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기어가 된 그 이름
」“검사받자는 말은커녕 콘돔 착용하라는 말조차 안 들어요. ‘너 가임기 아니지 않냐, 내가 밖에다 잘 하겠다’라는 말이나 하고 말예요. 콘돔이 성병도 예방하는 기구라는 걸 모르는 걸까요? 진심?” 코로나19 이전엔 왕성하고 분방한 성생활이 여가의 낙이었다는 회사원 김해영(가명, 31세) 씨의 분통은 30분 이상 계속됐다. “자긴 깨끗하대요. 전 여자 친구는 딱 2명이었고, 걔들 외엔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고. 걔네들 참한 애들이라고…. 내 귀를 의심했죠. 그리고 ‘넌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구냐’고, ‘네가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면박을 주더라고요. 바로 옷 주워 입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도대체 남자는 왜, ‘성병 검진’이라는 말에 이토록 발끈하는 걸까? 그게 무슨 ‘조루’나 ‘발기부전’을 연상시키는 말처럼 느껴지나? 여자 친구에게 ‘성병 검진 결과서’를 요구받은 적이 있다는 대학원생 이혁진(가명, 27세) 씨는 ‘익명’을 신신당부하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솔직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나랑 자기 싫다는 뜻인가? 결과에 문제가 있으면 헤어지자는 얘긴가?’ 같은 생각이 꼬리를 물거든요. 그 말을 들은 뒤로 자꾸 의식이 돼서 섹스가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 기분이에요. 솔직히 신경 쓰이거든요. ‘이런 거(?) 하자 그러면 기겁하려나? 나중엔 충치 옮을까 봐 키스도 안 한다고 하겠네?’ 사실 이제 성병이 쉬쉬할 문제가 아닌 건 아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돼도 기분이 좀 그래요.”
나만 손해다
」“증상이 없으면 괜찮은 거 아니야?”라고 반문하고 싶다면, 혹은 남자 친구에게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바로잡자. 무증상은 결코 희소식이 아니다. 안일한 처신이 2차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 “여성 환자의 60~80%에서 무증상으로 나타나는 임질은 골반염, 불임 또는 자궁외임신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또 자궁내막염, 난관염, 복막염, 바톨린선염 등도 대표적인 합병증이죠.” 채지윤 원장의 말이다. 특히 임신 계획이 있는 여성이라면 더 주의해야 한다. HIV, 헤르페스 등의 바이러스나 임질, 매독 등의 성병균은 임신할 경우 태아에게 전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아가 성병에 감염되면 뇌 손상, 실명, 난청, 저체중 같은 합병증을 겪거나 심할 경우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
물론 남자라고 안전하지 않다. 그가 “다음에 검사받을게. 응? 오늘은 그냥 하자. 한 번만!” 따위의 수법으로 계속 어물쩡 넘어가려고 한다면 다음 내용을 잘 기억해뒀다가 소상히 알려줄 것. 〈대한기생충학회지〉는 감염자 중 약 80%는 별다른 증상을 겪지 않는 흔한 성병 중 하나인 트리코모나스 바지날리스(이하 ‘트리코모나스’)를 치료하지 않은 상태로 수년 이상 방치하면 만성 전립선 감염이 초래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내 몸에 전립선이 없어 잘 안 와닿는다고? 소변 볼 때, 사정할 때마다 발생하는 기분 나쁜 통증, 고환과 회음부라는 ‘절대 취약 부위’의 고통을 유발하는 감염이다. 비뇨의학과에 가기가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전립선 농양, 패혈증 등의 치명적 합병증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그’가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톡’의 기술
」상대가 ‘성병’에 대한 불편한 인식이 있는 상태에서 거두절미하고 검진이나 결과서를 요구한다면 갈등은 뻔한 일. 채지윤 원장은 남녀 모두 성병 검사가 ‘증상이 있을 때 받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받는 검진’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마케터 윤미주(가명, 29세) 씨는 유튜브의 다양한 성·의학 관련 채널 덕을 본 경우. “학교 다닐 때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을 이미 맞았는데, 남자도 함께 접종해야 효과가 있다는 건 최근에 알았어요. 지금 만나는 남자 친구와 제법 진지한 관계긴 하지만 그에게 ‘나를 위해 자궁경부암 백신을 맞아달라’라고 말하긴 좀 어렵더라고요. 비용도 만만치 않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저한테 조심스럽게 자궁경부암 백신을 접종했냐고 묻는 거예요. 아직 안 맞았으면 자기랑 같이 가서 맞자고. 너무 놀라서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라고 물어봤더니 유튜브에서 ‘성병 예방’을 주제로 한 영상을 봤대요. 먼저 얘기를 꺼내 너무 감동받았죠. 그 뒤로 친구들이 저 같은 고민을 할 때마다 제 남자 친구가 봤다는 그 성병 관련 콘텐츠 영상의 링크를 보내줘요. 남친이랑 같이 보면서 선입견도 없애고, 공부도 하라고요.”
심리 상담사 김정연 박사는 ‘의심’이 아닌 ‘의논’의 태도로 접근하라고 조언한다. “‘너 성병 검사 받았어?’라는 질문이 ‘너 성병 걸린 거 아니야?’라는 뉘앙스로 전달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세요. 두 사람 모두 검진을 받는 목적이 사랑을 나누기에 좋은 시기, 방식을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OX 퀴즈 ‘성병’, 어디까지 알고 있니?
」X ‘함께’ 받는 건 맞지만 같은 병원일 필요까진 없다. 여성은 주로 산부인과나 비뇨의학과, 남성은 비뇨의학과에서 검진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원마다 검사 가능한 종류가 다를 수 있으므로 찾기 전에 미리 문의할 것.
남자의 성병 검사가 더 아프다?
X 남자 친구가 성병 검사에 면봉 타령, 극심한 ‘그곳’ 통증을 운운하면 옛날 얘기 하지 말라고 쏘아줄 것. 요즘엔 PCR (Polymerase chain reaction. 성병 유전자 검사)이라는 간단한 검사법이 있다. 소변·분비물만 채취하면 끝나며, 분비물에 성병과 관련한 DNA가 조금이라도 포함돼 있으면 감염 여부를 조기에 정확히 진단한다.
여성의 감염 확률이 더 높다?
O 남성이 성병에 걸린 여성과 성관계 혹은 유사 성행위를 할 경우 감염될 확률은 20%, 여성이 성병에 걸린 남성과 성행위를 할 경우 감염 확률은 80%다. 또 한 사람이 한 종류 이상의 성병에 감염될 확률은 30~50%에 달한다.
만난 지 오래된 커플은 한 번 검진을 받은 후 이상이 없으면 또 받을 필요가 없다?
O 상대가 바람피울 확률이 0%여도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 무증상은 물론 잠복기가 6개월~1년 가까이 되는 바이러스도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