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걸릴 수 있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 대학생 시절, 이혜선(가명, 30세) 씨는 엄마에게 자궁경부암 예방 캠페인 팸플릿을 보여주며 “가다실 접종 비용을 보태달라”라고 말했다가 “이런 건 문란한 애들이나 걸리는 거야”라며 되레 혼만 났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어느 날, 혜선 씨는 산부인과를 방문했다가 자궁경부 이형성증 판정을 받았다. 혜선 씨가 검진과 원추절제술을 받느라 사용한 금액은 가다실 접종 비용의 2배에 달했다. 한편 김민아(가명, 27세) 씨는 얼마 전 남자 친구가 곤지름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됐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라 성병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기가 꺼려졌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져 헤어지게 됐다. 예기치 않게 찾아와 우리의 성생활을 훼방놓으며, 콘돔으로도 막을 수 없고 심한 경우 암으로 발전하는 HPV. 코스모가 그 정체를 파헤쳤다.
‘인유두종바이러스(Human Papillomavirus)’라고도 불리며, 사람과 동물의 피부나 점막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여태까지 알려진 HPV는 약 190여 형이 있는데, 그중 40여 형이 성적 접촉을 통해 남녀 생식기와 항문 주위 피부에 감염되는 성병의 일종이다. 1970년대 독일의 하랄트 추어 하우젠 박사가 처음 발견했고, 1994년 국제 암 연구센터는 HPV를 자궁경부암의 발병 원인으로 발표했다. 현재 HPV는 1군 발암물질로 지정된 상태다.
HPV는 공중화장실의 변기나 공중목욕탕 사용, 악수나 포옹 등으로는 옮지 않는 ‘성병’이다. 그러나 성병 중에서는 전염력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정확히는 바이러스 감염자와 성기 점막 및 피부를 상호 접촉할 경우 감염된다. 삽입 섹스 외에도 구강 성교나 감염자의 성기를 만진 손으로 스스로의 성기를 만지는 등의 유사 성행위로도 감염될 수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에이즈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인 HIV는 혈액이나 정액 등 체액으로 전염되기 때문에 단순 ‘접촉’만으로 전염되지 않는 데 비해 훨씬 전염력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대학병원 여성병동과 성폭력센터에서 7년째 일하는 이함성 간호사는 “특히 HPV는 바이러스의 크기가 0.008~0.33㎛에 불과해 보통 입자 크기가 4㎛인 콘돔을 사용해도 막지 못할 가능성이 커요”라고 말한다. 콘돔의 HPV 예방률은 60~70% 정도로 알려져 있다.
「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거 아닌가요?
」 성행위로 감염되는 바이러스기 때문에 성행위를 한 적 없는 사람보다 성행위를 많이 하는 사람이 감염될 확률이 높은 것은 맞다. 그러나 성행위가 적거나 파트너가 한정됐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첫 상대라면 모르지만, 자신의 파트너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심각하게 재고해봐야 한다. 이론적으로 HPV는 한 번이라도 성적 접촉이 있었을 경우 감염을 의심해야 하며, 잠복기가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십 년으로 언제 면역력이 떨어져 몸에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HPV는 단 한 번의 접촉으로도 50% 이상 전염될 정도로 전염력이 상당한 만큼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흔한 성병이다. 태어나서 성생활을 하는 여성 70% 이상이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되며, 전체 감염률은 여성 10명당 1~2명꼴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HPV에 감염됐다고 해서 당장 위급해지는 건 아니다. 많은 경우 무증상으로 보균하고 있다가 사라지고, 사람에 따라 증상이 다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건, HPV 바이러스에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크게는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고위험군(16·18·31·33·35·39·45·51·52·56·58·59·68형)과 주로 생식기 사마귀(곤지름)의 원인이 되는 저위험군(6·11형 등 그 외)으로 나뉜다.
생식기 사마귀의 90% 이상에서 HPV 6·11형이 발견된다. HPV에 감염된 상대와 성 접촉 후 수주 또는 수개월 내에 생식기나 항문 등에 작은 돌기 또는 여러 다발 같은 돌기가 발생하는데, 가렵거나 쓰리고 아플 수 있다. 생식기 사마귀는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으며 연고나 레이저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재발 가능성이 높고 전염성도 강하다. 한편 고위험군 HPV가 자궁경부암으로 발전할 경우 국내 사망률은 6% 정도로 결코 낮지 않다.
자궁경부암은 2018년 기준으로 국내 만 15~44세 여성의 암으로 인한 사망 원인 중 세 번째로 빈도수가 높다. 다만 암으로 진행하기 전 단계인 이형성 세포 단계부터 추적 관찰이 가능하고, 따라서 지속적으로 검사한다면 말기가 되기 전에 조치를 취하기 쉽다는 것이 큰 장점이기도 하다. 의학적으로 HPV 감염에 의한 세포 변화는 정상 세포, 반응성 세포 변화(RCC), 비정형 상피세포(ASCUS), 고위험 비정형 상피세포(ASC-H), 그리고 전암 단계인 이형성 세포(LSIL, HSIL)로 분류한다. 대학병원 여성 병동에서 6년, 산부인과 전담으로 3년째 일하고 있는 주민수 간호사는 “HPV 감염 후 암이 되기까지는 통상적으로 10~20년이 걸린다고 얘기하죠. 꽤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하지만 최근 병원에서는 짧게는 수개월 만에 이형성증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라고 말한다.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국내 자궁경부암 환자는 2010~2017년 24.5% 증가했으며, 특히 10~20대 전암 단계 환자는 10년 새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 밖에도 HPV가 질내 유해균과 연관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13년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HPV에 감염된 여성의 질 내에서는 스니치아 계통의 미생물이 증가하고, 정상 균총인 락토바실러스 계통이 감소한다고 해요. 정상 균총이 감소하면 감염이나 염증에 취약한 상태가 되죠”라고 이함성 간호사는 말한다. 문제는 이 스니치아 계통의 미생물은 현재 산부인과에서 시행하는 검사로는 검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내가 HPV에 감염됐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 HPV는 잠복기를 가늠할 수 없는 데다 명확한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아, 바로 발견하기가 어렵다. 병원에서는 팝 검사(Pap Smear Test)를 통한 정기검진을 권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자궁경부암 검사다. 자궁경부에서 미세한 솔로 세포를 살짝 긁어낸 뒤 슬라이드에 납작하게 펴거나 염색해 미세 현미경으로 세포 형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팝 검사에는 2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국가에서 2년에 한 번씩 무료로 해주는 자궁경부암 암 검진에서 사용하는 세포진 검사, 그리고 병원에서 별도로 사용하는 액상세포진 검사다. 주민수 간호사에 따르면 국가에서 시행하는 무료 검진은 액상세포진 검사에 비해 정확도가 훨씬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암 검사와 함께 HPV 검사를 꼭 병행해야 하는 이유다. HPV 검사의 경우 코로나19 검사법으로도 잘 알려진 PCR 검사법을 사용한다. 피부에서 세포를 채취해 유전자를 증폭시켜 바이러스를 검출하는 방법이다. 팝 검사나 PCR 검사 결과 자궁경부에서 이상 세포가 발견되거나 자궁경부암의 가장 큰 원인인 16·18형 HPV 바이러스가 검출될 경우 질확대경검사를 통해 직접 자궁경부 세포를 살피거나, 자궁경부 조직 일부를 떼내어 조직 검사를 하게 된다.
HPV 백신이 ‘자궁경부암 백신’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이 오해하기 쉽지만, 당연히 HPV는 남성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남성 역시 백신 접종이 권장된다. 미국 제약회사인 MSD의 자료에 따르면 음경암의 약 40%, 그리고 항문암의 85%가 HPV와 연관이 있다. 또한 구강암과 인후암의 경우 각각 25%, 35%가 HPV와 연관된다. 임신 계획이 있는 남성의 경우 HPV가 정자의 운동성에 영향을 미쳐 난임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 연세우노비뇨기과의 도성훈 원장은 “대부분의 남성이 여자 친구나 부인 손에 이끌려 와요. HPV는 증상이 없어도 검사가 가능하며, 그렇게 힘든 검사가 아니라는 걸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남성 역시 피부 상피세포나 소변을 채취해 PCR 검사를 시행한다. 그러나 이 경우 생식기 사마귀 등의 뚜렷한 병변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요도 점막 세포와 정액을 함께 검사하는 것이 결과의 정확도를 훨씬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