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관없어요, 이젠. 그런 거에서 벗어난 것 같아요.
얼마 전 예능 〈온앤오프〉에 출연해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따라갔다면 지금의 엄정화가 없었을 거라 얘기했어요. 엄정화의 존재가 여성들에겐 참 소중해요.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기도 하잖아요. 영화 〈관능의 법칙〉에서는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여성들이 갱년기를 걱정해요. 지금 보면 그걸 걱정하긴 다들 너무 이른 나이죠.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고민의 범위를 넓혀주고 싶어요.
〈온앤오프〉에서 킥복싱하는 모습도 공개했죠. 이번에 주인공 ‘미영’ 역으로 출연하는 영화 〈오케이 마담〉이 반가웠던 건 액션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인가요?
액션 연기 자체에 욕심이 났다기보다, 잘 주어지지 않는 기회니까요. 그게 반가웠죠. 킥복싱은 요즘 들어 새로운 유산소운동을 해볼까 싶어 다시 시작했어요. 반려견 슈퍼랑 하루 40분 이상 산책하지만 달리기나 걷기는 너무 지겨워서요. 전작인 〈미쓰 와이프〉 초반에 짧은 액션 신이 있었는데, 그걸 연습하면서 마음이 잘 맞는 코치를 만났거든요.
영화 전반에 흐르는 ‘레트로’ 무드가 엄정화와 잘 어울려요. 연기할 땐 어떤 스타일인가요?
쥐어짜거나 오버하지 않고, 인물이 느끼는 감정 안에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렇게 연기할 때 가장 성취감을 느껴요. 〈오로라 공주〉나 〈베스트셀러〉 때는 극한으로 느끼고 싶었어요. 무거운 감정 안에 오래 머무르곤 했죠. 〈오케이 마담〉에서는 코믹 신이 어려웠어요. 가짜 웃음은 금방 티가 나니까요. 제가 연기 방법을 잘 몰라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럴 리가요. 엄정화는 연기와 음악 2가지 분야에서 동시에 성취를 이룬 대표적인 모델이잖아요. 배우가 본질이고, 표현력이 좋은 사람이기에 가수로서 더 성공한 건 아닐까 싶어요.
1993년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가 첫 주연작인데, 실은 출연이 결정되기 전에 OST ‘눈동자’를 녹음하고 있었어요. 그때 영화음악을 맡았던 신해철 씨가 저를 합창단 시절부터 눈여겨봤다고 하는 거예요. 제 눈이 너무 느낌 있다면서요. “그 눈으로 사람들을 다 흡수한다는 느낌으로 불러줘”라고 주문했어요. 나중에서야 출연을 제의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맡은 역할이 가수를 꿈꾸는 연예인 지망생이었죠. 배우와 가수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 따지자면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연기를 하는 게 무대에서 표현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다는 거죠.
엄정화가 무대에 서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요.
정말 많은 사람이 그래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저야 물론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고 싶죠. 제가 얼마나 아끼는 일인데요.
춤, 노래, 연기 중 하나만 고른다면 뭐예요?
굳이 고른다면 연기예요. 연기 안에 다 들어 있으니까요. 무대에 서는 건 노래가 가진 이야기를 표현하는 거고요.
여전히 ‘한국의 마돈나’라는 별명이 따라붙어요.
제가 마돈나의 굉장한 팬이잖아요. 처음에는 그 별명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한국은 미국만큼 시장이 넓지도 않고, 좋은 무대를 가질 기회도 훨씬 적죠. 그럼에도 ‘한국의 마돈나’라는 별명이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이제 별명은 그만 붙였으면 좋겠어요. 이만큼 했으면 그냥 ‘엄정화’죠.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배역에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하나요?
알게 모르게 ‘가수 겸 배우’로 분류된달까요. 그래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게 기회가 주어지는 배역이 한정적이라 느낄 때도 있지만, 무대에서 마음껏 노래하고 표현하는 자유를 놓고 싶진 않아요. 그냥 최선을 다해 양쪽 다 열심히 하면 했지. 지금 내가 무대에서 ‘이런’ 이미지를 보여주면 당분간 배우로서 ‘저런’ 역할을 해볼 기회는 오기 힘들지 않을까란 걱정은 안 해요. 안 오면 말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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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엔 늘 고민이 많았어요. 1집을 낸 뒤 2집 내기 전까지, 20대 중반에는 슬럼프도 겪었고요. ‘나는 여기서 끝나나?’, ‘나는 왜 남들처럼 빨리 가지 못하지?’, ‘28살엔 결혼을 해야 하나?’ 매 순간이 너무 벅찼어요. 20대 후반에 너무나 큰 인기를 얻었고, 30살에 정점을 찍었죠. 앨범만 내면 1등 하고, 무대 올라가면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도 늘 불안했어요. 그때는 31살짜리 댄스 가수가 없었으니까요. 억울한 게, 저는 어딜 가나 늘 언니였고 선배였어요. 20대 내내 ‘나 늙었다’라는 생각만 했죠. 시한부 인생 같았어요. 배우로선 안 그랬겠어요? 제가 28살 때 주변 여자 선배 중에 35살 넘어서까지 활동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항상 벼랑 끝에 서서 앞을 개척해가며 살아왔죠.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첫 시도와 끝마무리 중 어느 쪽을 더 어려워하는 편인가요?
저는 항상 시작할 마음이 돼 있는데 사람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참 힘들었어요. 〈미쓰 와이프〉 이후 5년간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죠. 그런데 지금은 또 새롭고 희망적이에요. 늘 기다려져요.
엄정화라는 사람이 가지는 에너지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순수하게 이 일을 즐기는 마음이 변하지 않으니까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어요. 현장에 있을 때 행복하고, 일할 때 피곤하지가 않아요.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가 좋고요.
유튜브에서 1998년에 방영된 〈스타다큐〉 엄정화 편을 봤는데, 최근 예능에서 보여준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놀랐어요.
〈스타다큐〉! 저도 봤어요. 얼마 전에 누가 링크를 보내줬거든요. 28살 엄정화가 침대에 앉아 애교 부리며 말하는 투를 듣고 있으니까 ‘미쳤네!’ 싶은 거예요. 하하. 너무 부끄러웠어요. 이제 정말 러블리한 거 그만하고 싶거든요. 꼴 보기 싫을 거 아니에요, 여자가 이 나이에.
나이 들면 묵직하고 차분해져야 한다는 것도 고정관념이죠.
사람들 웃기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특히 예능 나가서 못 웃기면 저는 그게 그렇게 슬프더라고요.
웃길 필요가 있어요? 엄정화가 나오면 그만인데. 〈놀면 뭐하니?〉의 환불원정대도 엄청난 화제예요.
너무 기대돼요. 제가 이번 기회 아니면 언제 또 그룹 활동을 해보겠어요?
지금 엄정화는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나요?
그동안 뭔가 채워지지 않은 채 계속 이다음, 그다음, 더 좋은 게 있을 거란 마음으로 살았어요. 스스로를 괴롭히고 몰아세웠죠. 그게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미안해요. 상투적인 말이지만, 자꾸 밖에서 뭔가를 찾으려 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서핑을 떠나는 길도 재미있고 요가하러 가는 길도 너무 좋아요. 복싱을 하러 나가는 내가 멋있고, 슈퍼를 예뻐하는 내 모습이 사랑스러워요. 이런 게 나이가 주는 여유일까요?
정원에서 블루베리도 키우죠?
정말 신기한 게 익기만 하면 새들이 와서 마지막 한 알까지 다 가져가요. 그게 너무 웃기고 귀여워요. 어떻게 알고 날아와서 이걸 먹을까요? 새를 먹이는 여자가 됐죠 뭐.
새도 먹이고 슈퍼도 먹이고, 스스로에겐 꿈을 먹이는 사람 같아요. 지금의 엄정화가 20대의 엄정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너무 괜찮아.” “적어도 나이 걱정은 하지 마.” 저는 제가 나이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계속하잖아요. 여자로서요? 여자로서도 너무 괜찮아요.
그럼 지금을 살아가는 2030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요?
스스로를 멋지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젊음 하나로도 너무 예쁘니까요. 근데, 지금의 저도 예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