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해라, 브라이덜 샤워!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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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해라, 브라이덜 샤워!

올해 대략 5천 번의 결혼식과 5백 번의 브라이덜 샤워를 거쳐, 통장 잔고를 보며 5천만 번 정도의 속쓰림을 ‘존버’한 뒤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생겼다.

김예린 BY 김예린 2021.12.12
결혼식이 대세다.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 주변만큼은 그런 모양이다. 코로나19로 미뤘던 식을 더는 미룰 수 없다며 청첩장을 돌리는 커플이 여기저기서 속출하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입을 모아 “비혼이 대세”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또 나만 진심이었지. 근 몇 달 동안 남의 결혼식으로 도배된 캘린더를 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적게는 한 달에 한 번, 많게는  세 번 축의금에 저당 잡힌 월급 통장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물론 십수년을 동고동락한 친구가 평생 함께할 사람을 만났다는데 진심으로 축하해주고는 싶다. 문제는 결혼식 전에 친구로서 챙겨야 할 의례가 하나 더 늘었다는 거다. 골프에 비유하자면, 18홀이 ‘결혼식’이라고 쳤을 때 대부분이 쿨하게 홀인원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선수들이 합심이라도 한 듯 오버파를 날리기 시작했다. 대략 4홀이 양가 상견례, 10홀이 예물 및 예단 준비, 15홀이 예견된 프러포즈였다면, 17홀쯤에 커다란 싱크홀이 뚫린 것이다.이름하여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
 

원하고 또 원망하는 누군가의 브라이덜 샤워

어느 날 대학 동기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한 친구가 “원래 브라이덜 샤워에 이렇게 규칙이 많았나?”라고 운을 뗐다. 청첩장 받으러 나온 자리에서 엉겁결에 브라이덜 샤워까지 하기로 얘기됐는데, ‘친구들끼리 모여 호텔방에서 풍선 좀 불고 밤새 술을 마신다’ 정도로 생각했던 친구의 소박한 그림과 신부의 ‘핑크빛 큰 그림’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 “신부는 핑크색 옷을 입고, 우리는 흰 원피스만 입어야 해. 거기까진 오케이. 그런데 결혼식도 아니면서 케이크까지 준비해달라는 거야. 무슨 케이크가 7만원씩이나 하는지. 장식품도 신부가 다 고르고 우리는 결제만 하고. 축하 파티라기보다 SNS용 허례허식 같아서 현타 왔어.” 그 말을 들은 다른 친구는 “내 친구는 호텔이랑 장식은 다 본인이 알아서 하던데? 친구들은 그냥 참석만 하고”라는 답을 보냈고, 그 사건을 필두로 단톡방에서는 며칠에 걸쳐 브라이덜 샤워를 둘러싼 그간의 심경 토로, 찬반 의견, 커뮤니티 게시글 캡처 등이 난무하는 각축장이 벌어졌다. 실제로 2030 미혼 여성들에게 브라이덜 샤워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다. 29세의 회사원 L씨는 일단 크게 문제의식이 없어 보였다. “브라이덜 샤워, 전 하고 싶어요. 이 시국에 프라이빗하게 모여서 노는 게 뭐가 나쁜가요? 친구들끼리 추억도 쌓고, 기분도 좋고, 여러모로 의미 있는 행사죠.” 점심시간에 잠깐 틈을 내 만난 33세의 또 다른 회사원 H씨는 8천원짜리 쌈밥을 입에 쑤셔 넣으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연예인들이 하는 거 보니 혹하긴 하더라고요.  살면서 주인공이 된 느낌을 받는 게 몇 번이나 되겠어요? 결혼식 당일은 정신없이 지나갈 것 같고. 저라도 그렇게 ‘빡세게’ 하고 싶을 것 같은데요.” 그에 반하는 의견도 있었다. 31세의 프리랜서 J씨는 “과해요. 우정을 다진다면서 오히려 우정에 금이 갈 만큼의 노동력과 경제력을 차출하는 게 말이 되나요”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28세의 교사 K씨도 “건강하지 못한 문화 같아요. 솔직히 보여주기식 행위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무엇보다 준비 과정에서 서로 눈치 보면서 미묘하게 불편해질 분위기가 싫어요”라며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브라이덜 샤워’ 한글 패치, 다운로드받았나요?

브라이덜 샤워. 참으로 이국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어째서, 왜 난데없이 샤워를 한다는 건지. 신부에게 닥칠 액운이라도 씻어낸다는 걸까(참으로 동아시아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찾아보니 브라이덜 샤워는 ‘신부에게 우정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한다. 즉 결혼을 앞둔 신부를 축하하는 의미로 친구들이 우정(을 담은 선물)을 비처럼 쏟아내는 파티를 뜻하는 거다. 결혼이 무슨 만기 적금도 아니고, 그동안 우정에 이자가 얼마나 붙었는지 뜯어서 헤아리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나는 단 두 번의 검색으로 그 원형은 오히려 숭고한 쪽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6세기 유럽에서 결혼식을 올릴 형편이 못 되는 신부를 위해 신부의 친구들이 결혼 자금이나 생활필수품 등을 모아 선물한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듣고 겪은 이 한국식 브라이덜 샤워는 도대체 뭘까? 화려한 꽃, 초와 풍선으로 장식된 호텔 스위트룸에서 신부와 친구들이 트윈 룩으로 원피스를 맞춰 입고 고급 샴페인을 터뜨린 뒤, (신부가 소원했던 리스트대로) 친구들이 준비해온 값비싼 선물을 증정한 다음 먹기 아까울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케이크를 커팅하며 SNS에 올릴 사진을 백만 장쯤 찍는 이 행위는? 나는 불현듯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본 장면들을 떠올렸다. 실제로 2008년쯤 국내에서 〈섹스 앤 더 시티〉와 〈프렌즈〉 등의 미국 시트콤이 대히트하며 뉴요커들에 대한 선망이 생겨나던 시기가 있었다. 일도 사랑도 모두 열정적으로 소화하는 그녀들을 보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그들의 문화에 심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런 멋진 언니들이 완벽한 웨딩 마치에 대한 낭만으로 가득 찬 채(1990년대 드라마라는 점을 잊지 말자)  끝내주는 브라이덜 샤워를 선보이니 현혹될 만도 하다. 미디어는 미디어일 뿐 현실과는 많이 다를 테고, 모든 미국인이 그렇게 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구식 로망을 담은 브라이덜 샤워는 기어이 국내에 상륙했고, ‘체면 차리기’라는 유교 사상까지 덧붙으면서 ‘코리안 브라이덜 샤워’라는 혼종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거기에 특급 호텔, 파티 대행사, 포토 스튜디오 등 일부 업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이 신문화는 이내 일률적인 방식으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전국 유명 호텔에서는 적게는 30만원대, 많게는 80만원대에 객실과 주류, 소품을 포함하는 브라이덜 샤워용 패키지를 판매하고 있다. 글래드 라이브 강남에서는 가랜드·꽃팔찌·풍선 등이 포함된 DIY 키트인 ‘브라이덜 샤워 박스’ 및 샴페인과 맥주를 제공하고, 그랜드 워커힐의 패키지는 해피아워, 포토 소품 등을 포함한다. 라이즈 호텔의 경우도 시즈널 카나페, 샴페인, 칵테일, 홀케이크, DIY 데커레이션 키트를 준다. 상세한 구성은 조금씩 달라도 대부분의 패키지가 비슷한 방식으로 제공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위드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련의 패키지 예약률이 다시 상승 추세에 있다고, 한 업계 관계자는 귀띔했다. 혹자는 일일이 준비할 바에야 오히려 경제적인 방식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평균 50만원을 웃도는 금액이 결코 적다고 할 순 없다. 신부가 공간만 제공하고 친구들이 ‘진짜 DIY’ 스타일로 각자 원하는 소품을 갖고 온다면 어떨까? 나는 인터넷 검색창에 ‘브라이덜 샤워 소품’을 검색했다가 한 웹사이트에서 샴페인 모양의 풍선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환상의 웨딩 마치? 환장의 웨딩 파티!

통상적인 ‘코리안 브라이덜 샤워’의 준비 과정을 뜯어보면 룸 차지는 예비 신부 쪽에서 지불하되 파티 및 선물 준비는 친구들에게 일임하며, 음식값은 N분의 1을 하는 경우가 많다. 32세의 회사원 Y씨는 올해 초 포시즌스호텔에서 친구 셋과 프라이빗 파티를 열었다. “고등학교 때 절친 4명 중 두 번째였어요. 이제 둘 남은 거죠. 호텔 비용만 예비 신랑이 지원해줬고 나머지는 친구들이 준비했어요. 케이크랑 선물, 파티용품 등등 합쳐서 50만원씩 갹출했고요. 사실 큰돈이긴 하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게임은 시작됐는데. 다들 한 번씩만 가길 바라야죠.(웃음)” 보통 브라이덜 샤워의 일원이 되는 친구는 신부에게 간택당했다는 이유로 고통받기 일쑤다. 고통의 당위성은 분명하다. 지나가는 심심풀이 파티도 아니고 ‘일생에 한 번뿐인’ ‘사랑하는 친구의’ ‘결혼 축하 파티’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라이덜 샤워란 그 준비 과정부터 시간, 돈, 마음을 모두 쏟아야 하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대개 젊은 현대인이 그 3가지를 모두 여유 있게 갖추기란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이 친구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면 모를까. 그중에 비혼주의자라도 하나 있다면 그 사람은 상대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도 적어질뿐더러 이토록 직관적으로 우정을 확인할 기회마저 놓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단톡방에서 ‘브라이덜 샤워 담론’에 불을 지폈던 친구는 이틀쯤 후 단톡방에 명언을 남겼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원래 브라이덜 샤워는 제일 먼저 하는 게 ‘짜세’(멋있고 체면 있다는 뜻의 인터넷 용어)라고.” 그러니 종내에는 후발 주자들이 나서서 브라이덜 샤워 계 모임이라도 만들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결혼의 의미도, 가치도, 이유도 사라진 채 오로지 투자한 돈을 되찾기 위해 브라이덜 샤워를 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샤워를 하시겠습니까

기존 웨딩의 허례허식을 타파하고자 생겨난 스몰 웨딩 중 일부는 ‘우리만의 리그’를 확인하는 소수 정예 VIP 행사로 변질된 지 오래다. 마찬가지로 영혼 없이 주고받는 청첩장 모임에 의미를 부여해보겠다며 급부상한 브라이덜 샤워 역시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도구로 전락 중이다. 그토록 신성하고 고결하다는 결혼 행위가 그 기저에서 수많은 ‘강제’와 ‘폭력’을 양산한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애초에 그 세상이 뭐 얼마나 대단한 세상이라고 평생의 친구를 인질 삼아 쇼윈도에 세워야 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문화가 오로지 극소수에게만 향유되다 사라지길 바란다. 아니, 지금보다 더 건강한 방식으로 정착될 수만 있다면 그거야말로 베스트일 것이다. 아무튼 SNS를 타고 퍼지는 이 유혹의 바람 속에서도 끝내 휩쓸리지 않는 다수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 결혼은 대개 한 번뿐이지만 우정은 영원하니까. 그러니 단 한 번의 브라이덜 샤워로 각자의 진심을 재단하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자(호텔 스위트룸에서 샴페인 잔 부딪친다고 더 깊어질 우정이었으면 인생을 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러니 선물은 몇만원 아래로, 음식은 이왕이면 맛있고 배부른 걸로, 샴페인 대신 맥주는 어떨지. 사진 백만 장 찍을 시간에 백문백답도 좋겠다. 원래 유치한 게 제일 재밌는 법이다. SNS도 좋지만 삶은 프레임 밖에서도 계속되니까. 이제, 거품 쫙 뺀 샤워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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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김예린
    글 김또각(자유 기고가)
    photo by Getty Images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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