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앗, 제가 시작부터 헛다리를….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 〈인간실격〉 분위기가 좀 무거워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나 봐요. 음, 연기하는 인물에 따라 마음이 가라앉을 때도 있고, 애써 텐션을 올릴 때도 있긴 해요. 그렇다고 막 역할에 과몰입해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런 타입은 아니에요.(웃음)
드라마 보는데 전반적인 룩에서 ‘강재’라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느껴지더라고요. 겉보기엔 모델처럼 멋있지만 동시에 청춘의 한복판에 있는 남자 특유의 어리숙함도 엿보이고요. 패션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걸로 아는데, 인물의 룩을 정하는 과정에 직접 관여했나요? 그렇잖아도 작품 들어가기 전에 스타일리스트랑 대화를 많이 했어요.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고 우리는 우리 거 하자’는 마음으로 준비했죠. 기존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배우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포인트여서, 머리도 일부러 길렀고요.
아직 2화까지밖에 못 봤지만 두 화만 봐도 요즘 드라마와 다른 노선을 걷는 작품이라는 걸 알겠더군요. 이야기의 리듬이 아주 섬세하게 조율돼 있고 내레이션도 굉장히 문학적이에요. 정확히 보셨네요. 저도 처음 대본 봤을 때 문학 작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고요. 다행히 허진호 감독님이 이런 면에서 워낙 탁월하신 분이라, 어려운 점은 함께 대화로 풀어가면서 즐겁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재킷 1백만원대, 베스트 30만원대, 셔츠 17만원대, 팬츠 21만원대, 타이 17만원대, 볼캡 8만원대 모두 폴로 랄프 로렌.
허진호와 전도연, 저는 이 조합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한국 영화 키드인데요, 1986년생 배우인 준열 씨에게는 그 존재가 더 크게 다가왔을 것 같아요. 처음 출연 제안을 받고 전도연 선배의 작품을 옛날 것부터 최근 것까지 쭉 살펴봤어요.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탄탄하게 이력을 쌓아온 배우와 작업을 하는구나’, ‘나는 지금 서른여섯인데 선배는 그 나이에 어땠지’ 그런 것들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허 감독님 영화야 워낙 전부터 좋아했던 터고요.
연기를 하다 보면 상대 배우의 움직임이나 눈빛에 저도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되잖아요. 버스에서 두 사람이 스카프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는데, 도연 씨의 연기에 준열 씨가 즉흥적으로 반응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서로 합을 맞추고 연기해야 좋은 장면이 나올 때가 있고 반대로 서로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좋은 장면이 나올 때가 있는데요, 도연 선배와는 후자일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함께 연기하다가 저도 모르게 선배의 연기를 관람하게 되는 순간도 있었고요. 두 배우가 합을 맞추다 보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이 많은데, 도연 선배는 워낙 눈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배우잖아요. 그때마다 좀 홀린다고 해야 하나? 제 대사를 놓칠 때도 있고, 원래 계획했던 연기 방향을 바꿀 때도 있었죠. 저도 모르게 관객이 돼 선배의 연기를 감상하는 거죠.(웃음) 그런 점이 재미있었어요.
2화에서 ‘부정’과 ‘강재’, 두 남녀의 인생이 착착 교차되다가 비로소 포개지는 장면이 엔딩이었어요. 두 인물이 앞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점점 더 알아보겠구나, 근데 이 관계가 과연 로맨스로 이어질 수 있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둘의 관계가 로맨스냐 아니냐는 연기한 저조차 얘기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이는 로맨스라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정이나 동질감, 교감 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요.

코트 1백만원대, 스웨터 30만원대, 셔츠 17만원대, 팬츠 19만원대 모두 폴로 랄프 로렌.
실제로 데뷔 전까지 안 해본 알바가 없다고 들었어요. 피자 배달, 고깃집 서빙, 편의점 알바까지…. 이런 경험이 인물 해석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네. 도움 많이 돼죠. 전혀 모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제가 아는 세계를 표현하는 게 더 수월하니까요. 알바하던 시절 갖고 있던 고민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던 당시의 불안감이 ‘강재’가 처한 상황과 일정 부분 통하기도 하고요.
실제로 배우들을 인터뷰해보면 캐릭터를 분석할 때 과거 자신이 겪었던 경험이나 감정에서 실마리를 찾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 작품을 선택한 큰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예요. 제가 ‘강재’와 같은 시기를 통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그 시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서요. 그런 의미에서 ‘강재’를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로서 지금 내 상태와 비슷한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건 보기 드문 행운이니까요.
공백기 동안 미국에서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평소 찍은 사진을 모아 전시를 열기도 했죠. 배우 류준열을 잠시 벗어나 인간 류준열을 찾아가는 시간이었을까요? 과거의 시간에 대해서라면 매번 생각이 달라지는 편인데요, 일에 지쳐 충전하는 개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그때 재미있는 일을 찾아 몰두하는 타입이라서요. 다만 이런 생각은 자주 해요. ‘아, 그때 내가 왜 그러고 있었지. 다시 돌아간다면 그 시간에 딴 걸 할 텐데….’(웃음) 물론 사진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요. 사진은 지금도 꾸준히 찍고 있어요. 카메라를 너무 오래 멀리하면 감을 잃어버릴 수 있어서요.

재킷 60만원대, 스웨트셔츠 19만원대, 팬츠 30만원대, 볼캡 8만원대, 벨트 가격미정, 양말 가격미정, 스니커즈 9만원대 모두 폴로 랄프 로렌.
꾸준히 일기를 쓴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계속 쓰고 있나요? 그럼요. 요즘은 평소보다 더 쓰는 것 같아요.
주로 어떤 문체로 쓰는지요? 문체요? 어, 이건 예상치 못한 질문인데….(웃음) 문체 생각하면 너무 창피해서…. 그거 아세요? 그날 읽은 책이 문체에 영향을 주는 거요. 막 따라 쓰게 되고.
그럼요, 알죠. 기사 쓸 때도 그런걸요. 그쵸. 저만 그런 거 아니죠. 그날 읽은 책에 따라 문체가 매번 달라지다 보니 어떤 날은 일기가 소설이 되고 수필이 됐다가 또 산문이 되고 그래요. 그래서 절대로 저만 봐야 해요.
인터뷰 준비하다 놀란 게, 데뷔가 2015년이더라고요. 아직 10년 차도 안 됐다는 게 좀 의외였어요. 체감상 10년은 된 것 같았거든요. 10년이요? 저 데뷔한 지 6년밖에 안 됐는데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그만큼 완연하게 성숙한 배우의 이미지가 있다는 뜻 아닐까요? 뭐랄까, 성공한 대배우의 느낌? 농담이에요.(웃음) 그렇게 보인다니 저한텐 칭찬이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