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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덕후는 커서 문구인이 됩니다

요즘 덕후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행위로 자신의 새 아이덴티티를 찾고 인생의 새 장을 연다. 유쾌하게, 똑똑하게, 간절하게 자기가 꽂힌 것에 인생을 던진 사람들을 만났다.

BYCOSMOPOLITAN2021.01.12
 
니트 가격미정 아치더. 데님 팬츠 19만9천원 그레이양. 부츠 38만9천원 문선. 모자 가격미정 스포츠&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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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가 좋아 그 얘길 〈아무튼, 문구〉 〈문구인 일지〉라는 책으로 펴냈다. 혼자선 〈규림 문방구〉 〈2020 규림일기〉라는 전시를 기획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는 ‘두낫띵클럽’을 만들어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문방구 주인이 되는 게 꿈이다.
 
왜 ‘문구’에 꽂혔나요? 제가 도구의 힘을 되게 많이 믿는 사람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빨간 펜엔 이런 의미, 보라색 펜엔 저런 의미를 부여하며 썼죠. 선생님이 시험에 나올 것 같다고 하면 꼭 이 색 펜으로 표시하는 식으로요. 물건마다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저한테 되게 소중한 게 됐어요. 
 
좋아하는 것과 ‘덕질’하는 것은 좀 달라요. 둘 사이의 경계를 넘었다고 생각한 순간은 언제예요? 저는 2017년에 스스로 선언을 했어요. “나는 문구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 사실 저는 ‘다들 문구를 이 정도 좋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배민’에서 문구를 기획하는 일을 했지만 그냥 업이라고 생각했죠. 어느 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다 무언가의 ‘덕후’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 대상이 있다는 게, 거기에 대해 뭐든 척척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멋져 보였어요.
‘난 왜 그런 게 없지? 저 정도 깊이가 없어서 그런가? 그런데 깊이는 누가 부여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크게 외치자. 나 문구 엄청 좋아해!’ 그렇게 ‘문구 덕후’라는 세계를 선점한 거죠. 
 
그렇게 선언한 후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소문이 났죠. 측근들만 아는 제 취향을 모르던 사람, SNS에서 저를 팔로하는 사람, 친구의 친구들이 알게 되면서 여기저기서 뭘 많이 주는 거예요. 여행 가서 선물로 신기한 연필을 사 오기도 하고, 문구 관련 행사나 소식이 있으면 빠르게 전해주고. 그래서 좋았어요. 
 
문구에 이 정도로 진심이다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여행 갈 때 ‘문구점’을 기준으로 동선을 짜요. 뉴욕처럼 먼 데 갈 땐 문구 살 예산을 많이 잡고, 가방도 비워서 가고요. 하하. 최근엔 문구 여행을 다녀왔어요. 일주일 동안 전국을 돌면서 초등학교 앞 문방구를 순회했죠. 그런 곳들은 지도에 등록이 안 돼 있거든요. 그래서 학교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그 앞에 있는 문방구를 찾아다녔죠. 남해, 삼천포 같은 곳엔 오래된 문방구가 많아요. 
 
최근 들어 뻔뻔한 게 너무 좋아졌어요. 그게 용기거든요. 
 
지금까지 가본 문방구를 세본 적 있어요? 세어보진 않아 잘 모르겠어요. 당연히 넘지 않을까요?
 
‘덕질’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필요한 건 뭐라고 생각해요? 뻔뻔함? 하하. 최근 들어 뻔뻔한 게 너무 좋아졌어요. 그게 용기거든요. 얼마 전에 선물을 받았는데, 그냥 A4 용지를 스케줄러로 만든 거였어요. 누군가는 ‘이런 평범한 프린트물이 무슨 문구야? 이런 걸 왜 팔아?’ 할 수도 있지만 저는 너무 흥미롭더라고요. 그런 자신감이 필요해요. 
 
문구 덕질로 돈을 벌기도 했나요? 제가 필요해서 만든 문구들이 있어요. 최소 제작 수량이 1천 개 이상이라 다 쓸 수가 없어 판매하기도 하는데, 그게 좀 잘 팔리더라고요. 하하. 하루이틀 만에 1천 권이 넘게 팔렸어요. 지금까지 4천~5천 권은 판 것 같아요. 
 
덕후들은 종종 잔소리, 참견을 듣기도 하잖아요. “좋아하는 건 일과 분리해야 한다”, “왜 돈과 시간을 낭비하냐” 등등. 비슷한 경험이 있나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어요.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제 삶을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확신이 있거든요. 좋아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삶을 지탱하는 느낌?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은… 뭐 어쩔 수 없죠. 
 
문구로 별일을 다 벌였잖아요. 책도 내고, 전시도 하고, 직접 만들어 팔기도 하고. 2021년에는 무슨 계획이 있어요? 요즘 오래된 것에 관심이 많아요. 빛을 잃어가는 것들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해보려고요. 아까 이야기한 삼천포의 작은 문방구에서 발견한 것들이 너무 좋았거든요. 60~70년 동안 한 제품만 만들어온 브랜드, 옛날에만 썼던 문구 등, 그런 물건에 숨은 이야기를 캐는 일을 해볼 거예요. 
 
좋아하는 것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해줄 얘기가 있다면? 뻔뻔하게 좋아한다고 말하세요. 티를 많이 내세요. 그러면 기회가, 좋은 일이 찾아오더라고요. 자신이 선명해지는 느낌도 받을 수 있고요. 덕질은 좋은 거예요. 뭘 좋아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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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하예진/류진(프리랜서)
  • Art Designer 오신혜
  • Photo by 채대한
  • 기사등록 온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