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가을 맞이 책과 술 페어링

한 모금 홀짝일 때마다 한 장씩 넘길, 술과 책의 이상적인 페어링 7선.

프로필 by 이예지 2024.10.05
AT DAWN

발베니 21년 포트우드 &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코스터 1만5천3백원 Motta by Twl.

코스터 1만5천3백원 Motta by Twl.

꿈에 뒤척이다 깨니 아직 어스름한 새벽. 약을 삼키듯 달고 독한 술을 니트로 한 모금 마신다. 풍성한 꿀의 맛, 따듯하고 매운 기운, 포트와인의 달콤한 향취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발베니 21년 포트우드로. 여기에 말캉한 파베 초콜릿을 혀로 녹이면 마음이 한결 진정된다. 술과 초콜릿을 머금은 채 펼쳐들 책은 켄 리우의 SF 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디지털 속 20차원을 유령처럼 부유하고 꿈처럼 유영하는 먼 미래의 세계는 상상 너머의 환상으로 우리를 훌쩍 데려간다. 점점 몽롱해지는 기분에 젖으며, 양을 세는 것보다 강력한 묘약이 돼주는 것을 느끼며…. 잠들라, 다시 잠에 들었을 땐 클라인 대롱과 바이어슈트라스 타원 곡선을 흐르는 멋진 꿈을 꿀 테니.

IN THE MORNING

하쿠슈 18년 &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텀블러(2개 세트) 55만원 Baccarat.

텀블러(2개 세트) 55만원 Baccarat.

아침에는 편지를 받고 싶은 기분이다. 현관에 놓인 신문을 펼치듯, 멀리 있는 이로부터안부가 담긴 서신을. 런던에 있던 나쓰메 소세키가 일본의 제자에게 보낸 편지의 도입을 인용한다. “그간 격조해서 미안하네. 대형도 건강히 공부하고 있는가? 왠지 멘델스존의 음악을 크게 틀어두고 뿌듯해하고 있을 것 같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그리는 다정하며 산뜻한 말들.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은 그가 평생에 걸쳐 친우와 동료, 아내와 딸, 제자들, 각계 예술가들과 주고받은 편지 중에서도 아름답고 심원하며 재치 있는 글을 골라내 엮은 책이다. 여기에 곁들일 하쿠슈 18년은 일본의 남알프스라 불리는 야마나시 산지의 증류소에서 맑은 물과 공기로 만든 술. 코를 찌르는 신선하고 청량한 감귤의 향, 부드럽고 긴 피니시로 여운을 남기는 산뜻한 위스키로, 아침을 상쾌하게 열기 좋다. 기분 좋은 편지 같은 한 권의 책과 함께, 하루를 청신하게 시작한다.

AT NOON

페리에 주에 벨에포크 블랑 드 블랑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접시 가격미정 Hermès. 브리 치즈 6천1백원 Alpenhain by Cheese Queen.

접시 가격미정 Hermès. 브리 치즈 6천1백원 Alpenhain by Cheese Queen.

찬란한 정오엔 약간의 사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파리에서 가장 영화로웠던 시기인 벨에포크 무드 같은 것. 벨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자전적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교계의 향락, 빛나는 지성, 오만과 허영, 덧없는 사랑 같은 것들을 화자의 일생에 걸쳐 서술한다.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문 뒤, 갑자기 떠오른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하는 순환 구조인 이 소설을 읽고 있자면 그 시절 파리의 공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여기에 기분을 내기 위한 샴페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페리에 주에 벨에포크 블랑 드 블랑. 샹파뉴의 코트 데 블랑에서 생산된 가장 우수한 품질의 샤르도네만으로 빚은 샴페인 중의 샴페인. 아카시아, 엘더플라워의 향기와 잘 익은 복숭아의 풍미, 섬세한 버블이 혀를 간지럽히며 입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싱그러운 맛. 홍차엔 마들렌이겠지만, 이 샴페인엔 브리 치즈 위에 무화과 슬라이스를 얹고 꿀을 듬뿍 뿌린 뒤 잘게 부순 아몬드를 흩뜨린 스몰 디시를 곁들이면 더욱 근사하다.

IN THE AFTERNOON

돈 훌리오 레포사도 & ‘바벨의 도서관’ 중 <아르헨티나 단편집>

와인 잔 가격미정 Saint-Louis. 카드 게임 세트 가격미정 Hermès. 다리 모양의 성냥 12만8천원, 달걀 모양의 문진 4만9천원 모두 39etc. 손 모양의 인센스 홀더 70만8천원, 연필 모양 샤프 2만4천원 모두 Astier de Villatte. 안경 55만5천원 J.T.O. Originals.

와인 잔 가격미정 Saint-Louis. 카드 게임 세트 가격미정 Hermès. 다리 모양의 성냥 12만8천원, 달걀 모양의 문진 4만9천원 모두 39etc. 손 모양의 인센스 홀더 70만8천원, 연필 모양 샤프 2만4천원 모두 Astier de Villatte. 안경 55만5천원 J.T.O. Originals.

해가 길어진 낮은 낮잠만큼이나 환상에 잠기기 좋은 때다. 남미 환상 문학의 대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을 즐기는 애독자였는데, 그가 전 세계의 환상문학을 엄선해 29권으로 엮어낸 ‘바벨의 도서관’은 그야말로 한낮의 백일몽을 위한 컬렉션.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의 환상 문학을 엮어낸 29번 책을 추천한다. 원숭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남자,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점거당한 집, 루비가 세공된 금팔찌를 잃은 여자, 스스로를 신이라 말하는 체스 선생…. 자욱한 환상 속, 어울리는 술은 당연히 테킬라다. 그중에서도 밝게 타오르는 호박색, 시나몬과 캐러멜의 맛, 다크 초콜릿과 바닐라, 과숙된 과일 향이 진하게 올라오는 돈 훌리오 레포사도. 이 감미로운 시에스타에서 영영 깨고 싶지 않다.

IN THE EVENING

레조낭스 데꾸베르트 빈야드 피노누아 & <화성 연대기>

와인 잔(2개 세트) 55만원 Barccarat. 접시 가격미정 Hermès. 목걸이 가격미정 Tiffany&Co. 하몽 슬라이스 9천2백원 Nico Jamones, 체리페퍼 절임 9천2백원 almito, 체리뇰라 올리브 절임 6천4백원 Le Nostrane, 초리조 슬라이스 9천4백원 Espuña by Cheese Queen.

와인 잔(2개 세트) 55만원 Barccarat. 접시 가격미정 Hermès. 목걸이 가격미정 Tiffany&Co. 하몽 슬라이스 9천2백원 Nico Jamones, 체리페퍼 절임 9천2백원 almito, 체리뇰라 올리브 절임 6천4백원 Le Nostrane, 초리조 슬라이스 9천4백원 Espuña by Cheese Queen.

뜨거웠던 태양이 작열하는 흔적을 남기며 붉은빛으로 물드는 저녁. 그 시간을 만끽하기에 육향 가득한 초리조와 타닌과 산미가 균형 잡힌 피노누아처럼 잘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오레곤의 화산토에서 자란 피노누아로 만든 레조낭스 ‘데꾸베르트 빈야드’는 딸기와 체리, 자두 등 붉은 과실의 향기가 물씬 풍기며, 숲 냄새의 여운이 느껴지는 신선한 아로마의 와인이다. 무르익은 순간을 풍성하게 즐기기 위해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를 펼친다. 가장 시적인 SF 소설. 음유시인과도 같은 필치로 화성과 지구를 오가는 대서사시를 반짝이는 꿈결처럼, 매끄러운 비단처럼 펼쳐내는 작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피리 소리에 홀린 아이처럼 어느새 낯선 별천지에 와 있다. 그가 상상한 화성의 와인이 흐르는 운하는 어쩌면 이 피노누아의 맛이 아닐까? 지구라는, 마찬가지로 기묘한 행성에서 일몰을 바라보며.

AT NIGHT

포 로지스 스트레이트 버번 & <기나긴 이별>

텀블러(2개 세트) 35만원 Baccarat. (왼쪽)오드 퍼퓸 드 레 뉘 48만원 Astier de Villatte. (오른쪽)엔젤스셰어 35만원 Kilian.

텀블러(2개 세트) 35만원 Baccarat. (왼쪽)오드 퍼퓸 드 레 뉘 48만원 Astier de Villatte. (오른쪽)엔젤스셰어 35만원 Kilian.

레이먼드 챈들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에 나쁜 위스키란 없다. 그저 다른 위스키보다 맛이 없는 위스키가 있을 뿐.” 이 거친 미국 작가에게 어울리는 건 단연 버번 위스키. 진한 달콤함, 눈이 번쩍 뜨이는 피트 향, 후추를 한 움큼 씹은 듯 매운 내가 풍기는 것으로. 챈들러는 미국 서부 황금시대의 탐정, 고독한 하드보일드의 대명사 ‘필립 말로’ 시리즈를 절찬리 연재했는데, 그중 가장 빼어난 역작은 <깊은 잠>도 <높은 창>도 아니고 내색하지 않는 남자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연정을 넌지시 보여준 <기나긴 이별>이다. 극도로 하드보일드한 이야기 속 이 센티멘털과 로맨티시즘은 퍽퍽한 호밀빵 위 녹아 내린 버터 한 조각만큼 달다. 그렇다면 어울리는 건 포 로지스의 스트레이트 버번. 강렬한 버번이지만 코끝에 화사한 꽃 향이 스쳐 이름처럼 낭만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술이다. 버번은 숙성 중 증발량, 즉 천사들의 몫이라 불리는 ‘엔젤스셰어’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위스키로, 킬리안의 니치 향수 ‘엔젤스셰어’의 향이 포 로지스와 닮았으니 참고할 것.

AT MIDNIGHT

로얄 살루트 62건 살루트 & <검은색>

위스키 잔 가격미정 Glen Cairn. 시계 1천4백만원대 Omega. 꽃잎 모양 오브제 4만원 Studio Foh by Twl.

위스키 잔 가격미정 Glen Cairn. 시계 1천4백만원대 Omega. 꽃잎 모양 오브제 4만원 Studio Foh by Twl.

자정에 이르렀다면 이제 하루의 여정을 마칠 시간. 가장 새카만 어둠 속에 파묻힐 수 있도록,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검은색’에 대한 논고 <검은색>을 읽는다. 검은 개, 잉크통, 흑인, 블랙홀, 혁명과 계몽주의, 모든 색채에 대한 결핍… 검은색을 소재로 한 그의 사유는 문명과 우주를 넘어 팽창하나, 얇은 두께와 짧은 챕터 덕에 독자는 그 병렬된 단상들 속을 가볍게 거닐 수 있다. 완전한 어둠, 깊은 휴식에 들어가기 위해, 로얄 살루트 62건 살루트를 니트로 한 잔 홀짝인다. 21년 이상 숙성된 진귀한 원액만을 블렌딩한 이 술은 호화로운 셰리의 향기, 다크 초콜릿의 달콤함, 시나몬의 뉘앙스, 스모크한 풍미로 이어지며 우리의 무장된 의식을 해제시키고, 마침내 꿀과 같은 잠에 들게 할 것이다.

Credit

  • Editor 이예지
  • Photographer 이원재
  • Location HOTEL NARU M GALLERY
  • Assistant 이나라
  • Art designer 김지원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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