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드라마, 영화, OTT 시리즈의 위기

극장은 망하고 넷플릭스만 본다고? 그것도 옛날 얘기다. 영화, 드라마, OTT 시리즈, 모두 일대 위기를 마주했다. 유튜브 쇼츠, 인스타 릴스가 뜨고 롱폼 콘텐츠가 지는 시대, 영상화된 긴 이야기엔 희망이 있을까?

프로필 by 이예지 2024.10.02
어디를 가나 앓는 소리다. 최근 만난 영화업계 종사자 상당수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콘텐츠 산업 지형도가 급변했고, 젊은 관객은 길이가 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으며, 극장 티켓값이 내릴 줄을 모르는 데다 볼만한 OTT 시리즈나 드라마도 없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모두 틀린 얘기는 아닌데 철마다 유행처럼 반복하는 레퍼토리라 그 심각함이 무뎌진 감도 있다.

이들의 말대로 지금 한국 콘텐츠 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앞을 내다보기가 힘들고 혼란스럽다. 우선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많이 줄었다. 지난 3년간 모두 ‘창고 영화’를 정리하고 있다. 대형 투자배급사에서 신규 영화 투자가 거의 멈췄다. 지난 30년 동안 영화 산업을 이끌어온 CJ ENM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를 제외하면 최근 새로 투자한 영화가 없다. 롯데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도 사정은 비슷하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와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가 적극적인데 그래봐야 네댓 편 정도다. 올해 영화 <원더랜드>를 배급했고, 영화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개봉을 준비하는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는 투자 배급 사업을 정리하고 콘텐츠를 기획·제작하는 스튜디오로 전환한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코로나19 이후의 CJ, 롯데, 쇼박스, NEW가 그랬듯이 수수료 매출액에 의존하는 투자 배급 사업에서 벗어나 IP를 기획·개발하고, 영화와 시리즈, 예능 등 콘텐츠를 제작하는 ‘IP 하우스’가 되겠다는 뜻이다.

내년 극장 개봉하는 한국 영화는 20편 안팎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이 “지난해와 올해도 힘들지만, 창고 영화가 사라지는 내년이 진짜 위기”라고 걱정하는 것도 그래서다.

영화인들은 감독이고, 작가고, 프로듀서고, 스태프고 할 것 없이 OTT 시리즈와 드라마 제작으로 눈을 돌린 지 오래다. 원래 드라마를 만들던 사람도, 영화를 하다가 넘어온 사람도 모두 드라마와 시리즈를 만드는 바람에 OTT의 투자를 받거나 방송사의 편성을 받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경쟁이 과열돼 편성되지 않았는데도 일단 만들고 본 작품만 100여 편에 이른다. 특히 드라마는 영화와 정산 방법이 달라 자금력이 약한 제작사는 편성될 때까지 버티기가 고단하다. 투자가 확정되면 제작진과 출연진에 계약금을 포함한 제작비가 입금되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방영이 끝난 후 정산한다. ‘묻지 마 만들고 보자‘인 셈이다.

장밋빛 미래를 장담하던 OTT도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한동안 ‘군웅할거’했던 국내 OTT 시장에서 벌인 제 살 깎아 먹기 식의 경쟁은 만성 적자로 이어졌다. 넷플릭스 또한 해마다 치솟는 제작비 때문에 출혈이 크다. ‘광고형 베이직 요금제’를 출시한 것도 둔화한 성장세를 만회하기 위한 목적이다. 올해 초 웨이브는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중단하며 드라마 <약한영웅 Class 1> <거래> 등을 제작했던 자회사 스튜디오 웨이브를 정리했다. LG와의 합병이 무산된 왓챠는 대대적인 인력 감축과 조직 개편을 통한 다이어트를 단행한 뒤 최근엔 제작비가 적게 들어가는 숏폼 드라마 콘텐츠 제작으로 눈을 돌렸다. 쿠팡 플레이와 티빙은 축구, 야구 등 스포츠 독점 중계권을 따내 구독자를 늘리는 전략으로 버티고 있다.

콘텐츠, 특히 영화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산업이다. 그럼에도 관객이 예전만큼 극장에 가지도 않고, OTT를 보지도 않는 주요한 이유는 볼만한 작품이 없어서다. 제작자 A씨는 “지금은 돈과 시간을 쓸 만큼 번뜩이는 작품을 극장에서도, OTT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말한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 대부분 유통기한이 지났고, OTT는 완성도가 높지 않아 3화까지 감상하는 게 쉽지 않은 작품이 많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볼만한 작품이 없다는 건, 재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급변하는 젊은 관객들의 취향에 조응하는 기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제작자 B씨는 “넷플릭스마저 과거 대기업이 양산했던 공장형 콘텐츠를 따라가고 있다. 신선한 기획이 돋보이는 작품이 많았던 한국 시장 진출 초창기와 비교하면 기획력도 만듦새도 아쉽다”라며 “최근 넷플릭스 라인업은 감상하고 나서도 뭘 봤는지 기억에 남지 않기까지 한다”고 지적했다.

볼만한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젠지 세대의 특성과 맞물려 더 부각된다. 지난 8월 28일 열린 2024 국제방송영상마켓(BCWW) 콘퍼런스에서는 ‘Gen Z 콘텐트 이용 트렌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많은 내용 중에서도 미래 콘텐츠의 주요 소비층인 Z세대(만 15~29세)가 시간을 받아들이는 개념이 여느 세대와 다른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발표에 따르면 Z세대는 초 단위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세대라 배속 시청과 스킵 시청은 기본이고, 콘텐츠를 이렇게 시청하는 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이유지만 지루함을 참지 못해서라는 답변이 다수라고 한다.
초 단위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지금 젊은 세대에게 2시간짜리 영화나 8~10부작으로 구성된 OTT 시리즈는 웬만큼 재미가 있지 않은 이상 지루하게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영화나 OTT 시리즈를 감상하려면 돈까지 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Z세대가 영화, 시리즈, 예능 등 콘텐츠를 고르는 눈높이는 다른 세대에 비해 더욱 높고 까다롭다. 감독, 작가, 프로듀서 등 콘텐츠 창작자들은 역사상 가장 까다로운 세대를 사로잡아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건데, 얼마나 머리가 복잡할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극장 영화 티켓값이 많이 올랐다. 좀 내려야 한다.” 한동안 화제가 됐던 최민식 배우의 이 말은, 영화가 전통적으로 ‘가성비’의 레저 활동이었음을 떠올려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때 영화는 다른 여가 생활에 비해 저렴해서 지난 30년 넘게 대중은 주말과 휴일에 극장을 즐겨 찾았다. 하지만 2020년 극장 산업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위축된 뒤로는 아트, 전시, 팝업 스토어, 뮤지컬, 클래식, 캠핑, 스포츠 등 다른 문화, 스포츠 산업이 몸집을 키웠다. 어쩌면 지금 영화는 대중 사이에서 더 이상 가성비의 레저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편, 천정부지로 치솟는 배우들의 몸값도 콘텐츠를 제작하는 데 걸림돌이다. 극장 개봉 영화도, OTT 시리즈도 수익성이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높아진 배우 개런티다. 한 매니지먼트사 대표 C씨는 “그러다 보니 요즘은 배우들도 산업의 어려운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다”며 “배우들 사이에서 좋은 작품이라면 자신의 개런티를 낮추는 대신 지분 참여를 통해 제작에 들어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됐다”라고 전했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현재 콘텐츠(영화, 드라마, OTT 시리즈) 산업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금의 위기는 언제든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올라간 영화 티켓값, 까다로워진 관객의 눈높이, 더욱 치열해진 투자 경쟁은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세대교체는 단순히 나이가 어린 창작자들로의 교체를 뜻하는 게 아니니 오해는 말자. 한 창투사 관계자 D씨는 “이름값으로 투자를 받는 시대는 지났다. 극장 산업이 위축되면서 한 방에 기대를 걸기 힘든 산업 상황이 됐다.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더라도 생존경쟁에서 도태된 창작자는 다음 기회를 받기 더 힘든 투자 상황이 됐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비단 감독, 작가, 프로듀서 등 창작자에게만 해당하는 허들이 아니다. 2020년 이후 더욱 ‘관료화’된 투자사나 OTT의 ‘관료화’된 투자 결정에도 포함된다. 생존경쟁에서 누가 살아남았는지, 아니면 누가 도태됐는지 얘기하지 않아도 이미 관객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대교체는 일찌감치 시작됐다.
무엇보다 제작 편수와 개봉 편수가 줄어들면서 배급 전략에 숨통이 트인 것도 그나마 건강한 신호다. 첫 주 관객 수가 저조하면 상영관의 상당수를 내줘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관객 반응만 좋다면 장기 상영도 노려볼 만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지난 7월 3일 극장 개봉했던 영화 <탈주>는 두 달이 지난 9월 초 지금도 일부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지난 8월 14일 개봉한 영화 <빅토리>는 4주 차에 접어들면서 박스오피스 역주행을 시작했다.
7월 31일 개봉했던 <파일럿> 또한 큰 예산이 투입된 영화는 아니지만, 관객의 호평을 등에 업고 무려 455만여 명(영화관 입장권통합 전산망 집계)을 동원하고 있다. 예전처럼 첫 주에 관객이 특정 영화를 보기 위해 몰리는 현상이나 흥행 기록 경신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영화만 좋다면 관객이 꾸준히 극장을 찾는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의 우려대로 콘텐츠 산업은 분위기가 썩 좋지 않다. 영화 산업은 위기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산업이 다시 ‘붐업’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몇 가지 근거를 보면 그럼에도 아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Writer 김성훈(<씨네21> 디지털콘텐츠 본부장)

Credit

  • Editor 이예지
  • Illustrator 유승보
  • Art designer 김지원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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