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여성들은 왜 과거와 싸워야 하는가?
남성 가해자가 '창창한 미래' 덕분에 감형 받을 때 여성 피해자는 '무결한 과거'를 증명해야 하는 이 세상에서, 무력감을 잃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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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에서 “머리가 짧으니 페미니스트”라며 편의점에서 근무 중이던 처음 만난 20대 여성을 폭행한 20대 남성 가해자는 변호사를 통해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창창한 미래를 생각해달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한편 2020년 피해자의 가족과 남자 친구에게 피해자가 유흥업소에서 근무했던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해 여섯 차례 성폭행한 가해자 남성은 “피고인이 아무런 범죄 전력이 없는 초범이고, 아직 개선·교화의 여지가 남아 있는 20대의 비교적 젊은 청년”이라며 징역 3년으로 감형받았다. 심지어 해당 판결을 내린 판사는 2023년 대법원장 후보 자리에까지 올랐다.
여성이 피해를 호소할 때는 과거를 묻고 의심하고, 남성이 가해자가 되었을 때는 아직 오지도 않은 창창한 미래를 감안해줘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여성은 왜 피해자가 되어도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와 싸워야 하는 것일까?
남성들은 미래의 잠재력에 대한 고평가 외에도 각종 이유로 감형받는다. 여성신문이 2023년 5월부터 2024년 5월까지 내국인이 범행한 집단 성폭력 26개 사건의 판결문 47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 중 76.9%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가해자들이 감형받은 이유는 다양하다. ADHD 증상이 있어서,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질러서, 부친에게 간을 기증해서, 먹여 살릴 가족이 있어서 등 각양각색이다. 이 사회는 여전히 남성들의 성범죄에 관용적이다.
반면 같은 분석에서 법원이 성범죄 피해자에게 들이미는 잣대라는 것은 정말 놀라울 만큼 엄격하다.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에게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들이민다든지, 성인 남성들이 13세 중학생들에게 술을 먹여 성폭력을 행사하고 불법 촬영까지 했는데도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며 감형해주는 식이다. 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려다가 저항에 부딪힌 경우에는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준강간 무죄’로 판결하기도 했다. 현행법은 피해자에게 ‘심신상실이나 항거 불능’이었는지를 묻고, 피해자가 피해 당시를 조금이라도 기억하면 형법 297조 일반 강간죄가 적용돼 ‘폭행 또는 협박’을 입증해야 한다.
여전히 재판정에서 이렇게 부당한 기준에 의해 적용되고 있는 성폭력에 대한 형법도 사실 역사적으로는 긍정적인 변화를 통해 개선되어온 결과다. 현재 성폭력을 규정하고 있는 형법 제32장의 제목은 ‘강간과 추행의 죄’이다. 1995년 개정 전까지 형법 제32장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바로 ‘정조에 관한 죄’였다. 어처구니없지만 처음 한국의 형법이 제정될 무렵에는 성범죄의 보호법익이 여성의 ‘정조’였다. 그러니까 이 말은 평소에 정조를 지키지 않았던 여성은 성폭력을 당해도 피해를 인정해주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형법 제34장에 2009년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폐지된 제304조 혼인빙자간음죄가 있다. 혼인빙자간음죄란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것이다.
죄라는 것의 규정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정조에 관한 죄’는 1995년 개정되면서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호하는 죄로 본질이 달라졌다. 그리고 2005년부터는 성 노동 종사자에 대한 성폭력 사건도 본격적으로 유죄가 선고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성 노동 종사자에 대한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 여성 진술의 신빙성이 쉽게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금전적 대가를 바랐거나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판단되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유흥업소 종사자에 대한 강간죄도 인정될 수 있다는 첫 대법원 판례를 만든 건 2005년 김영란 전 대법관이다. 2005년 노래방 도우미 여성에 대한 성범죄 사건의 주심을 맡은 김영란 당시 대법관은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1·2심을 뒤집고 “피해자가 (사건 발생 당시)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 협박 등 강제성이 없었다고 봐선 안 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사법이 변화하는 시간을 발목 잡고 늦추는 것은 문화의 지연이다. 2024년에 여성들의 과거를 문제 삼는 것은 이제 남성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넷플릭스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더 인플루언서>에 출연하는 아프리카TV BJ 과즙세연은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과 같이 찍힌 사진과 함께 자신의 온라인 방송에서 ‘별풍선’을 벌기 위해 노출 등 자극적인 콘텐츠로 돈을 벌어왔다는 이유로 질타당하고 있다. 게다가 그를 비난하는 상당수가 여성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과즙세연이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는 방송으로 남성들로부터 돈을 벌었다는 것을 두고 반페미니즘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나아가 온라인에서 성적인 콘텐츠로 돈을 벌던 여성이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를 얻고 명예를 얻는 것은 성적인 콘텐츠를 긍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잘못됐다는 비난도 따르고 있다.
앞서 트위치 스트리머 출신 멤버들로 구성된 4인조 걸 밴드 QWER도 데뷔 전 주요 시청자층이 남성인 스트리밍 방송으로 돈을 벌었다는 이유와, 한 멤버가 과거에 해당 방송에서 페미니스트를 욕했다는 이유로 여성들로부터 맹비난을 받고 있다. 페미니스트를 욕했다는 사실도 QWER에 대한 비난의 주요 이유지만, 그보다 먼저 그들이 여성 BJ 출신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됐다. 많은 사람이 여성 BJ가 스트리밍 방송에서 노출을 했든 하지 않았든 일단 남성이 주요 시청자층인 스트리밍 방송을 통칭해 ‘여캠’이라고 낮춰 부른다. 그리고 “여캠 출신도 아이돌이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은 잘못됐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남성들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거나, 성적인 콘텐츠로 돈을 벌던 과거가 있는 여성은 이후에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걸까? 그러한 여성들이 다른 일을 하기로 선택했고,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여성에게 미래에 대한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뜻은 아닐까? 그런데 왜 남성들처럼 다른 여성들의 과거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 것일까?
많은 사람이 여성 차별에 반대한다고 자처하면서도 성적인 콘텐츠를 판매하거나 성 판매 과거를 가진 여성에 대해 도가 지나친 비난을 일삼으며 여성의 과거에 대한 낙인을 강화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 시대적인 이유가 있다면, 많은 이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성(性)으로 돈을 버는 것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또 다른 의미의 공정 담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과거 여성의 성에 대한 낙인을 재생산하는 것은 결국 모든 여성으로 하여금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를 검열하게 하고, 결국 다시 쯔양과 같은 해명을 반복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에서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것이 우리가 원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라면, 미래를 당기는 것은 남성들로부터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여성들과, 이에 연대하는 일뿐 아닐까?
Writer 연혜원 <퀴어돌로지> 기획 및 공동 저자, 퀴어 예술 매거진 <them> 발행인, 사회학 연구자.
Credit
- Editor 이예지
- Writer 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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