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생각이나 감정 없이 그저 즐겨 입어온 보머 재킷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때가 있다.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함께 포토월에 선 모습을 보고 나서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포토월에 선 여배우가 드레스 위에 보머 재킷을 입은 모습을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그리고 한국으로 금의환향할 때도 데님 팬츠와 함께 보머 재킷을 입은 윤여정은 정말 쿨하고 힙하며 스타일리시하고 무심해 보였다. 이것이 바로 보머 재킷이 가진 이미지와 에너지다. 오늘날 스트리트 패션을 상징하는 대표적 아이템이 된 보머 재킷은 본래 군복이었다. 1930년대 초반 미 육군 항공대가 조종사를 위한 유니폼으로 처음 만들어 플라이트 재킷, 에이비에이터 재킷, 항공 점퍼로도 불린다. 처음엔 짙은 브라운 컬러의 가죽 소재로 제작했는데,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소매 끝단과 재킷 밑단에 밴드 디테일이 더해졌다. 이후 편리성을 위해 코튼과 나일론 소재가 이용되며 ‘보머 재킷’ 하면 떠오르는 여러 형태가 생겨났다(A-2 재킷, MA-1 재킷 등으로 불리는). 1950년대 후반 들어선 군용품을 민간인들도 입을 수 있게 됐고, 노동자층이 보머 재킷을 작업복으로 입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후반엔 펑크족이 즐겨 입으며 보머 재킷은 젊음과 반항, 하위문화를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또 1986년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가 보머 재킷의 원형인 A-2 재킷을 입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하이패션 신엔 언제, 어떻게 입성하게 된 걸까?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 ‘프랑스 패션계의 악동’이라 불리며 문제적 천재로 이름을 날린 장 폴 고티에에 의해서다. 런던을 흠모한 파리지앵이었던 그는 거리의 문화를 오트 쿠튀르 런웨이에 적극적으로 올린 디자이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보머 재킷이다. 펑크족이 즐겨 입던 보머 재킷을 모티브로 한 아우터를 1988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 선보였다. 보머 재킷의 또 다른 기념비적 컬렉션은 바로 라프 시몬스의 2001 F/W 컬렉션이다. 군부대를 지키는 경비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밀리터리 룩에서 영감을 받아 보머 재킷을 오버사이즈로 디자인해 존재감 넘치는 키 피스로 재해석했다. 이 컬렉션의 보머 재킷들은 지금 수천만원을 호가한다고! 이후 여러 디자이너가 보머 재킷을 꾸준히 런웨이에 올렸다. 개인 레이블은 물론 미우치아 프라다와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프라다 컬렉션에서도 보머 재킷을 즐겨 디자인하는 라프 시몬스, 생 로랑과 셀린느까지 옮기는 메종마다 보머 재킷을 주요 아이템으로 선보이는 에디 슬리먼, 발렌시아가와 베트멍(지금은 디자인하지 않지만!)의 뎀나 바잘리아,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까지 하위문화를 사랑하는 디자이너들은 모두 보머 재킷을 애정한다. 그렇다면 패션 아이콘은 누가 있을까? 1954년 한국을 방문해 미군들을 위로한 마릴린 먼로가 입은 가죽 보머 재킷은 아이코닉한 피스로 남았고, 영화 <레옹>에서 카키 컬러의 보머 재킷을 입은 나탈리 포트먼, 리얼웨이에서 보머 재킷을 매력적으로 입은 케이트 모스와 에마뉘엘 알트 그리고 우리의 윤여정이 있다.
가죽, 나일론과 같은 아이코닉 소재부터 실크, 울, 퍼 같은 하이엔드적 소재까지, 이번 시즌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 다채로운 디자인의 보머 재킷들이 런웨이를 가득 채웠다. 에디터의 마음에 가장 쏙 든 보머 재킷은 바로 꾸레쥬의 디자인. 기본적인 보머 재킷의 구성 요소는 그대로 유지한 채 실루엣과 디테일에 감각적인 변화를 주어 완전히 새로워 보이는 뉴 디자인을 창조해냈다. 게다가 슬리브에 트임을 주어 케이프로도 연출 가능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시몬 로샤 또한 이번 시즌의 보머 재킷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컬렉션이다. 퍼프 슬리브와 뷔스티에 디테일, 비즈 장식으로 디자이너 특유의 로맨티시즘을 불어넣어 유니크한 피스로 재해석했다. 보머 재킷의 완벽한 신분 상승이라 할 만하다. 서정적인 플로럴 패턴을 프린트한 실크 패브릭을 소재로 선택한 패션계의 서정 시인 드리스 반 노튼, 1980년대풍의 파워 숄더를 장착한 케이트의 디자인 또한 인상적. 시어링과 공예 미술적인 패치워크가 더해진 레더 소재로 고급스럽고도 우아한 디자인을 선보인 끌로에와 크롭트로 길이를 변형한 토즈의 재킷은 시크하고도 우아한 룩을 즐기는 레이디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키치한 패치워크로 팝한 분위기를 더한 팜 엔젤스와 MM6의 디자인은 보머 재킷 특유의 캐주얼함을 잘 살린 피스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디자인적 재해석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스타일링으로 보머 재킷을 새롭게 업데이트하고자 한 디자이너들도 대거 존재한다. 절제된 디테일로 보머 재킷을 모던하게 재해석한 유돈초이는 동일한 소재의 스커트를 매치해 마치 슈트처럼 보이는 셋업 피스를 제안했다. 슈트 위에 오버사이즈 보머 재킷을 툭 걸친 스테인과 더불어 오피스 우먼들이 참고하면 좋을 듯.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또한 유돈초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보머 재킷을 디자인했는데, 우아한 풀 스커트를 가죽과 울 소재의 보머 재킷과 매치해 1950년대의 여성 조종사들이 즐겼을 듯한 클래식 레이디 룩을 완성했다. 드레시한 아이템과의 믹스매치를 즐긴 디자이너들도 있다. 시폰 소재의 프린지 스커트에 빈티지 무드의 보머 재킷을 매치해 파워풀하고 관능적인 드레싱을 선보인 블루마린, 롱 드레스와 롱 글러브를 매치한 헤론 프레스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우리는 보머 재킷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헤일리 비버와 알렉사 청처럼 데님 팬츠와 매치해 캐주얼하게 즐기는 것이다. 알렉사 청의 경우 나일론이 아닌 실크 소재의 보머 재킷을 선택해 좀 더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아한 아이템과 믹스매치하는 것 또한 보머 재킷을 즐기는 세련된 드레싱 중 하나다. 매니시하고 캐주얼한 디자인이니 대척점에 있는 우아한 아이템을 섞는 것이다. 브라톱과 플리츠스커트를 매치한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와 머메이드 실루엣의 스커트를 매치한 아멜리아 햄린, 레이스 장식의 캐미솔을 매치한 카미유 샤리에르처럼 말이다. 수주처럼 블랙 컬러나 레더 아이템과 매치해 룩을 더욱 강렬한 스트리트 감성으로 연출하는 것 또한 파워풀한 보머 룩을 즐기는 훌륭한 방법이다.
셀렙들의 룩에서도 알 수 있듯 보머 재킷은 실로 다양한 믹스매치 스타일로 연출할 수 있다. 우아한 풀 스커트부터 모던한 슬랙스, 카리스마 넘치는 레더 팬츠, 캐주얼한 매력의 데님 팬츠, 레이스 장식의 슬립까지 한계란 없다. 또한, 보머 재킷 룩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애티튜드다. 젊음과 하위문화, 힙한 패션을 상징하는 아이템인 만큼 무심한 듯 세련된 애티튜드를 견지하는 것이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