 시리즈.

얼마 전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열었던 〈밤-긋기〉는 어두운 색상의 회화로 전시장을 채웠다. 지난봄 소쇼룸에서 연 개인전 〈Feuilles〉로 보여준 작업들이 ‘잎사귀’라는 뜻의 전시 제목처럼 워낙 ‘초록초록’했기에 그 변화가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Feuilles〉는 2019년부터 시작한 식물 작업들을 모아 3년 만에 연 전시였다. 직접 벽에 페인트를 바르고 2주 가까이 배치를 고민하며 정말이지 한 땀 한 땀 준비했다. 다행히 많은 분이 와주셔서 호황 속에 전시를 마쳤는데, 〈밤-긋기〉로 일 년에 두 번 개인전을 열게 된 터라 조금은 리셋하는 마음으로 앞선 전시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었다. 〈밤-긋기〉를 준비할 때가 여름이었는데 너무 더워서 밤에 주로 작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밤의 색들이 자연스럽게 화면 안으로 스며들었고 색을 배제한 상태에서 담백하게 작업을 하게 됐다. 밤의 도시를 걸어 다니며 나무들의 형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는데, 이 전시는 그때 본 밤 풍경과 밤에 그린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결과다.
 
 
지금 작업실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 〈밤-긋기〉에서 선보였던 ‘밤 풍경’ 시리즈인 것 같다. 하늘은 하얗고 나무는 까맣다.
밤하늘은 생각보다 까맣지 않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오히려 부옇게 빛나고 상대적으로 나무의 줄기와 잎사귀들이 새까만 윤곽을 그려낸다. 그 장면들을 묘사해보았다.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엄유정 개인전 〈밤-긋기〉에서 선보인 〈밤 얼굴〉(2021) 시리즈.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엄유정 개인전 〈밤-긋기〉에서 선보인 〈밤 얼굴〉(2021) 시리즈.

식물들은 말이 없는 반면 ‘밤 얼굴’들은 뭐라고 말을 거는 느낌이다.
나는 어떤 대상을 그리기보다 어떤 상태를 그리고 싶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 그림에서 캐릭터나 내러티브는 찾기 힘들다. 그보다는 어떤 인물이 놓여 있는 상태, 그 인물이 느끼고 있는 정서, 그런 정서가 배어나는 몸의 움직임 같은 것들, 손가락을 까딱거린다거나 빈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본다거나 하는, 아주 미묘한 동작들, 그 제스처의 정서를 포착하고 싶은 것 같다. 그래서 구체적인 형상이 자주 생략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카락이나 눈썹이 없기도 하고 성별 또한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많은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전하는 손이 점점 더 커져서 누군가는 복싱하는 사람을 그린 거냐고 묻기도 한다.(웃음)
 
 
〈Feuilles〉 전시에 맞춰 발간한 동명의 도록이 독일 디자인 공모전에서 ‘202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됐다. 이전에도 전시 때마다 도록을 직접 만든 것으로 안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4권의 책을 직접 기획, 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그저 리플릿이나 도록을 좀 더 의미 있는 작품집으로 만들어 잘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제작비를 마련하느라 펀딩도 하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매번 새로운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책 한 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흥미롭고 감사하다. 책은 인쇄로 찍어낸 종이 묶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내 화집을 소장하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언제든 집에서 펼쳐 그림을 만날 수 있는 작은 갤러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전시는 일정이 정해져 있지만 책은 전시가 끝난 후에도 멀리멀리 나아가 뜻밖의 새로운 일, 새로운 연결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엄유정 개인전 〈밤-긋기〉에서 선보인 〈밤 얼굴〉(2021) 시리즈.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엄유정 개인전 〈밤-긋기〉에서 선보인 〈밤 얼굴〉(2021) 시리즈.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drawingwing’일 정도로 당신 작업에서는 ‘드로잉과 페인팅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보통 작가들이 작품 구상을 정리하기 위한 에스키스(밑그림)로 드로잉을 대하는 것과는 좀 다른 태도다.
내 작업에서 드로잉은 모든 것의 시작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완결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드로잉은 선 긋기인데 그것만으로도 회화는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드로잉이 자아내는 즉흥성이라든가 자연스러움 같은 미덕을 페인팅에서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도록 재료의 특성을 고려해 이런저런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일상의 풍경을 관찰하고 회화로 옮겨낸다.” 당신을 소개하는 글에서 이런 표현을 여러 번 발견했다. 일상을 회화로 옮기는 것의 의의는 무엇일까?
사실 모두의 삶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되니까. 나는 뭘 그릴지 미리 계획하기보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순간들을 관찰하고 그리는 과정을 축적해나가면서 내가 무엇을 찾고자 했는지 거꾸로 돌이켜보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어떤 작가들은 주제나 개념을 잘 만들어둔 상태에서 작업한다고도 하던데 그런 방식은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나가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 해야 할 일들을 정신없이 해치우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고 내 삶의 의미 같은 걸 어렴풋이 깨닫는 식으로 살지 않나.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엄유정 개인전 〈밤-긋기〉에서 선보인 〈밤 얼굴〉(2021) 시리즈.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10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엄유정 개인전 〈밤-긋기〉에서 선보인 〈밤 얼굴〉(2021) 시리즈.

영상 작품도 좋아하고 NFT 아트도 접하고 있지만 여전히 평면 회화가 주는 즐거움이 가장 크다. 그리는 자로서, 또 보는 자로서 페인팅이 독보적인 매체라고 생각하는 이유, 이 시대에도 여전히 회화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짧게나마 영상 같은 다른 매체들을 경험하면서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회화라는 걸 깨달았다. 이번 〈밤-긋기〉 전시 때도 자주 전시장에 머물렀는데, 그 자그마한 공간에 그림을 보러 오시는 분들을 보면서 가상의 세계가 발달할수록 우리는 실재하는 무언가를 직접 만나는 경험에서 얻는 촉각적 감각을 더 갈구하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때야말로 회화가 주는 힘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또 그런 것들을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다.
 
 
연남동 작업실에서 엄유정 작가.

연남동 작업실에서 엄유정 작가.

2014년 문래동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413에서 했던 개인전 〈Take it easy, you can find it〉의 타이틀은 마치 자기 자신, 그리고 동료 작가들에게 들려주는 잠언 같았다.
2013년 아이슬란드 북부의 한 도시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하게 됐다. 그때 작업의 답을 구하지 못해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한 디렉터가 지나가며 말했다. “Take it easy, you can find it.” 어쩌면 그는 가볍게 건넨 말일 수 있었겠지만 굉장히 힘이 돼서 일기장에 적어놓았고,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그걸 발견하고 전시 타이틀로 사용하게 됐다. 작가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다니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누군가의 좋은 작업을 보고 그 자체에서 힘을 얻기도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힘을 주는 것을 만들 수 있다면 기쁠 것 같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9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식물예찬〉 전시 전경. 엄유정 작가의 식물 드로잉이 걸려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9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식물예찬〉 전시 전경. 엄유정 작가의 식물 드로잉이 걸려 있다.

그런 작가가 있다면 누구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하는 작가들도 쉼 없이 바뀌어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변하지 않는 취향은 주로 페인터들의 작업이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어떤 작업을 보아도 늘 좋다고 생각되는 건 조르조 모란디. 모란디의 담백하고 아름다운 색과 선과 면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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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freelancer editor 안동선
  • editor 강보라
  • photo by 신채영(작업실 사진)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