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노브라보다 더 어려운 감정 코르셋

브라를 벗어던지고, 메이크업을 지우면 뭐하나? 남자와 연애할 때는 어김없이 엄마 같은 여자, 현모양처 등 남자들의 이상형에 맞는 여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데! 페미니스트, 탈코르셋을 외치면서도 연애할 때는 왠지 모르게 찝찝하고 불편했다고? 단순히 외적인 변화뿐 아니라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감정 코르셋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런데 그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BYCOSMOPOLITAN2020.02.04
 
혼자 살면서도 나름 제대로 된 밥상을 차려 먹는다는 말에 남친 P가 말했다. “오, 잘했네! 그렇게 안 보여도 넌 참 여성여성해. 오빠한테도 나중에 차려줄 거지?” 사귄 지 얼마 안 돼 선의로 생각해 넘어가려 했지만 연애 초반인 만큼 미리 내가 싫어하고, 불편하다 느끼는 건 말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칭찬으로 한 ‘여성스럽다’는 말이 난 칭찬으로 들리지 않고, 요리는 여성스러움을 상징하지 않는다”란 요지로 말했다. 다른 사람보다 이 부분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졌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그는 내 반응에 놀라며 불쾌해했다.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어. 앞으로 조심할게”라고만 했다면 P는 여전히 내 남친으로 남았겠지만, 그는 “왜 그렇게 예민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어”라며 언짢아했다. 곧 우린 헤어졌다.
 
언제부터인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이 있다. “여자치곤 운동신경이 있다”, “엄마처럼 잘 챙겨줘….” 그러나 연애할 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여성스럽다는 말은 싫지만 여성스러워 보이려 애쓰는 것,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지만 남자 친구를 잘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즉 남녀 관계에서 여성의 역할을 스스로 규정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되새김질한다는 것이다. 머리론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오래된 관념대로 행동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이 인지부조화된 상태는 나는 물론이고 상대 역시 혼란스럽게 한다. 나는 신여성일까, 구여성일까? 나는 페미니스트일까, 아닐까? 심리치료사이자 〈내 안의 가부장〉의 저자 시드라 레비 스톤은 책에서 무의식적으로 스며든 ‘내면 가부장’이 이런 혼란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내면 가부장은 우리를 여성으로 정의하며 진정한 여성이라면 어때야 하는지, 여성의 능력과 한계는 무엇인지 정해준다.(중략) 내면 가부장은 모든 여성적인 것들과 여성이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긴다.” 나는 이와 같은 내면 가부장이 여성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을 ‘감정 코르셋’이라 명명하고 싶다. 지난 몇 년 동안 여성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꾸미지 않을 것’을 선언한 탈코르셋처럼, 우리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가부장은 여성 내면의 코르셋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지만 감정 코르셋은 쉽게 우릴 놓아주지 않는다. 무서운 건, 남녀 모두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아 나도 모르는 새 그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관계를 망치는 감정 코르셋

“나이 많고, 기 센 여자는 매력이 없을까?”
내 나이 39살. 소개팅이든, 선이든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자리는 한없이 줄어들고 있죠. 회사 사람들은 저를 기 센 싱글녀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굳이 일터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자로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점점 연애 시장에서 멀어지는 나이와 성격이 갖춰진 것 같아 걱정이에요. 왜 남자 나이와 여자 나이는 이토록 다른 걸까요? 남자도 나이에 대한 초조함이나 불안감이 있긴 할까요? -김지나(가명, 디자이너)


cosmo says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을 쓴 이민경 작가는 “기가 센 여성은 연애하기 힘든 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관점대로 발언하는 여성은 이성 연애의 각본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 그리고 “남성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연애 각본의 전형이고, 기가 세다는 말이 그 전형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연애하기 좋은 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고 반문한다. 결국 연애하기 좋은 사람은 그들의 각본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여성을 원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여성의 나이에 대한 이중 잣대를 두고 이민경 작가는 “여성이 생물학적인 연령과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조로하는 데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라며 “어떤 이들은 30살에 자살해야겠다고 말하기도 하죠. 사회적으로 생명력을 가진 나이와 여성이 실제 삶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나이는 다르다고 해요. 남들이 좋다고 하는 20대 여성은 사실 불안과 취약함에 시달리는 집단이죠. 객관적인 수치로 50세 비혼 여성의 만족감이 더 높다고 해요”라고 설명한다.
 
 
“남자는 주기적으로 해줘야 해?”
그날은 유독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남자 친구의 잠자리 요구를 거부했어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미안하다 말하고 각자 잠이 들었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자기야, 내 거는 자기 거잖아. 자기가 안 해주면 나 누구랑 해~”라며 다시 한번 관계를 시도하더라고요. 전날 밤에 거부한 게 미안하긴 했지만 서둘러 출근해야 하는 전 부담스러웠어요. 제가 거절하자 그는 크게 화를 내더라고요. 남자는 여자와 달리 성욕을 제때 풀지 않으면 힘들다면서 말이죠. 분명 싫었지만 ‘그의 요구에 응해줬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드는 건 뭘까요? -손수현(가명, 마케터)


cosmo says 〈내 안의 가부장〉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내면 가부장은 남성의 발기에 대해 여성이 책임감을 느끼도록 만든다고 한다. 반대로 여성이 적극적이면 어떻게 될까? 그 상황을 반기는 남자도 있겠지만 ‘여자가 너무 밝힌다’고 치부하기도 한다. 사실 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남녀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성매매 업소를 드나드는 남성에 대해 남녀의 반응이 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민경 작가는 “성매매는 여성의 신체를 재화로 거래할 수 있는 수단이라 보고, 거래를 했으니 신체에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다는 사고를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범죄 행위”라고 단언한다. “성을 구매하는 남성은 사고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파트너에게 심각한 질병을 옮길 수도 있는, 신체적으로도 결함이 있는 존재예요. 성매매를 하는 것이 취향이나 본성 같은 문제와 무관하고 용서나 재고의 여지가 없는 이유죠”라고 말한다.
 
 
“엄마 같은 여자가 돼야 해?”
남자 친구의 어머니를 만난 자리였어요. 어머니가 남자 친구에게 “요즘 눈이 많이 안 좋아졌다며? 오늘 엄마가 당근 갈아놨으니까 그거 마시고 가렴”이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우리 J가 이런 걸 잘 챙겨 먹질 못 하니까 나중에 결혼하면 이것저것 잘 챙겨줘”라고 당부하듯 말씀하셨어요. 그 순간엔 “네”라고 웃으며 답했는데 곱씹어볼수록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저 역시 남자 친구처럼 자취하며 살고 있고, 저희 엄마 눈엔 저 또한 잘 챙겨 먹지 못하는 딸인데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의 어머니처럼 남자 친구에게 때마다 영양제를 챙겨주고, 필요한 것들을 대신 사다 주고 있었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왜 저는 그의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는 걸까요? -진미선(가명, 회사원)


cosmo says 내면 가부장이 정의하는 여성스러움 안에는 이렇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자를 돌보며, 요리나 청결, 분위기 같은 것을 주도하는 건 여자라는 것이 내포돼 있다. 이민경 작가는 “여성들은 자신이 왜 육체적·감정적 노동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끊임없이 노동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여성들은 그걸 감수하는 대신 왜 이 노동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해요”라고 말한다. 그걸 생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매정하거나 사랑이 부족하다는 비난이 개입되진 않는지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여성은 너무 많이 노동하고, 노동하는 자신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많아요.”
 
 
“남자의 눈물은 부담스러워?”
제 남자 친구는 섬세하고 배려심 있는 데다 요즘에 보기 드문 젠더 감수성을 가진 남자예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회사에서 힘든 일을 토로하는 건 물론이고, 어느 날은 켜켜이 쌓아놓은 저에 대한 서운함을 말하며 울먹이더라고요. 사실 저도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지만 그의 말을 듣느라 참고 또 참았는데 말이죠. 든든하고 묵묵한 남자들에 비해 남친이 너무 나약해 보여요. -이서연(가명, 회사원)


cosmo says 여성의 내면 가부장이 남성에 대해 강하게 발동한 것이다.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세심한 남자를 만났지만, 남성이 너무 고통에 민감하거나 무기력해 눈물을 보일 때 여자들은 민망해한다. 이때, 여성의 격려에 힘입어 감정을 인정받았던 남성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내 안의 가부장〉에서는 요즘 들어 이와 같은 충돌이 더욱 자주 일어나는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자아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 자아는 남자를 격려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이 많은 여성이고, 다른 자아는 내면 가부장이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더해 남성은 어때야 한다는 가부장적 기준이 두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감정 탈코르셋하려면?

우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 실제로 최근 대출받아 집을 산 40대 초반의 여성 J는 “남자 만나려고 혈안이 된 후배에게 그랬어요. 그럴 시간에 열심히 일해서 돈 모으라고요.  제가 집을 사고 보니 딱히 연애를 해야 할 필요성도, 결혼하고 싶은 욕망도 사라지더군요”라고 말한다. 〈내 안의 가부장〉에서도 내면 가부장은 남자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당신을 경제적으로 돌봐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만약 경제적으로 독립한다면 독립적인 개인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수입, 저축, 투자, 주택 자산, 대출, 연간 지출 등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건 적절할 때 인간미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성은 인간미 있고, 열린 마음과 풍부한 감정으로 따뜻하게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역시 감정 코르셋 중 하나다. 객관적으로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침착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최고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스스로를 보호하고, 또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부디 당신의 내면을 옥죄고 있는 코르셋을 벗어던지길.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