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다큐 PD의 한옥 라이프

집에 대한 기억이라면 마당이 있는 시골집부터 떠오르는 소년에게, 도시의 아파트는 철문 하나를 경계로 외부와 차단되는 고립의 세계였다. ‘하늘 아래 내가 눕는 곳이 내 집’이라 여기며 주거 환경에는 도통 욕심이 없던 다큐멘터리 감독 전상진이 100년 넘은 고택을 허물고 제 손으로 한옥을 지어 올린 이유, 그리고 나무와 햇살이 비치는 마당이 있는 그의 공간.

BYCOSMOPOLITAN2020.11.02
 
지금까지 어떤 주거 형태에서 살아봤나요? 아버지가 지은 주택에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냈어요. 연립주택과 아파트에서도 살아봤어요. 19살에 고시원을 시작으로, 20대엔 대학 동아리방과 학생회실에서 10년 가까이 지냈어요. 학생회관 샤워실을 이용하고 온열 장판으로 겨울을 나는 삶이었죠. 서른에 대학원 진학 후 오피스텔을 얻고, 동료들과 함께 한옥 작업실에서 살다가 지금은 서른넷이 되던 해부터 직접 짓기 시작한 삼청동 한옥에 살고 있어요. 
 
다양한 주거 형태 중 한옥을 선택한 이유는 뭐예요? 마당이 넓은 시골집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서울의 빌라와 아파트에 적응을 못 했어요. 내 공간을 가진다면 마당이 있는 집, 마당을 향한 창문 너머엔 나무와 햇살이 비치는 공간에서 살고 싶어 공동 주거 형태는 피했죠. 첫 한옥은 대학원 시절, 남자 셋이서 돈을 모아 거주 겸 작업실로 얻은 성북동의 한옥 주택이었어요. 겨울에는 건축용 비닐로 집 전체를 둘러야 할 정도로 낡은 집이었죠. 덕분에 ‘이 낡은 한옥을 잘 고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하는 계기가 됐어요. 
 
심지어 집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죠. 집 구조에 자신의 성향이 반영된 요소가 있다면요? 창의적인 시도를 즐겨 마당에서 욕실 창으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오픈형 구조로 화장실을 만들었어요. 목욕할 때 햇살이 가득 들어올 수 있도록요. 전체적으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어 개인적 공간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고요. 그래서 20평대의 좁은 집 거실에 10인용 테이블을 놓았죠. 그 와중에 사적인 영역을 지키기 위해 침실은 다락으로 숨겼지만요. 
 
집은 가장 일상적인 기억을 심어주는 공간인 동시에 가장 사적이고 특별한 공간이에요. 문득 그게 가장 크게 느껴질 때가 언제예요? 햇빛이 드는 순간요. 남향으로 지은 덕에 일출과 일몰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일정이 없는 날엔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기도 해요. 햇빛과 한옥의 창호 살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그림자 패턴을 관찰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죠. 아직은 스스로 지은 집의 구석구석을 새로 발견하는 재미가 남아 있어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음악을 틀고 샤워를 하는 것처럼 반복되는 일을 하더라도 매 순간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어요. 하루이틀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면 은은하게 집에 배어 있는 소나무 향도 좋아요. 
 
한옥은 그 자체로 인테리어의 완성인 부분이 있어서 많은 소품을 두지 않아요.
 
낭만적인 감상 뒤로, 현실적인 장단점도 있을 것 같아요. 마당이 있어 작은 집도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동시에 (작은) 한옥의 장점이자 단점은 집의 아름다움을 위해 내부 공간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한옥은 마당과 공존하는 건축물이라, 서로 조형적인 영향을 주고받거든요. 마당을 크게 만들고 집의 면적을 줄일수록 집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비움으로써 채운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 북촌 한옥마을은 1900년대 초반부터 조성된 서민형 한옥으로 20~30평대가 가장 많은데, 집 자체의 면적에 욕심 내서 마당을 작게 만들어놓은 집을 보면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떨어져요. 
 
집을 지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많네요. 집을 짓는 과정이 ‘집’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기도 했나요? 이 또한 낡은 구분법이지만 여성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일들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어머니를 더 존경하게 됐어요. 집은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작은 그릇과 생활 도구, 패브릭 등으로 내부를 채우는 일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더라고요. 집 꾸미는 일을 직접 해보지 않고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는 성향의 남자로 평생을 살았더라면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세상을 경험하고 있어요. 
 
바로 그 ‘채우는 일’에서 집주인의 취향이 발현되곤 하죠. 주로 어떤 가구나 소품으로 공간을 꾸며요? 단연 이케아예요. 비단 이케아가 아니어도 집을 직접 지은 만큼, 그 안에 들어갈 가구는 직접 만들어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개인적으로 인테리어 소품은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낸 아파트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템이라 여기는데, 한옥은 그 자체로 인테리어의 완성인 부분이 있어 많은 소품을 두지 않아요. 
 
집을 구할 때마다 중요하게 고려하는 점은 뭐예요? 소리를 봐요. 서울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아파트는 21층이었는데, 창문을 열지 않아도 들리는 성수역 지상 지하철 소리, 번화가의 혼잡한 소음이 자정 넘어서도 아파트 벽을 타고 올라와 불안하게 했어요. 그저 조용한 분위기를 원하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얼굴 아는 옆집 개가 짓는 소리, 이웃 할머니들의 골목길 담소 같은 지금 동네 소리는 날 웃음 짓게 하죠. 그런 소리는 소음이 아닌 것 같아요. 
 
코로나19 이후 ‘집’의 공간성이 확장되고 있어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지금, 자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인가요? 지구 멸망의 날 내 최후의 안식처기도 하지만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공간이죠. 직접 지은 이 집이 너무 사랑스러워 감정에 고취될 때도 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 집도 결국 재화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사람들은 끝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가꾸지만, 어느 순간이면 놓아줄 때가 온다고 믿는 편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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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하예진 / 류진(freelancer editor )
  • Design 안정은
  • Photo by 이혜련 / 홍경표 / 최별(오느른)
  • 기사등록 온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