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사진가 9인의 사적인 바다 사진

가장 내밀한 기억으로 남은 해변에 대한 짧은 글

프로필 by 이예지 2024.07.14

미야코섬, 일본

by 황예지
바다를 바라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다를 보기만 하면 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들던, 아무리 험한 파도가 쳐도 곧잘 수영을 하던 사람. 바다와 얽히는 그의 몸을 바라보며 바다와 가까워졌다. 물결 안에서 사랑을 느꼈다. 그 사람과 이별하고 난 후, 다시 마주하는 바다는 어떨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과 수풀을 헤치고 마주한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경탄을 자아내는, 고요하고도 깊은 얼굴. 나는 이제 바다를 알고 그 사람과는 헤어졌다. 이별이라는 예쁜 조약돌. 물수제비를 뜨듯이 그 관계를 바다에 보내주고 친구들과 명랑하게 웃었다.

니스, 프랑스

by 이옥토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파리에서는 1백만원을 도둑맞았고, 한국에 보내야 하는 서류 때문에 경찰서에서 거의 반나절을 허비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무키무키만만수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울려 퍼지면서 왜 유학생 신분의 친구들이 유럽의 행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는지 뼈저리게 알았다. 긴 시간이 지나 만나게 된 조사관은 K팝을 들으며 내게 NCT에 대해 물어봤다. 그리고 소매치기를 잡을 수 없다고, 네가 작은 아시안 걸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서류가 필요했기 때문에 군소리 없이 앉아 있었지만, 내 안에 쌓인 화는 라뒤레의 마카롱을 먹어도 해소되지 않았고 결국 에펠탑도 보지 않은 채 니스로 떠났다. 그렇게 마주한 바다는 처음 보는 푸른색을 하고 있었다. 하늘색에 가까운 듯한 바다를 한참 바라보면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햇볕에 달궈진 조약돌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앗, 뜨거!”를 외치며 일어났다. 순간 웃음이 터졌고 화를 씻어 내리는 데는 물만 한 게 없구나 싶었다. “나는 니스의 에이시안 걸.” 그렇게 흥얼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에사우이라, 모로코

by 장우철
내가 처음 바다에 간 것은 13살 때였다. 며칠이고 눈이 오는 연말에 간 서해. 경유 냄새 진한 시내버스에서 내려 왠지 저쪽이 바다일 것 같아 그쪽으로 걸었더니 앞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되었고, 그게 바다라고 했다. 바다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라며 바다를 대할 때마다 질문은 밀물처럼 차올랐다. 바다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누군가는 바다 앞에서 아름다운 호연지기를 키우고 나아갈 길을 밝히기도 한다는데, 나는 기꺼이 돌아서기나 한다. “바다에 가서 좋은 건 5분 정도야”라고 농담처럼 고백하면서. 내가 에사우이라에 간 것은 2017년, 여름도 겨울도 무엇도 아닌 계절로 기억하는 때였다. 나는 그때 폐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에사우이라의 구식 자동차들이 내뿜는 순도 높은 매연은 걸음을 멈추고 벽을 붙잡게 했다. 바닷가에서 차분히 숨을 고르던 그때, ‘여기가 대서양인가’라는 생각이 어울릴 터였지만 웬걸, 얼굴이 따가웠다. 모래 알갱이인지, 해무를 이루던 물방울인지, 결국 바람인지, 저쪽이 때리니 맞는 수밖에. 나는 두 눈이 찌개에 남은 미더덕처럼 돼서는 역시 “바다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했던 것 같다. 몸이 아파 그랬는지, 지금도 에사우이라를 떠올리면 어쩐지 앓는 마음이 된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좋아하는 속담을 따라 오늘은 마티 디옵 감독의 영화 <애틀란틱스>를 보면서 뭔가 치료 비슷한 걸 해보기로 한다.

시라쿠사, 이탈리아

by 윤송이
2019년 8월의 시칠리아였다. 런던 생활 중 휴가를 오게 된 곳으로, 유럽의 섬은 처음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여름, 그리고 바다를 더 사랑하게 됐다. 그곳에서 마주한 해변은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고유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물장구치는 작은 놀이터부터 청년들이 모여 다이빙을 즐기던 방파제, 그리고 노인들이 휴식을 취하는 평화로운 장소까지.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아름다웠다. 나는 연신 카메라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내가 바다 수영을 처음으로 즐기게 된 곳이기도 하다. 스노클링 마스크가 어색할 정도로 수영 경험이 없었던 그때, 조심스레 몸을 담그고 바라본 세상은 참 고요했다. 여름과 바다, 그리고 수영.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들떠 오르고 만다.

꼬리뻬, 태국

by 김실버
꽤 오래전 태국의 남쪽 작은 섬, 꼬리뻬에서 열흘을 홀로 보낸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작은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 조리를 질질 끌고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한적한 해변에서 낮 시간을 보냈다. 투명하고 푸른 바다에 떠 있기도, 모래 위 타월 한 장에 몸을 뉘어 책을 보다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곳엔 혼자 온 사람들보다 짝을 지어 온 사람들이 더 많았고, 아직 사랑을 모르던 어린 나는 그때 이런 바다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랑의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기 전, 작은 하트를 팔 안쪽에 새겼다.

타오르미나, 이탈리아

by 채대한
팬데믹이 끝나가던 여름, 무척 더운 날에 시칠리아로 떠났다. 섬 한 바퀴를 완주하는 긴 여정이었는데, 그중 타오르미나는 화려한 휴양지이자 발코니 사이로 부서지는 파도가 눈부시게 빛나는 곳이었다. 그늘에 누워 마셨던 그라니타, 새파란 하늘과 마른 소금 냄새를 잊을 수 없다.

을왕리, 한국

by 이강혁
외로움에 빠져 있던 어느 여름밤,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중 하나일 을왕리해수욕장에 홀로 찾아갔다가 텅 빈 모래사장에 조명이 켜져 있는 걸 보았다. 원래 풍경은 서해 갯벌의 텁텁한 바다에 노란 조명이지만, 야광으로 빛나는 박테리아가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해변을 환히 밝힌 멕시코의 아카풀코 비치를 상상하며 색을 보정해봤다. 지금 말고 언젠가, 그곳에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하며. 그런데 그렇게 보정한 사진이 꽤 마음에 들었다. 뮤지션 신해경이 마음에 든다며 2022년 발표한 앨범 <최저낙원> 커버로 낙점한 사진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있는 현실은 이미 내 상상만큼 좋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마니니 비치, 하와이

by 이훤
아무도 없는 바다에 가고 싶었다. 모든 일과 업무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한 해를 맺는 12월에 독자도 동료도 없는 곳에 가서 그저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는 데 가진 힘을 다 쓰고 싶었다. 방문객이 거의 없는 마니니 비치로 향했다. 20시간을 비행해 도착한 거기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업무 메일, 미팅이나 전화, 카톡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냥 들었다. 봤다. 중력에 따라 움직이는 돛처럼 그냥 거기 ‘있는’ 데 집중했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으며 침범되지 않은 채로 머무르기. 심심한 상태를 지나 졸음이 쏟아졌고, 졸린 걸 참지 못해 잠들었다. 긴 낮잠에서 깬 이후에도 같은 자리에 한참 앉아 있었다. 시간이 인간을 관통하는 감각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쥐고 돌아왔다. 우리가 가본 가장 조용한 바다. 바다에서 가장 조용했던 나. 아주 천천히 불이 마르는 양초처럼 그날의 기억이 정릉에서 천천히 꺼져간다. 그것이 다 꺼지기 전에 어떻게든 여러 차례 남겨볼 심산이다. 남기는 동안에는 다시 그 앞에 설 수 있다.

가마쿠라, 일본

by 박현구
어릴 적부터 유난히 여름을 좋아했다. 해마다 늘 피서를 갔는데 가기 전날 설레며 잠 못 이룬 기억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에서 놀았던 기억 등 여름은 가장 좋은 기억이 많이 남는 계절이다. 지난여름, 도쿄에서 한 시간 기차를 타고 갔던 작은 도시 가마쿠라. 서핑 슈트를 입은 딸과 서핑을 한 후 출근하는 아빠 등 다양한 연령대의 서퍼들과 동네 곳곳에 보이는 서핑 숍은 꽤나 오랫동안 서핑과 함께한 동네 사람들의 생활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좀 더 올라가다 보니 이름 모를 해변이 나왔다.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석양이 질 때까지 해변의 풍광과 그들을 감상했다. 석양에 비치는 영롱한 윤슬과 주저 없이 바다에 몸을 내던지는 자유로운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 어린 시절 내가 여름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나를 가장 설레게 했던 사적인 순간이었다.

Credit

  • Editor 이예지
  • Art designer 장석영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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