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매거진의 피처 디렉터 J는 올해 17년 차 베테랑 기자다. 사회, 문화, 리빙, 식도락 등 거의 모든 이슈에 안테나를 세워야 하기에 그녀의 휴대폰은 늘 분주하다. 특히 연예 섹션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 이런 그녀가 최근 몇 년 가장 공들이고 있는 것은 바로 아이돌이다. 초국적 K팝은 국가 경쟁력 혹은 국가 이미지 조사 결과에서 언제나 상위에 랭크돼 있는 키워드기 때문이다. “어린 애국자들을 플랫폼에 담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한 가지 문제만 빼면요.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팬덤의 여론도 함께 공부해야 하거든요.” 공중파를 통해 대세를 파악하는 시대가 막을 내린 후 아이돌 인터뷰 준비가 어려워졌다는 거다. 자체 예능, 현장 에피소드, 소통을 위한 실시간 라이브 등 콘텐츠 ‘떡밥’이 너무 많아 입문자가 단시간에 이 그룹을 파악하기 위해 뭘 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궁리해낸 방법이 그 그룹의 ‘덕후’에게 사전 조사를 하는 것. 팬덤에서 소구하는 멤버 각각의 이미지, 성격, 포지션, 에피소드까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룹의 지형지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비주얼 멤버가 반드시 인기 원톱은 아니라는 거예요. 강력한 코어 팬덤을 가진 덕후몰이 멤버가 따로 존재하기도 해요”
페리페라 잉크 틴트 ‘덕후몰이’밖에 모르던 내가 이 단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된 건 JTBC 〈싱어게인2〉의 한 클립에서였다. 소년 같기도 하고 소녀 같기도 한 64호 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7080 감성의 노래를 선사한 후 BTS ‘I Need You’의 파워풀한 안무를 소화하며 반전 매력을 뽐냈다. 호랑이 같은 매력을 발산한 후 숨을 고르는 64호의 얼굴은 수줍은 아기 고양이 같았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모든 심사위원의 입에서 “귀여워”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고, 마침내 터진 작사가 김이나의 한마디. “완벽한 덕후몰이상입니다!” 자신이 뭘 잘하는지 모르는 듯한 무심한 태도, 무대 위에서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지만 준비 시간에는 그와 완전히 대비되는 허술하고 순진한 모습이다. 얼굴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오가는 중성적 느낌이 가득하다. 그녀를 이루고 있는 면면에서 ‘갭 차이’가 도드라진다. 클라이맥스는 마지막에 터졌다. 쏟아지는 칭찬에 “왜 기뻐하지 않냐”고 묻자 “너무 기쁘고 진심인데 낯을 많이 가려서…”라고 답했다. 김이나는 “이런 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포인트!”라며 “입덕에 최적화된 사람”이라고 흥분했다. 그 후 연예기획사 B 대표와 수다를 떨던 중 ‘64호 가수가 정말 덕후몰이상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인간적 호감은 너무 인정하지만 내가 그간 함께 작업해본 연예인들에 비하면 그저 귀여운 사촌 동생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B는 “트렌드를 모르시네! 요즘은 정석 미남미녀만 팬덤을 모으는 게 아니에요. 콘텐츠 플랫폼이 다양해지며 아티스트의 매력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됐거든요”라며 웃었다. 외모? 아티스트의 재능과 인성만 갖춰져 있다면 원석을 깎아 만들면 된다. 특히 아이돌의 경우,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곧 알게 된다. “오라가 달라요. 노력하고 절제하는 과정을 통해 남들에겐 없는 매력을 갖게 되거든요. 평범하게 생겼다고요? 단단한 코어 팬덤을 지닌 덕후몰이들을 ‘생눈’으로 보게 된다면 그런 얘기 절대 못 하실걸요?”
평범 속의 비범이라.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도 아니고 그게 가능한가 싶겠지만 응, 가능하다. 나는야 22년 차 뷰티 디렉터, 아이돌은 몰라도 아이돌의 외모를 만드는 사람들은 잘 안다. 원석이 보석으로 바뀌는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들, 이미지 디렉터, 의사, 메이크업 아티스트, 헤어 스타일리스트 등과 같은 뷰티 키 맨 말이다. 그들이 입을 모아 덕후몰이상의 필수 조건으로 꼽는 것은 코, 턱, 목 그리고 몸매! 날카로운 턱선, 균형 잡힌 콧대, 긴 목, 아름다운 보디라인을 기본으로 갖춰야 승부를 던질 수 있다. 눈이 좁아도, 키가 좀 작아도, 어깨가 좁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라인’이다. 그림체로 치자면 날카로운 펜촉으로 단숨에 그려낸 크로키이므로 디테일보다는 실루엣에 집중한다. 일단 기본은 살과의 전쟁이다. 온라인에 아이돌 식단이라며 떠도는, 풀떼기 몇 개 얹힌 샐러드 접시? 물론 안 먹고 빼는 다이어트를 시키는 소속사도 많다. 하지만 ‘계획이 있는’ 기획사라면 저탄고지, 당질 제한식 등 밸런스 잡힌 건강식으로 몸을 준비시킨다. 요즘 CEO들 사이에 난리 난 ‘녹다잇단’, 즉 녹용이 들어간 다이어트 환도 인기 만점이다. 몸이 상하거나 체력이 떨어지지 않아야 하드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씬한 근육 몸매를 유지하는 것을 덕후 언어로 ‘와꾸(틀) 조인다’라고 하는데, 이러한 조임의 노력은 10년 차가 돼도 계속된다. 자기 관리의 상징이므로 팬들은 비수기, 성수기 없이 라인을 유지하는 나의 아이돌을 자랑스러워한다. 일단 살이 빠지고 나면 코, 턱, 목의 라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코는 샤프한 존재감이 살아 있는 것이 좋다. 쭉 뻗은 콧대를 선호하지만 의느님의 과도한 도움은 사양이다. 만약 손대더라도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아야 성형돌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다. 턱선의 경우 살이 빠지면서 자연스레 발굴된다. 조금 각이 져 있더라도 군더더기 없는 라인이 베일 듯이 드러나기만 하면 오케이다. 안면 골격을 퍼즐 맞추듯 섬세하게 교정하는 카이로프랙틱 닥터에게 좀 더 입체적인 라인을 디자인받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옆으로 퍼져 있던 광대뼈는 슬림하게, 하악은 귀티 나게 정리된다. 단 몇 밀리미터의 변화지만 인상이 완연히 달라 보인다. 시술할 때도 배우는 부드러움을 2% 남기는 반면 아이돌은 선명하고 확실한 라인을 만드는 데 좀 더 집중한다.
과도한 웨이트트레이닝은 금물. 승모근이 올라가 목이 짧아 보이면 춤선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한 근육 운동과 필라테스 같은 라인 운동을 병행한다. 요즘 소속사들은 재활 전문가들을 아예 내부 인력으로 채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과격한 안무를 소화해야 하는 아티스트의 건강을 챙기는 동시에, 틀어지고 뭉쳐 라인이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피부는 기본이다. 남돌이건 여돌이건 무대에서는 하드한 메이크업을 하지만 라이브를 통한 소통이 많아진 요즘 맨얼굴의 청순함은 필수 조건이 됐다.
반드시 평범 속 비범을 달성해야만 덕후몰이를 하는 건 아니다. 모든 아이돌이 위와 같은 케어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분명한 건 대중과 팬덤의 교집합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지금, 아이돌 소속사들도 코어 팬덤을 거느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자본과 플랜을 바탕으로 덕후몰이상을 기획하는 데 열심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소속사가 해줄 수 없는 것도 있다. 재능과 노력이다. 수년째 아이돌 취재를 담당해온 에디터 C는 “덕후몰이상은 본업을 잘한 다음 생각할 문제”라고 귀띔한다. 매력 있는 외모로 강아지같이 웃어주어도 무대가 훌륭하지 않으면 팬덤을 모을 수 없다고 말이다. 덕후들은 아이돌을 아티스트로 ‘리스펙’하고 있으며, 아이돌은 이에 응답하기 위해 노력과 절제를 통해 직업의 본질을 수호하며 덕후몰이상에 이른다. 응원에 대한 응답, 그리고 그에 보답하는 사랑이라니. 세상에 이런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