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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제격인 '쇼트폼' 시대가 열렸다!

출근길에 5분짜리 오디오북으로 소설 한 편을 완독하는 세상. ‘쇼트폼’의 시대가 왔다.

BYCOSMOPOLITAN2021.07.13
 
밀리의 서재가 서비스하는 채팅형 독서 콘텐츠 ‘챗북’은 책의 핵심 내용을 10~15분 분량의 대화 형식으로 요약해준다.

밀리의 서재가 서비스하는 채팅형 독서 콘텐츠 ‘챗북’은 책의 핵심 내용을 10~15분 분량의 대화 형식으로 요약해준다.

시간은 없지만 책은 읽고 싶어

지난봄, 문화 무크지를 표방하는 한 잡지로부터 흥미로운 청탁을 받았다. 원고지 10매 내외의 소설을 써달라는 것. 올해 초 모 신문사가 주최한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운 좋게 당선된 덕이다. 예상 밖의 청탁도 반가웠지만 무엇보다 ‘원고지 10매 내외’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200자 원고지 10매면 글자 크기 10 기준으로 A4 한 장이 약간 넘는 분량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단편보다 짧은 소설을 영미권에서는 ‘쇼트 스토리(Short Story)’, 우리나라에서는 ‘엽편(葉篇)’이라 부른다. 나뭇잎 한 장 넓이에 완결된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뜻이다. 3주 후 마감이라 일정이 촉박했지만 다행히 미리 써둔 엽편이 몇 있어 그중 하나를 퇴고해 보냈다. 습작 시절 연습용으로 써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인은 “그 길이에 기승전결이 있긴 해?”라며 놀라움을 표했다. 물론 나뭇잎 한 장에 발단-전개-절정-결말의 전통적 플롯을 압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기존 소설과는 또 다른 쾌감을 주기도 한다. 빠른 서술로 일상의 한 단면을 크로키처럼 포착하거나, 예상치 못한 결말로 공포 영화처럼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식이다.
 
짧고 간결한 ‘쇼트폼(Short Form)’ 콘텐츠 선호 현상은 비단 활자 매체만의 일이 아니다. ‘밀리의 서재’, ‘윌라’ 같은 구독형 독서 앱 역시 모바일 환경에 맞는 쇼트폼 전용 플랫폼을 서둘러 내놓고 있다. 밀리의 서재가 서비스하는 채팅형 독서 콘텐츠 ‘챗북’은 책의 핵심 내용을 10~15분 분량의 대화 형식으로 요약해준다. 스마트폰을 탭할 때마다 카카오톡 같은 대화창에 말풍선이 등장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식이다. 윌라에서 현재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는 오디오북 중 하나는 10분 안팎의 북 리뷰다. 출퇴근길에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베스트셀러의 북 리뷰를 들으며 평소 관심은 있었으나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을 빠르게 소화하는 것이다. 실제로 ‘윌라’ 독자들의 주 청취 시간은 오전 7시, 오전 8시, 오후 6시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출퇴근길에 오디오북으로 책 한 권을 ‘후루룩 듣는’ 세상이 온 것이다.
 
 

영화도 애니메이션도 짧게, 더 짧게

몇 년 전만 해도 심심풀이용 오락물에 불과했던 쇼트폼 영상 역시 이제 엄연한 주류 장르로 대접받는 분위기다. 지난 5월 10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틱톡을 통해 선보인 ‘세로 단편영화 쇼케이스’는 오늘날 모바일을 통한 동영상 콘텐츠 소비 패턴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개된 영화들은 대부분 1~3분 이내의 짧은 러닝타임에 세로형 화면을 취하고 있는데, 낭비되는 공간 없이 한두 사람만 앵글에 담는 구성이 눈에 띈다. 화면을 꽉 채운 여성이 천장을 바라보는 순간 거꾸로 매달린 귀신이 그를 덮치는 식이다(〈고개 들지 마〉). 방탈출 동아리에 들어가려는 3명의 신입생 이야기를 그린 〈안티클라이맥스〉처럼 시청자가 주인공의 행동을 선택해 결말을 달리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물도 쇼트폼 영상의 흥미로운 미래를 점치게 한다.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이벤트 형태로 공개된 이들 12편의 작품은 틱톡의 문법과 세로형 화면의 강점을 살린 구성으로 발표 당시 누적 조회 수 330만 회를 넘기며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대로라면 1~2분짜리 영상 수십, 수백 편이 모여 120분짜리 영화 분량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도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10분 이하의 쇼트폼 영상이 주목받으면서 짧은 영상에 익숙한 어린이와 Z세대를 겨냥한 초단편 애니메이션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KBS와 투니버스 채널에서 방영 중인 4분 안팎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마카앤로니〉가 대표적이다. 천재 발명가와 그를 따르는 사고뭉치 조수 두 명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유튜브 영상처럼 빠른 전개와 대사 없이 동작과 소리만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논버벌 슬랩스틱코미디 포맷으로 젊은 세대의 취향을 저격한다. 올해 초 개봉한 디즈니 픽사 영화 〈소울〉의 오프닝으로 공개된 〈토끼굴〉 역시 쇼트폼 애니메이션에 속한다. 땅속 여정을 떠난 토끼가 자신이 구상한 완벽한 꿈의 집을 짓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10분 남짓한 러닝타임에도 웬만한 장편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틱톡’이 쏘아 올린 작은 공

플랫폼과 콘텐츠는 한 몸이다. 15초 내외의 동영상을 공유하는 틱톡이 내로라하는 거대 IT 기업들을 따돌리며 본격적인 쇼트폼 시대를 열어젖힌 이유다. 최근 공개된 페이스북의 새 기능 ‘사운드바이츠’를 비롯해 인스타그램 ‘릴스’, 트위터 ‘바이트’, 유튜브 ‘쇼트’, 네이버 ‘모먼트’ 등 틱톡과 유사한 쇼트폼 플랫폼이 뒤늦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분에서 1분으로, 1분에서 15초로,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축소를 거듭하는 콘텐츠 시장에서 기존의 롱폼(Long Form) 플랫폼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식 론칭도 하기 전에 10억 달러의 투자금을 모으며 이 분야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모바일 스트리밍 서비스 ‘퀴비(Quibi)’의 등장도 눈여겨볼 만한 뉴스다. 틱톡 등 기존의 쇼트폼 플랫폼이 ‘시청’과 ‘공유’에 집중하는 SNS 기반 플랫폼이라면, 월 5달러의 이용 요금을 앞세운 퀴비는 넷플릭스처럼 별도의 콘텐츠 제작자가 존재하는 프리미엄 동영상 플랫폼을 지향한다. ‘10분 내외의 쇼트폼 콘텐츠’를 ‘모바일’로만 제공하는 퀴비는 출시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 기예르모 델 토로, 샘 레이미 등 할리우드의 A급 감독을 줄줄이 영입해 화제를 모았다. 영화 산업의 부흥기를 이끈 거장들조차 30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2배속으로 돌려 보는 Z세대를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최근 카카오페이지가 야심 차게 선보인 ‘톡드립’ 서비스도 ‘공유’보다는 ‘제작’에 방점이 찍힌다. 카카오톡 대화 형식을 빌린 유머 콘텐츠와 3분 안팎의 영상 콘텐츠로 구성된 톡드립은 〈공성치〉 〈공성심〉 〈낄링타임〉 등 자체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에 〈피식대학〉 〈무한도전〉 〈두시탈출 컬투쇼〉 등 외부 IP를 대거 적용하며 몸집을 키우고 있다. 짧은 영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넷플릭스 역시 최대 1분 길이의 짧은 영상 클립을 모아 볼 수 있는 자매 앱 ‘패스트 래프’를 소개하며 쇼트폼 동영상 서비스 시장에 허겁지겁 뛰어들었다. 하단 탐색 메뉴에서 패스트 래프 탭을 누르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영화, 스탠드업 코미디의 웃긴 장면들이 연이어 재생되는 식이다.  전문가들은 ‘패스트 래프’ 도입에서 넷플릭스의 불안한 속내를 읽어내기도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문화를 즐기는 스낵 컬처 시대에 롱폼 콘텐츠 위주로 이뤄진 넷플릭스의 존재가 불현듯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듯 점점 짧아지는 콘텐츠 시장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을 요약본으로 완독하는 게 과연 제대로 된 독서라고 할 수 있을까? 모바일용으로 제작된 10분짜리 영화가 대체 어떤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을까? 그러나 긴 글을 읽는 것이 제대로 된 독서라는 생각 역시 구세대의 편견일지 모른다. 영화가 반드시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며 자란 세대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완독하고 영화 〈대부〉 시리즈를 정주행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