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범죄 영화를 논하는 두 여자, 이수정 교수와 이다혜 기자

우리의 2020년이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가 그린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은 건, 인류의 반인 여성들의 배려와 존중 때문이 아닐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서로가 빛을 비춰주자고,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말하는 ‘연대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BYCOSMOPOLITAN2020.03.08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 〈씨네21〉 기자 이다혜
 
첫 방송에서 이수정 교수님이 섭외 전화를 받았을 때 하신 이야기로 방송의 출발점을 짚었어요. “범죄 영화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프로그램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범죄 영화에 숱하게 등장하지만 대부분 피해자로 소비되다 마는, 여성이나 아이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프로그램이라면 의향이 있다”라고 하셨다고요. 섭외 과정에서 방송의 방향이 좀 바뀌었나요?
이다혜 처음부터 방향은 정확했어요. 범죄에 관한 팟캐스트는 남자들이 하고 있는 게 이미 많았거든요. 실제 사건을 다루는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여성 대상 범죄일 경우 조심성 없이, 말을 함부로 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사체가 발견됐을 때 하의가 벗겨진 상태였다고 하면 다 같이 “강간이네, 강간이야!”라고 반응하는 거죠. 범죄를 그런 흥미 위주로 다루지 않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는 자리로 여자들끼리 하는 방송을 기획했다고 들었어요. 보통 이런 방송은 진행자 중 여자가 있으면 나머지는 성비를 ‘안배’하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남자는 몇 명이든 괜찮은데, 여자가 한 명 있으면 다른 한 명은 남자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이 방송은 기획부터 여자 두 명이 진행하는 것으로 정한 상태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장르를 이야기하는데 여자 두 명이 진행한다고 하니까 너무 하고 싶다고 했죠.
이수정 처음엔 제가 오해를 좀 한 거였어요. 이전에 범죄 영화를 제작하거나 수입했을 때 프리뷰 행사에서 코멘트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간 적이 있었거든요. 리드하는 사람의 코멘트가 도저히 컨트롤하기 어렵고, 영화의 흐름도 맘에 안 들었어요. 범죄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줬을 때 모방의 욕망을 유발하는 것 말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두어 번 가보고 관뒀어요. 그래서 처음 섭외 전화를 받았을 때 거절한 거죠. 그런데 작가님들이 다른 관점으로 비판적인 평론을 하겠다, 잊혀졌던 피해자의 관점으로 다루겠다 누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다혜 기자님은 한 출판사가 연 범죄학교실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함께라면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다혜 기자님은 〈출근길의 주문〉에서 이 방송의 팀워크에 대해 쓰기도 했어요. 일에 관련한 연락만 주고받고 개인적인 교류는 없지만 배려와 다정함, 상대의 실력을 수시로 경험하고 감탄한다고요.
이다혜 일하면서 피곤했던 것 중 하나가 사전 작업이 너무 길거나 아니면 끝나고 뒤풀이를 꼭 해야 하는 거였어요. 뒤풀이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엄청 까다로운 사람, 일은 잘하지만 앞으로 같이 가긴 껄끄러운 사람이 되더라고요. 전 그런 방식이 맞지 않아요. 준비해서 일만 하고 헤어지는 게 좋지. 이 팀은 “팀워크를 다지려면 술 한잔해야죠”, “2주 만에 만났으니까 밥 한번 먹어야죠” 하는 게 전혀 없어요. 사적인 관계를 쌓는 것으로 공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죠. 그런데 이건 선생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있어요. 만약 선생님이 “그래도 우리 술은 한잔해야지” 하시는 분이었다면… 눈치껏 맞췄겠죠? 하하.
이수정 처음 같이 하는 건데 마치 굉장히 오래 일했던 분위기가 있어요. 각자 자기 영역에서 서로 다른 일을 오래한 사람들인데, 지향점이 같았다고 할까요? 운이 굉장히 좋았던 거죠.


‘〈동백꽃 필 무렵〉: 범죄와 시민/사회편’ 방송을 들으면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저는 ‘향미’가 결국 연쇄살인범의 피해자가 됐을 때 박탈감이 들더라고요. 직업 여성이고, 남을 등쳐 먹으며 살던, 주인공이 아닌 여자,  ‘향미’의 희생은 어떻게 보시나요?
이다혜 비슷한 입장이긴 해요. 저 역시 ‘동백이’보다 ‘향미’에게 더 감정이입을 했거든요. 여자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끼워 넣은 다른 여성이 결국은 희생되는 전개가 아쉬웠죠. 그런데 손담비 씨의 캐스팅 과정을 알게 된 후 좀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그 역할을 평소 친한 공효진 씨가 소개했다고 하더라고요. 여자 배우들 입장에선 여성 캐릭터가 그리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역할을 고르는 일이 정말 쉽지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 동료 배우가 같이 해볼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정보를 얻고, 소개를 시켜주고, 심지어 드라마가 잘돼 손담비라는 사람이 연기자로서 더 인정받는 계기가 됐잖아요? 극 중에서 역할이 어떻게 소진됐는가만을 이야기하기에는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이 있다고 봐요.
이수정 전 그 드라마 작가님이 굉장히 범죄에 대한 이론에 빠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범죄 이론 가운데 피해와 가해는 한곳에서 일어난다는 이론이 있거든요. 열악한 지역사회를 들여다보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동네에서 같이 살잖아요? 그런 중첩되는 지점을 ‘향미’라는 인물이 잘 시사하는 거죠.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잖아요. 사람들은 가해자는 나쁘고 피해자는 무고하다는 흑백논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사건을 들여다보면 그레이 레이어가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흑백논리 싫다”예요. ‘향미’의 희생은 그 지역 경찰이 막지 못한 거예요. 열심히 했으나 효율적으로 못 한 거죠. 무고한 희생을 막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없어요.
 
방송을 듣다 보면 재미를 느끼는 포인트가 있어요. 이다혜 기자님은 시민이자 여성으로서 울분을 터뜨리고, 이수정 교수님은 법이 그렇고 현실이 그렇고 인간의 본능이 그렇다고 눌러주시는 거죠. 두 분의 이런 상반된 캐릭터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시작하셨나요?
이다혜 몰랐죠. 회를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눠진 것 같아요. 저도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뭔지는 알죠. 법이 이렇고, 부족하지만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는 걸요. 평소 범죄나 추리물을 즐겨 보는 편이지만, 이 방송을 위해 따로 공부를 하진 않아요.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고, 그걸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상황에서 분노하고 여쭤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차분하시던 이수정 교수님이 무너지시죠. ‘〈꿈의 제인〉: 청소년 가출팸, 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다!’ 편에서요. 미성년 성매매의 온상인 채팅 애플리케이션 수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셨잖아요?
이수정 지난 한 해 동안 정말 목을 매고 있던 일이었으니까요. 거기서 일어나는 청소년 대상 범죄가 너무 심각해요. 최근에는 보이스피싱이랑 연계돼 애들을 노예로 만들어요. 동영상이랑 개인 정보를 다 빼내 자위하는 음란 동영상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죠. 그런 자들이 해외로 나가서 법망을 피하고….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인간이 ‘박사’였는데, 검거했잖아요! 의지를 가지면 경찰에서 잡을 수 있어요! 문제는 동력인데, 남자들은 모르거든요. 사용자는 죄의식도 없고, 사용을 안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몰라요. 반면 우리는 여성이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거고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미성년인 여자애들이 어떤 위험에 놓여 있을지 대충 짐작이 되니까요. 여성의 여론이 비등해져 여론이 움직이면 경찰이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자발적으로 알아서 해주면 좋겠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문제예요. 그래서 정기적인 오디오클립을 통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노력을 하는 거예요.


두 분은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나요?
이수정 생각해보면 20년간 이 일을 하면서 저 스스로도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 이쪽 연구를 할 때는 강간죄가 잘 성립이 안 되던 시기였거든요. 친고죄 폐지되고, 2008년 조두순 사건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해요. 여성의 인권과 관련된 규범이 지난 십수 년간 정말 빨리 바뀌었으니까요. 요즘엔 여당에서도 공천 과정에서 눈치를 보잖아요? 소위 진보란 사람들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운 거죠. 변화하고 있다고 봐요.
이다혜 전 규범대로만 살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하는 게 더 끔찍한 일이라고 봐요. 사람들이 계속 바뀌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서로를 너그럽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근데 범죄에 관해서는 전보다 더 가혹한 방식으로 다룰 때만이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이 의미가 있겠죠. “‘관행’이니까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은 아무것도 나아지게 하지 않아요.
 
연대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문제의식을 느낄수록 여자들과의 대화가 불편할 때가 많더라고요. 나와 다른 입장에서,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는 여성과 연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수정 저도 옛날엔 그랬어요. 당장 내 새끼들 챙기는 게 급한 일이라, 좀 더 나은 위치에 가려면 다른 사람 입장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그런데 나이 들어보니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가 굉장히 근본적인 문제라는 걸 느껴요. 그걸 좀 더 미리 알았더라면 남들한테 좀 더 관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하죠. 제가 이 일을 놓지 않은 건 내가 여자였기 때문이었어요. 여성들 간의 세대차는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기득권층에 들어가서 나의 영달을 위해 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곳에 있는 것보다 여기서 떠드는 게 뱃속이 훨씬 편해요. 그런 선택에 BBC가 불을 붙였고요(이수정은 BBC가 선정한 ‘2019 100인의 여성’에 이름을 올렸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네가 여태 했던 것처럼 뱃속 편하게 살라고 동의해준 느낌이에요. 그래서 더 매진하고 더 무심하기로 했어요.
이다혜 항상 코앞에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면 멀리 보고 손잡기는 쉽지 않아요. 여성들은 잘못 연대했을 때 잃을 게 너무 크기 때문에 배척하는 작업을 하게 되죠. 제가 지금도 먹고살기 힘들어 한 치 앞도 볼 수 없고 가족 때문에 매일매일 피곤하다면, 여전히 근시안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전 여성들이 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커리어나 돈벌이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건 너무나 많지만, 최소한 안전할 수 있는 권리부터 찾자는 거예요. 그건 인간의 기본권이니까. 밤길을 갈 때, 화장실을 갈 때, 내 집에서 잘 때 불안하지 않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필요한 거죠. 그런 기본적인 것들이 해결되면 여자들끼리의 연대도 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about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프로파일〉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씨네21〉 기자 이다혜의 범죄 영화 탐구 팟캐스트. 범죄 영화에 숱하게 등장하지만 대부분 희생자로 소비되는 여성과 아이, 장애인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세계와 범죄 영화 장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지난해 4월부터 네이버 오디오클립 오리지널로 매주 수요일 방송되고 있으며, 여성 청취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 2019 연말 오디오클립 결산에서 문화예술 부문 1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