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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뭐냐면, 친오빠 골드부다와 국내 최초 힙합 친남매 듀오로 데뷔한 릴체리예요. 어릴 때 마이애미에서 자라면서 들은 마이애미 사운드를 베이스로 그 위에 저희만의 ‘소스’를 얹은 음악을 만들고 있고요. 저희 팀의 연구자인 오빠가 트렌디한 사운드와 플로를 만들어내면, 저는 그 위에서 눈을 감고 자유롭게 막 휘저으며 표현하는 역할을 해요. 그런 ‘Controlled Chaos(질서가 있는 혼돈)’가 저희 모토예요.
우리만의 ‘색깔’도 아닌 ‘소스’라는 표현이 신선하네요.
마이애미에 살 때 주변에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아시아라면 중국이나 일본만 알고, 한국에 대해 알더라도 꼭 “North or South?”라고 물어보던 시절이었거든요. 된장과 김치 냄새에 대한 안 좋은 인식도 있다 보니, 무의식 속에 한국 소스나 우리나라 음식을 긍정적으로 반전시켜 ‘이건 정말 맛있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음악도 마찬가지고요. 힙합은 주로 ‘플렉스’를 얘기하는데, 힙합이 늘 해왔던 문법 대신 저희만의 ‘소스’를 보여주는 메타포를 앨범 전체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릴체리 하면 주문을 외는 듯한 독특한 래핑부터 떠올라요. 그냥 옹알거리는 줄 알고 방심하는 사이 중독됐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최근엔 ‘흑마법을 배운 다크 손연재’라는 별명도 얻었어요.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어요. 제 전공이 ‘시’인데, 시에선 단어의 의미뿐 아니라 그 단어가 발음되는 소리도 중요하거든요. 수업 시간에 모르는 언어로 쓰인 시를 그냥 읽고 느끼는 연습도 하고 그랬어요. 사랑 얘기할 때 S, L, D처럼 부드러운 소리를 사용하고 K, S, F 같은 강한 소리는 잘 안 쓰는 식이죠. 제 가사가 대충 쓴 거 같아도 그런 계산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기 때문에 리스너에게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지 않나 싶어요.
아직 영어보다 한국어 어휘가 약하잖아요. 한국어 단어 중 뜻은 잘 모르지만 소리가 좋아서 가사에 쓰고 싶었던 단어가 있나요?
한국어 대화체를 가사에 많이 넣곤 해요. ‘아~ 그래?’, ‘내가 그랬다고?’ ‘아이참’ 같은 말이요. 우리가 매일 듣는 일상의 사운드를 음악 속에서 리듬처럼 들으면 신선하고 ‘프렌들리’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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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 오빠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 힙합을 많이 듣기도 했지만, 제가 자주 찾아 들었던 음악은 K팝과 발라드였어요. 소녀시대 언니들뿐 아니라 채연 언니도 좋아해 ‘둘이서’의 “난난나나나나!”를 매일 따라 부르고,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한정판 굿즈 인형도 샀어요. 소녀시대 언니나 채연 언니가 컴백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음악에 참여하고 싶어요.
태연 씨가 SNS로 릴체리의 〈G!〉를 인증했으니, 이미 성덕이 됐네요. 한국 문화를 자주 접하지 않고 사는 교포도 많은데, 유년 시절 릴체리에게 K팝은 찾아 들을 만큼 중요한 존재였나 봐요.
꿈을 버릴 줄도 알아야 된다는 걸 초등학교 때 K팝에서 배웠어요. 전 정말 진심으로 소녀시대 열 번째 멤버가 되고 싶었는데, 말도 안 되는 꿈이라 생각하고 포기했거든요.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는 꽤 현실적인 아이였나 봐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어떻게든 돌고 돌아 음악을 만들고 있네요. 결국 음악이 “꿈은 어차피 찾아가게 된다”라는 메시지를 제게 가르쳐준 셈이에요.
팝스타는 많은 팬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죠. 그런데 과거에 매스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여성상은 지금보다 더 폭력적이었어요. 어른이 된 이후의 관점으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여성 팝스타의 모습을 다시 보면, 굉장히 성적으로 대상화된 형태였다는 걸 깨닫기도 해요.
저희가 앤드로지너스 룩을 자주 입거든요. 요즘은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경계가 점점 더 없어지고 있고, 더 흐릿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다 오빠와 저만 해도 네일 디자인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오빠의 스타일링에 대해 하이힐 신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도 제안해요. 저희는 앞으로 성별 고정관념을 벗어난 아트를 많이 제작하려 해요. 릴체리와 골드부다의 음악과 비주얼에서도 그런 흔적이 더 많아질 거고요.
음악도 잘하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독특한 스타일도 릴체리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여성 아티스트로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없어요?
제 체형을 굳이 묘사하자면 슬림한 젓가락 타입이에요. 다른 여성 아티스트 친구들과 팝스타 중에 저 같은 젓가락 체형이 누가 있는가를 주제로 대화한 적이 있는데 거의 없더라고요. 우리 몸은 생김새가 모두 다르잖아요. 팝스타라면 근육이 많고 섹시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현실에는 저와 비슷한 체형을 지닌 사람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팝스타 하면 떠오르는 체형과 다르더라도, 저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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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엄마 꿈이 패션 쪽이었는데, 작곡을 전공해 꿈을 이루지 못했대요. 오빠와 제가 음악을 시작하면서 비주얼적인 부분에서 협업하고 있어요. 음악적으로도 항상 현실적인 조언을 주시기 때문에, 음원 초안을 들려드리면 비주얼적인 스토리텔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져요. 커스텀 손톱, 커스텀 마스크 등 사람들이 저희 뮤직비디오를 본 뒤 기억에 남는다고 말해주는 디테일은 대부분 엄마 손을 거쳤어요. 얀투고라는 닉네임은 부다 오빠가 지었는데, 실을 뜻하는 ‘yarn’과 테이크아웃 개념의 ‘to go’를 합친 이름이에요. 엄마 주특기가 바느질이라 종종 워크숍 수업도 하시거든요. 오늘 신은 꽃 장식 니삭스도 엄마의 작품이에요. 집에서 나오기 직전에 엄마가 시판 양말에 꽃 비즈를 달아주셨어요. 우리 집엔 항상 “드드드” 재봉틀 소리가 나요.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의 첫 스타일리스트는 엄마잖아요. 보통 자아가 생기면서 패션 독립을 하기 마련인데, 릴체리는 본격적으로 엄마에게 스타일을 위임하고 있어요.
저도 어렸을 때는 엄마랑 싸우는 이유가 다 교회 갈 때 입는 옷 때문이었어요. 사춘기라 한창 고집 셀 때는 엄마 말을 안 듣고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은 적도 있어요. 근데 케첩 묻은 헬로키티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진 속 제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어!’ 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아요. 이젠 엄마 없이는 옷을 못 입겠어요.
한 인터뷰에서 없으면 안 되는 물건으로 비타민을 꼽았더라고요. 릴체리 의외로 몸 잘 챙기네 싶었죠. 주변에서 ‘막 살 것 같다’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던데, 그 밖에 릴체리가 가진 의외의 면이 있다면요?
음악이 파티 사운드 같아서 그런지, 외향적으로 보인다는데 전혀 아니에요. 심지어 어릴 때는 너무 내향적이라 엄마, 아빠, 오빠 말고는 사람들이랑 눈도 못 마주치고, 쳐다보기만 해도 울었대요. 이런 성격을 바꾸기 위해 엄마가 중학교 여름방학에 댄스 캠프를 보내주셨어요. 춤·연기·댄스·그림·공연 수업을 하면서 표현력을 키우며 노는 캠프였는데, 남 앞에서 뭔가를 표현해보면서 천천히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감정을 표현하는 재미를 알게 되니까, 고등학교 때 한국으로 다시 이사 와서는 학교 뮤지컬 오디션도 봤죠. 제일 작은 배역에 지원했는데, 다음 날 감독님이 주인공을 맡아보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처음엔 너무 부담스러워 생각해보고 내일 알려드리겠다고 했는데, 오빠가 “고민할 게 뭐 있냐, 당연히 해야지”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무대의 매력을 느끼고, 학교 치어리딩도 할 만큼 성격이 확 바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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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일을 할 땐 정말 즐기지만, 제 일상은 완전 집순이예요. 글 쓰기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굉장히 많이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뮤지션 일을 하려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하고, 공연장이나 촬영장에서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잖아요. 그런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오늘 코스모 유튜브 라이브 영상을 위해 ‘먹방’을 불렀어요. K-먹방처럼 세계적인 현상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한국 문화가 있다면요?
유치원 때 친구들 사이에서 제가 스티커 클럽 회장이었거든요. 매일 문방구에 가서 스티커를 사고 친구들과 서로 교환하던 게 굉장히 소중한 기억 중 하나예요. 그런 스티커 클럽을 또 열고 싶어요. 미국에 바비가 있으면 한국엔 미미가 있듯, 한국 문방구에만 있는, 조금은 조악한 그 비주얼과 미학이 좋아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음악과 비주얼 모두,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릴체리 진짜 ‘미쳤다’….
살짝 미친 건 맞아요. 하하. 저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예전에 만들었던 곡을 들으면서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오빠와 내가 만든 건 확실한데, 이 지구에 이미 아름다운 멜로디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노래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 굉장히 신기한 매력을 느껴요.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이 내 음악과 맞아떨어져서 표현되고, 그걸 팬들과 같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정답은 이미 네 안에 있다, 밖에서 너무 찾아 다닐 필요 없다”라는 메시지도 담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