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이 쏘아올린 작은 책 || 코스모폴리탄코리아 (COSMOPOLIT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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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이 쏘아올린 작은 책

K-콘텐츠 열풍은 드라마나 영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국 여성 작가들의 소설과 에세이가 해외에서 번역, 출판되며 K-문학의 매력을 빠르게 퍼트리고 있다.

COSMOPOLITAN BY COSMOPOLITAN 2022.03.09
 
태국,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우크라이나, 덴마크, 이탈리아, 브라질, 그리스, 스페인,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이집트, 아랍, 네덜란드, 체코…. 떠오르는 국가 이름을 무작위로 늘어놓은 것 같지만 이들을 이어주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모국어로 읽은 사람들이 사는 국가라는 것이다. 출간 이후 5년 동안 28개국 25개 언어로 번역되고 있는 이 책은 각각의 영토에서 출간된 데 그치지 않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화제도 낳았다. 독일에서는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 차트에 진입했고, 일본에서는 말 그대로 전례 없는 화제작이 됐다. 일본 내 한국 소설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탓에 일본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작가와 함께 나 역시 편집자로서 현지 행사에 초청받은 것만 두 차례였다. 대만 총통이 서점에서 이 책을 사는 장면이 뉴스로 나오는 것을 신기하게 봤던 기억도 있다. 런던 어느 거리가 〈KIM JIYOUNG, BORN IN 1982〉의 표지 이미지와 카피로 새겨진 날들도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은 1982년에 태어난 여성의 삶을 재구성한 리포트 형식의 소설이다. 의사의 상담 기록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은 소설의 형태를 취하나 소설 안에서 구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처방 없는 상담 기록은 그저 기록에 불과하므로 내담자의 예후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내담자, 그러니까 1982년에 태어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던 중 불현듯 자신을 잃어버린 김지영 씨의 기록이 공개되면서 그간 이름 없는 증상을 앓고 있으면서도 적절한 처방도 출구도 없어 그저 앓기만 하던 사람들의 숨통이 얼마간 트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들으면 갈등과 분열을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사실 이 책의 독자라면 책의 제목을 듣고 떠올릴 단어는 ‘연결’이어야 합당하다. 한국에서 근래에 출간된 어떤 소설도 이렇게 많은 언어를,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해외에서 번역되는 한국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연결 능력이 뛰어난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 못지않게 해외에서 호평받는 작품으로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가 있다. 이 소설은 레즈비언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지닌 딸과 그런 딸을 이해할 수 없어 외면하고 살았던 엄마가 연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연결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연결을 도모한다는 점에 이 소설의 진가가 있다. 엄마가 자신의 직장인 요양원에서 돌보던 노인 ‘젠’과 맺는 관계가 그것이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노인은 돌봐줄 가족이 없었지만 요양원에 들어올 때만 해도 거액의 기부금을 낸 덕분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차 정신을 잃어가자 요양원은 노인을 처치 곤란인 쓰레기 취급한다. 노인은 제공받아야 할 정당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이를 보고 있을 수 없던 엄마는 노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겠다 마음먹고, 그 일에 딸과 딸의 여자 친구가 합세하면서 네 사람은 자신들만의 가족을 꾸린다. 수직적 연결을 넘어 수평적 연결로 나아가는 따뜻함이다. 1911년 설립된 세계적인 출판사 갈리마르에서 〈딸에 대하여〉 프랑스어판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나 손원평의 〈아몬드〉,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들 소설은 고립되고 단절된 사람들로 하여금 그간 자신을 소외시켜왔던 바로 그 ‘고통’으로 세상과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 〈아몬드〉는 공감 능력이 없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지만 역설적으로 이 소설은 공감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채식주의자〉는 인간 대 인간이라는 통상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사이의 연결을 상상한다. 이처럼 해외 독자들을 불러 모으는 소설들이 지닌 리얼리티는 잔혹하고 건조한 하드보일드가 아니라 따뜻함과 공감, 그로 인해 읽는 사람과 쓴 사람, 나아가 읽는 사람과 읽는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의 리얼리티다. 최근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주관하는 대거상을 받으며 국내에서도 역주행하고 있는 윤고은 작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이 대거상뿐만 아니라 〈The Comedy Women in Print〉 최종 후보에도 올랐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의 따뜻한 소설이라는 맥락에서 이 역시 무척 흥미로운 사건이다. 2019년에 신설된 〈The Comedy Women in Print〉는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출간됐거나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재치 있는 여성 작가들’의 소설에 수여하는 상이다. 수상작 중 이미 출간된 작품에 대해서는 상금을 수여하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은 하퍼콜린스에서 출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사막의 싱크홀로 떠나는 패키지 여행을 기획하는 여행사 직원 ‘고요나’의 예측할 수 없는 여행기는 재난마저 상품화하는 맹목적인 세상을 재치 있고 온기 있는 시선으로 비판한다. 영국 〈가디언〉은 〈밤의 여행자들〉을 두고 “기후변화와 세계 자본주의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흥미로운 에코 스릴러”라고 평했다. 강한 연결에 대한 욕망을 소설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해외에서 경쟁력 있는 한국의 드라마는 의지할 곳 없는 마음에 곁을 내어주는 따뜻한 작품들이다. 보고 있으면 체온이 1℃쯤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드는 온기 있는 작품이란 점을 한국 드라마의 특징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럴듯한 분석이다.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랑의 불시착〉만 해도 분단이라는 상황을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풀어냈고, 폭력성이 문제될 정도로 잔인했던 〈오징어 게임〉에서조차 잔혹한 게임 서사를 둘러싸고 있는 건 다정한 ‘깐부’의 세계였다.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기만 한 게 아니다. 우리는 냉소와 우울이 지배하는 콘텐츠 시장에서 전에 없는 따뜻함으로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는 사랑스러운 민족이기도 한 것이다. 혹자는 따뜻함이 문학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따뜻함이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감정, 혹은 힘들 때 기대고 싶은 의존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센티멘털로 추락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작품이 가벼운 센티멘털에 기대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체온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스 이저맨의 책 〈따뜻한 인간의 탄생〉은 체온 유지의 역사를 통해 따뜻함이 주는 효능이 인간사의 진화에 기여한 바를 증명한다. 무서워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권하는 행위는 심리적 안정뿐만 아니라 육체적 안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역설적으로 인간을 함께 살도록 진화시켰다면 따뜻함이라는 감정은 함께 살아가도록 진화한 존재의 구제적인 수단이다. 인간은 따뜻함을 실천하며 함께 살아간다. 외로움과 쓸쓸함에서 비롯되는 근원적 고독이 문학의 중요한 테마이자 문학성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듯이 연결을 통한 따뜻함에서 비롯되는 근원적 기쁨과 위로 역시 문학의 중요한 테마이자 문학성을 판별하는 결정적 기준이 될 수 있다. 한국 여성 작가들은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을 땔감으로 저마다의 방식으로 온기를 전달한다. 해외 독자들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작품들이 대체로 고통을 공유하고 치유하며 함께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함이라는 삶의 기술이 요구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 한가운데에 한국의 콘텐츠가 있다. 연결을 통해 1℃를 올려주는 한국 여성 작가들의 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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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김예린
    photo by Stocksy
    글 박혜진(<82년생 김지영> 편집자)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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