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티드 라이벌리'부터 '진정령'까지, 여자들이 BL을 보는 이유
바야흐로 펼쳐진 BL 유니버스! 왜 여자들은 남자들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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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키 스틱, 골대, 마주 선 두 사람, 불타는 하트. 2026년 4월 1일, 왓챠 X(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4개의 이모지다. 이 짧은 게시물은 251만 명이 넘게 조회했고, 6000회 넘게 리트윗됐다. 13일 후 왓챠는 “거짓말 아니고”라는 문장으로 <히티드 라이벌리>의 한국 론칭을 공식화했다. 캐나다 작가 레이철 리드의 소설 <게임 체인저스> 시리즈 중 하나인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은, 2025년 11월 캐나다 스트리밍 서비스 크레이브에 공개 후 HBO 맥스로 서비스되며 크레이브 역대 최다 시청 기록을 세웠다. 하키 라이벌 ‘셰인 홀랜더’(허드슨 윌리엄스)와 ‘일리야 로자노프’(코너 스토리)의 10년 넘은 이른바 ‘혐관 로맨스’를 그린 이 작품은 스포츠물이자 BL(Boys’ Love) 서사다. 원작부터 BL 팬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작품이었던 터라, 국내 론칭을 기다려온 이들도 많았다.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에서 크고 작은 ‘BL 유니버스’가 펼쳐지고 있다. 이 유니버스를 지탱하는 건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남성들의 사랑 이야기’에 빠지는 이유는 뭘까?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이유가 있다. 로맨스니까! 로맨스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장르다. 결말을 이미 알고 시작하는 장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결국 맺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과몰입한다. 다른 장르의 긴장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불안에서 온다면, 로맨스의 긴장은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는지 모른다’라는 호기심에서 온다. 오해가 쌓여 거리가 벌어지다가, 다시 좁혀지는 그 리듬 자체가 쾌락이다. 이 세계에서 감정은 이야기의 목적지다. 두 사람이 남녀든, 남성과 남성이든 이 구조는 달라지지 않는다. 좋은 BL은 무엇보다 좋은 로맨스다. 물론 여기에 ‘섹텐’까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게다가 이성애를 기본값으로 하는 사회 문화에 대한 피로감도 무시할 수 없다. 즉 다른 방식으로 로맨스를 즐기고 싶은 것이다.
자극적 판타지이되 ‘안전감’을 경험할 수 있는 장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레이철 리드는 여성 독자들이 BL을 ‘자신을 대입시키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로 도피하고 싶어 한다고 진단했다. <히티드 라이벌리> 제작자 제이컵 티어니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짚는다. 여성들이 현실에서 끊임없이 성적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다 보니, 남성 둘 사이의 이야기에서는 ‘공포 없이 로맨스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변 여성들에게 물으면 “재밌으니까!” 다음으로 이 안전감을 꼽는 경우가 많았다.
화면 속에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있지 않으니, 여성다움이나 결혼·출산 같은 현실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댈 필요도 없다. 이성애 로맨스와 미디어가 오랫동안 여성들의 몸을 전시해온 그 문법은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지만, BL 안에서는 전시되는 여성의 몸도, 강요받는 여성다움 또한 없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판타지겠지만, 누군가에겐 처음 가져보는 시선의 자유이며 규범과의 거리두기, 즉 해방적 경험이다.
고정된 성역할에서 벗어난 남자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BL을 본다. 이 서사 속 대부분의 남성은 상대를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이기거나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그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핀다. ‘새로운 남성성’의 발견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티드 라이벌리>의 ‘셰인’과 ‘일리야’는 스포츠 세계에서 남성성을 증명해야 하는 이들이지만, 동시에 취약함을 드러내고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남성들이기도 하다. 현실의 남성성이 억눌러온 눈물과 불안, 질투 같은 감정을 BL은 아무렇지 않게 꺼내놓는다. 그렇기에 여성들이 이 서사에서 발견하는 건 단순하게 섹시한 남성 2명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남성들(지배하지 않고, 표현을 숨기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마주 보는 사람들)인 것이다. ‘드라마’가 동시대의 욕망과 판타지를 반영한 세계라면, BL이야말로 그 정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세계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BL은 단순한 ‘보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학교 남교사들을 주인공으로 BL 웹소설을 쓰는 여고생이 등장하는 쿠팡플레이 시리즈 <로맨스의 절댓값>처럼, 보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건너가는 것도 이 향유의 일부다. 누군가는 포스타입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배우들과의 팬 미팅을 위해 해외로 떠난다. 완성된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스스로 빈틈을 채우는 능동성이 BL 향유의 또 다른 재미다.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BL 추천 글이 꾸준히 인기를 끄는 것도, “최애 벨드는…” 한마디로 낯선 이와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이런 팬덤 문화 덕분이다.
이런 이유는 지금 전 세계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같은 BL이라도 나라마다 그 사랑을 상상하는 문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서구 사회가 만든 <히티드 라이벌리>와 <하트스토퍼>는 동성애 혐오를 지우지 않은 채 인물들이 현실을 통과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태국은 <2gether: The Series>를 비롯해 수사물·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를 BL과 결합해왔고, 최근엔 배우들이 CP 단위로 해외 팬들을 직접 만나며 콘텐츠 밖 산업으로도 뻗어나가고 있다. 중국은 검열 속에서 <진정령>과 <산하령>처럼 사랑을 우정으로 에둘러 표현하면서도 세계적인 팬덤을 만들어냈다. ‘야오이(やおい)’의 발상지 일본은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처럼 일상에서 사랑이 스며드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대만은 <파파 앤 대디>처럼 결혼과 육아를 포함한 퀴어의 삶을 사회적,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이 콘텐츠들을 뭉뚱그려 ‘BL’이라 부르지만, 사실 서로 다른 문법이 섞여 있다. 하나는 야오이에 뿌리를 둔 판타지형 BL로, 동성애 혐오라는 현실의 장애물을 지운 세계에서 오해와 고백, 해피 엔딩이라는 공식을 반복한다. 다른 하나는 서구의 M/M(Male/Male) 로맨스로, 그 장애물을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레이철 리드는 “만약 커밍아웃한 선수가 있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착안해 <히티드 라이벌리>를 썼다고 밝혔고, 커밍아웃을 주저하게 만드는 사회와 보수적인 스포츠업계 현실을 서사에 반영했다. 이 M/M 로맨스는 자연스럽게 퀴어물과 맞닿는다. 로맨스 공식이 아니라 커밍아웃, 정신 건강,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서사의 중심에 놓이는 게 퀴어물의 특징이다. 영국의 <하트스토퍼>와 태국의 <I Told Sunset about You>가 그 경계에 선 작품들이다.
BL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이 두 문법 사이를 오가는 스펙트럼에 가깝다. 한국은 조금 다른 속도로 이 흐름을 지나왔다. 야오이 수용 이후 웹소설·웹툰으로 저변을 넓혀왔지만, ‘드라마’ 제작은 오래도록 시기상조로 여겨졌다. 그러다 2020년 이후 웹드라마가 꾸준히 만들어졌고, 2022년에 <시맨틱 에러>가 대중적으로 흥행했다. 그럼에도 이 장르는 여전히 얼마나 숨기느냐와 협상 중이다. 2024년에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서사를 지운 채 홍보했고, 드라마 버전은 퀴어성을 그대로 드러냈다가 방영 금지 시위에 부딪혔다. 그 속에서도 옥택연이 출연한 한일 합작 드라마 <소울 메이트>, 숏폼 드라마 <야화첩>, 수사물과 결합한 <검사실의 제안> 같은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BL을 보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유니버스를 지탱하는 여성들은 지금 국경과 매체를 넘나들며 현실에는 없는 사랑을 만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만난 관계가 곧 현실이 되는 건 아니다. 콘텐츠 안과 그 바깥인 현실 세계가 움직이는 속도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30세대를 중심으로 성소수자 인식 자체가 서서히 열리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그 시차를 기다리는 대신, 여성들은 먼저 다른 사랑의 문법을 경험하는 쪽을 택했다. BL이 여성들에게 다가온 게 아니다. 여성들이 먼저 BL에게로 가고 있는 것이다.
Credit
- 에디터 천일홍
- 글 오수경(드라마 평론가)
- 콜라주 도요
- 이미지 왓챠피디아(히티드 라이벌리)·IMDB(나머지)
- 아트 디자이너 김지은
- 디지털 디자이너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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