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예요

용감한 자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한편의 소설과 한편의 그림이 도착했다.

프로필 by 이예지 2024.10.03
잘못이 아닌 것
내 비밀이 드라마에 나오고 있잖아.

두 눈을 껌뻑거리며 동희는 생각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텔레비전 화면의 가장자리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고 적혀 있었다.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인기 있었던 드라마라는 것쯤은 동희도 알고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여성 변호사가 주인공이라는 것도, 드라마가 퍼뜨린 몇 가지 유행어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희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드라마의 작가와 감독을 검색해보았다. 누군가 동희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드라마 속 ‘우영우’와 동희는 닮아 있었다. 동희를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놓칠 때가 잦았다. 방이나 건물을 빠져나올 때마다 수행해야만 하는 자신만의 법칙(반드시 첫 번째 타일을 건너뛰고 두 번째 타일을 밟아야 한다)들이 있었고, 집중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손가락을 까딱거리거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식품의 성분표를 분석하는 일을 좋아했고, 자신의 이름 철자와 법칙이 같은 단어들을 외우고 다녔다. 동희, 놋쇠, 낙관, 플롯, 봉황, 클론, 굉음, 옹호, 홍학, 총합, 송환, 종합병원…. 모두 첫 글자의 받침을 다음 글자의 자음으로 쓸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세로로 쓰면 글자들을 겹쳐 쓸 수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우영우는 좋아하는 남성과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우영우는 남성과 도로를 함께 걸을 때면 차도 쪽 자리에 서서 남성을 안전하게 에스코트했다. 레스토랑의 테이블에 앉기 전에는 남성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주었다. 동희는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남성과 여성에게 기대되는 성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오랜 관습을 학습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구어체보다 문어체를 사용하는 말투도 비슷했다.

다음 날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동희는 채경에게 말했다.

“면담을 신청하고 싶은데요.”
‘면담’이라는 단어 때문에 채경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동희의 단어 선택을 채경은 매번 재미있어 했다. 그 웃음이 애정의 표현이라는 것쯤은 동희도 알 수 있었다. 회사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고민이 무엇이냐고, 채경이 동희에게 물었다. 동희는 우영우와의 공통점을 채경에게 털어놓았다. 채경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우선 동희에게는 우영우와 같은 천재성이 없었다. 또한 동희는 우영우와 닮아 있는 모습들을 채경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최대한 숨기며 살아왔다. 동희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놋쇠, 낙관, 플롯, 봉황…’ 등의 단어를 줄줄이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카페 바깥 인도에서 노란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연속으로 네 번 지나갔는데도, 동희는 그 발견을 굳이 외치지 않았다. 철저하게 다이어트 식단을 지키는 사람처럼, 매 순간 되뇌고 참으며 자신을 억누른 결과였다. 끝내 숨길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상대방이 전달한 정보가 이해되지 않을 때, 정보에서 누락된 지점이 있을 때, 정보가 잘못됐을 때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동희의 입에서 저절로 확인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회사에서는 매번 사원들이 점심 식사 메뉴를 고른다는 부장의 말을 들었을 때, 동희는 지난 사흘 동안 점심시간마다 부장님이 선택한 동태탕을 먹으러 갔다고 말해버렸다. 일하는 여성보다 가정주부의 행복감이 통계적으로 더욱 높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동희는 자신도 그 기사를 읽었다고 얼른 맞장구쳤다. 그러고는 일하는 여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줄지 않기 때문에 도출된 통계라는 정보가 누락됐다고 재빠르게 덧붙였다. 남자는 젠틀해야 하고 여자는 우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 사람에게 끈질기게 질문했다. “왜죠? 근거가 뭐지요?” 상대방이 대답을 얼버무리며 화제를 바꾸려 하면 동희는 잠시 뒤에 되물었다. “그런데, 제가 잘 이해를 못 했습니다. 왜 남자는 젠틀해야 하고 여자는 우아해야 하나요?” 동희는 아무런 저항 없이 커피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아무런 저항 없이 남성 상사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려 드는 사람이었다. 동희는 공격적이고 까탈스러우며 괴짜인 데다 유머 감각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동희는 누군가를 공격하려 한 적이 없었다. 까탈을 부리려 한 적도,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려 한 적도 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물어본 것뿐이었다. 잘못된 사실에 대해 잘못됐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인지 동희는 헷갈렸다. 동희가 입을 열 때마다 얼굴이 굳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채경의 얼굴에서만큼은 묘한 미소가 번졌다. 회의가 끝날 때마다 채경은 남몰래 동희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이스.” “완전 웃겼어요. 최고야.” 동희와 둘이 있게 되면 채경은 동희의 말을 재연하며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동희가 너무나 좋다고, 지금껏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채경은 말했다.

동희의 설명을 다 듣고서야 채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 채 살아가는 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채경도 페미니즘 리부트 때야 자신이 누구인지 겨우 눈을 떴다고 덧붙였다.

“자폐인이 나오는 영상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인 거죠?”
채경이 동희에게 물었다. 동희는 고개를 저었다. 자폐인이 등장하는 콘텐츠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영화 <말아톤>과 <레인 맨>, 드라마 <굿 닥터>. 그 영상 속의 주인공들을 보며 동희는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우영우에게서만 동질성을 발견한 걸까.

“이유를 몰라요?”
채경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동희는 모른다고 답했다.

“우영우만 여자잖아요.”
같은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요구되는 성 역할의 차이 때문에 그 증상은 다르게 발현될 수 있다는 것, 장애 진단 기준이 남성으로 되어 있고 그 때문에 어떤 장애는 여성들에겐 진단 비율이 낮다는 사실을 채경은 말해주었다. 비로소 동희는 퍼즐이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실패만 반복했던 인간관계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인성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자책해야만 했던 나날들. 무엇인가를 꾸준히 숨겨오면서도 숨겨지지 않음에 괴롭던 날들.

“그럼 제 잘못이 아니었던 거군요.”
동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채경에게 말했다.

“잘못이라니요?”
채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부장님만 밥 먹을 때 숟가락을 안 놓느냐고 물었던 거라든가요. 왜 신입사원 월급이 성별에 따라 다르냐고 물었던 거라든가요. 다 제 잘못인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제가 장애 때문에 그랬던 거라면….”
채경은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동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동희 씨. 그건 잘못이 아니잖아요.”
채경은 한 단어 한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동희는 아무것도 잘못한 적이 없다고. 싸우겠다는 의지도 없이, 그래서 싸움에 대한 지침도 없이, 진실을 진실 그대로 말하면서 살아가는 동희 씨가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왔다고. 그리고 채경은 동희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동희가 사람들을 보며 행동을 학습해왔던 것처럼, 채경 또한 동희를 보며 학습을 해나가겠다고 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말하는 학습을. 귓속말로 응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동희는 참아왔던 말을 채경에게 꺼냈다.

“말을 강조하고 친밀감을 표현하려고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요, 저는 손을 덥석 잡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채경은 동희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며 물었다.

“미안해요. 그럼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아요?”
“검지를 들어서 보여주는 건 어때요?”
채경은 검지를 들어 동희에게 이렇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조금 더 위로, 눈썹 선까지 들어달라는 동희의 말에 손가락을 눈썹 가까이 가져다댄 채 채경이 말했다.

“이 회사에 동희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동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검지를 들고 답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Writer 임솔아 소설 <최선의 삶>,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등을 썼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다행히 몇몇 사람에게는 재밌다는 말을 듣는다.

Credit

  • Editor 이예지
  • Writer 임솔아
  • Illustrator 김라온
  • Art designer 장석영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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