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보헤미안 시크 A to Z

2000년대의 보헤미안 시크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프로필 by 이병호 2024.10.12
1914 PAUL POIRET

1914 PAUL POIRET

1969 F/W YVES SAINT LAURENT

1969 F/W YVES SAINT LAURENT

2003 S/S CHLOÉ

2003 S/S CHLOÉ

2008 F/W GUCCI

2008 F/W GUCCI

2020 S/S CELINE

2020 S/S CELINE

2013 S/S SAINT LAURENT

2013 S/S SAINT LAURENT

지난 2월, 끌로에 메종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셰미나 카말리의 첫 컬렉션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모습을 본 에디터는 잊힌 옛 트렌드가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프런트 로에 앉아 있던 시에나 밀러, 리야 케베데, 키에넌 시프카, 제리 홀과 그의 딸 조지아 메이 재거, 팻 클리브랜드 등 수많은 셀렙이 신고 있던 우드 플랫폼 샌들이 바로 그 이유. 그리고 쇼가 시작되고, 가능성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여심을 뒤흔들 서정미 가득한 보헤미안 룩이 줄지어 등장했기 때문. 그렇게 2000년대 초반의 보호 시크가 돌아왔다. 그렇다면, 왜? 부드러움 또는 여성성은 언제나 정치적 이슈나 전쟁이 발발하는 힘든 시대에 떠오르곤 했다. 2000년대 초반 보헤미안 시크가 처음 등장했을 때엔 9·11 테러 사건과 이라크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엔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함께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다. 이러한 무겁고도 어두운 세계 정세가 다시금 패션에 보드랍고도 낙천적인 ‘보헤미안 브리즈’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HISTORY
오늘날 우리가 ‘보호 스타일’, ‘보헤미안 시크’, ‘보호 시크’라고도 부르는 보헤미안 스타일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히피족의 스타일을 근간으로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연적인 패턴, 흐르는 듯한 여유로운 실루엣 말이다. 물론 보헤미안 스타일의 시작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보헤미안은 프랑스어 ‘보엠(Bohême)’에서 유래한 말이다. 인도에서 발원한 유랑 민족 로마니(Romani)족을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서 건너왔다고 오해한 까닭에 보헤미안으로, 영국인들은 ‘집시(Gypsy)’라 불렀다. 이들 고유의 이국적인 스타일과 보헤미안이라 불려진 프랑스의 예술가와 음악가, 작가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자유분방한 빈티지 스타일이 보헤미안 스타일로 불리게 됐다. 19세기 중반엔 예술, 문학, 음악에서 미학과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식인 집단인 낭만주의자들도 프랑스의 보헤미안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낭만주의자들도 모두 보헤미안 무드로 스타일을 통일하기 시작하며 보헤미안 스타일은 더욱 입체적으로 진화해나갔다. 사회적 규범과 더불어 물질주의에 반대하는 이념까지 지니게 된 것. 그렇게 보헤미안은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 독특한 복장, 사회적 제약에 대한 무시, 반물질주의와 관련된 총체적인 ‘반문화’ 운동을 상징하게 됐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등장한 심미주의 운동은 자유로운 표현을 강조했는데 보헤미안들은 이 사조에 참여해 꽉 죄는 코르셋과 크리놀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며 몸을 타고 흐르는 자유로운 실루엣의 룩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결국 심미주의 운동의 추종자들 또한 보헤미안 스타일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현대 복식사에 보헤미안 스타일이 처음 등장한 순간은 언제일까? 바로 디자이너 폴 푸아레에 의해서다. 앞서 언급한 심미주의 운동에 참여한 보헤미안처럼 폴 푸아레는 1910년대에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드레이프 원단을 여성복에 도입해 당대 여성들에게 신체의 자유를 선사했다. 그는 기존의 보헤미안 스타일에 당시 크게 유행한 오리엔탈리즘을 접목해 현대 패션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호블 스커트, 하렘 팬츠, 램프셰이드 튜닉과 같은 보헤미안 스타일의 상징적 아이템들을 만들어냈다. 최초의 ‘오트 보헤미안’ 스타일을 창조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195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과 경제불황이 계속됐고 ‘비트족’이라 불린 젊은 세대들은 이에 큰 절망감을 느낀 채 보헤미안 정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결국 히피 문화를 탄생시켰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들어 히피족에 의해 보헤미안 스타일이 다시금 부활했다. 히피 문화는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일어난 저항 운동으로,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주류 문화와 기존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들고, 사랑·평화·자유를 추구하며, 물질문명이 아닌 정신적 가치와 인간성 회복을 주장했다. 히피족은 전통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거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보헤미안 패션을 받아들였다. 프린지, 자수, 흐르는 실루엣이 그 시대 보헤미안 스타일의 특징이다. 이러한 경향은 하이패션 신의 디자이너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1960년대에 마라케시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의 전통 의복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인 이브 생로랑은 보헤미안 무드를 컬렉션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또한 히피 패션의 전 세계적 유행으로 끌로에의 칼 라거펠트와 같은 디자이너들도 보헤미안 감성의 로맨틱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1970년대엔 여성해방운동이 펼쳐졌는데, 이로 인해 브라리스 운동도 전개되며 보헤미안 스타일은 더욱 큰 사랑을 받게 됐다. 이 시기 제인 버킨, 조니 미첼, 탈리타 게티, 아니타 팔렌버그, 스티비 닉스 등 오늘날 우리가 보헤미안 스타일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인물들의 패션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다시 흘러 2000년대에 보헤미안 스타일이 또 한 번 트렌드의 중심에 섰다. 바로 보헤미안 시크, 보호 시크란 이름으로. 자유로운 보헤미안 정신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급스럽고 세련된 요소가 믹스돼 접근하기 쉬운 현대적인 감성의 룩으로 재해석됐다. 시에나 밀러, 케이트 모스, 올슨 자매를 비롯한 패션 아이콘들에 의해 보헤미안 시크의 인기는 절정을 맞이한다.

(왼쪽부터)Isabel Marant,Ralph Lauren Collection,Rabanne, Chloe.

(왼쪽부터)Isabel Marant,Ralph Lauren Collection,Rabanne, Chloe.

심지어 2000년대 뉴욕 다운타운을 장악했던 일명 보보 시크(Bobo Chic,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만 보헤미안풍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이들을 일컫는 프랑스 단어 ‘Bourgeois Bohème’에서 유래한 표현)란 이름의 스타일로 진화되기까지 했다. 이 시기 끌로에는 스텔라 맥카트니와 피비 필로에 의해 황금기를 맞았는데 지금 봐도 세련된 프렌치 감성의 보헤미안 시크 룩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잇 백으로 불리던 패딩턴 백의 공전의 히트와 함께! 2004년과 2007년 사이 엄청난 열풍을 일으키던 보헤미안 시크는 디자인 수위가 점점 과해지더니 어느날 트렌드 선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디자이너들이 아예 보헤미안 시크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구찌의 프리다 지아니니는 2008 F/W 시즌 페이즐리 패턴을 필두로 파워풀한 보호 시크 컬렉션을 선보였고, 오늘날 보헤미안 감성을 브랜드의 DNA로 삼게 된 이자벨 마랑은 2009 S/S 컬렉션을 기점으로 보헤미안 모티브를 컬렉션에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에디 슬리먼은 2013 S/S 런웨이에서 무슈 생로랑의 위대한 유산 르 스모킹과 보헤미안 스타일을 오마주한 컬렉션으로 큰 화제를 모았고, 얼핏 히피처럼 보이는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자신의 구찌 하우스 데뷔 컬렉션을 시작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는 내내 보헤미안 감성을 디자인의 베이스로 삼았다. 그리고 가장 최근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보헤미안 스타일은 바로 셀린느로 이동한 에디 슬리먼이 선보인 2020 S/S 컬렉션. 1970년대의 부르주아 스타일을 보헤미안 스타일과 믹스한 에디 슬리먼은 여자들이 당장 입고 싶어 할 지극히 실용적이고도 매력적인 컬렉션을 통해 셀린느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다졌다.

(시계방향으로)Sienna Miller, Jane Birkin, Kate Moss.

(시계방향으로)Sienna Miller, Jane Birkin, Kate Moss.


FROM THE RUNWAY
그렇다면 이번 시즌의 보헤미안 시크는 어떤 모습일까? 가장 먼저 보헤미안 시크의 귀환을 천명한 디자이너 셰미나 카말리의 끌로에는 1970년대에 유행한 시폰 러플 맥시 드레스를 메인 아이템으로 삼아 컬렉션을 전개했다. 우아한 동시에 관능적이며, 연약한 동시에 파워풀한 여성상을 그려내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컬렉션은 정교하고도 섬세한 수공예적 요소로 보헤미안 스타일을 재해석한 라반이다. 보헤미안 시크를 꾸준히 선보인 이자벨 마랑과 오랜만에 특유의 우아한 보헤미안 룩을 런웨이에 올린 랄프 로렌도 눈여겨봐야 할 컬렉션이다. “1970년대의 실루엣이 아니라 그 정신이 더 중요해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셰미나 카말리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진정한 의미는 눈에 보이는 패션이 아닌 정신적 가치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저는 사람들이 여유로움과 자유, 부드러움을 갈망하고 있다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은 197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죠.” 이제 더 이상 히피족처럼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보헤미안 룩을 입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과 가치를 느끼며 나를 위해 즐기면 될 뿐. 이번 시즌, 다시 돌아온 보헤미안 시크와 함께 자유와 낭만을 오롯이 느껴보도록!

Credit

  • Editor 이병호
  • Photo by IMAXtree.com/Getty images
  • Art designer 진남혁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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