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민희진이라는 스펙터클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진다. ‘Fun’하고 ‘Fearless’한 2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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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자기 계발서 분야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던 책, <린 인(Lean In)>의 저자이자 메타의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공한 여성은 미움을 받는다.” 책 속에는 이에 대한 재밌는 사례가 하나 소개되는데, 동일한 성공 사례를 두고 주인공 이름을 여성형과 남성형으로 다르게 제시해 주인공의 인상을 평가하게 하자 남성 이름일 때는 주인공을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동료로 보는 반면, 여성 이름일 때는 이기적이며 고용하고 싶지 않거나 그 밑에서 일하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는 평가가 돌아왔다. 셰릴 샌드버그는 이 사례를 언급하며 남성에게는 성공과 호감도가 연결되지만, 여성에게는 성공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성공한 여성을 향한 호감도가 남성에게서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서도 똑같이 추락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서는 어떨까?
1990년대생인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지금만큼 여성의 성공과 여성 간 연대가 활발하게 주목받고, 인기 있는 콘텐츠가 되는 시대는 없었다. 그 이유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도 있겠지만, 미디어 환경의 변화도 기여했을 것이다.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 OTT, 팟캐스트와 같은 뉴미디어 산업의 팽창으로 뉴미디어의 영향력이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력을 앞서면서 여성 엔터테이너들은 남성 진행자와 남성 출연진 중심의 전통적인 미디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뉴미디어에서 독립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미디어의 변화는 여성 콘텐츠를 갈망하는 여성 시청자들의 수요와 맞물리면서 보다 신속하게 여성이 진행하고 여성이 중심이 되는 콘텐츠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기술적인 징검다리가 돼줬다. 팟캐스트 <송은이&김숙 비밀보장>, 유튜브 <문명특급>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4월 25일, 하이브가 제기한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배임 의혹에 맞선 민 대표의 기자회견은 비속어를 비롯해 ‘개저씨’, ‘맞다이’와 같은 비공식적인 언어의 쓰임으로 대중에게 큰 충격을 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충격과 동시에 열렬한 환호가 이어진 것은 앞서 말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많은 사람이 민 대표의 기자회견을 유튜브로 시청했다. 만약 민 대표 기자회견의 주요 수신 경로가 텔레비전과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였다면 반응은 똑같지 않았을 것이다. 뉴미디어가 익숙한 세대에게 민 대표의 기자회견 속 비속어와 비공식적인 언어의 쓰임은 유튜브라는 미디어와, 시가총액이 10조가 넘는 하이브에서 ‘뉴진스’를 성공시킨 가장 잘나가는 레이블인 어도어의 대표이자 SM엔터테인먼트 재직 당시부터 소녀시대와 에프엑스, 샤이니 그리고 엑소를 연달아 성공시킨 ‘민희진’이라는 전대미문의 캐릭터가 결합되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스펙터클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미디어에서 금기를 넘는 것은 더 이상 제재의 대상이 아니라 SNS 타임라인을 한동안 뒤집어놓을 구경거리에 불과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하여 ‘민희진’이라는 성공한 여성은 자신을 향한 불호를 스펙터클로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그것이 민 대표의 전략이었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비약이지만, 그럼에도 민 대표는 직접 말하기를 선택함으로써 그 자신이 스펙터클이 되기를 자처했다.
민 대표의 기자회견 이후 비난의 화살이 방시혁 대표로 옮겨가면서 전세가 역전됐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하지만 ‘민희진’의 태도를 지켜보는 여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분열돼 있다. 민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남자 임원들에 대한 저격에 카타르시스를 느낀 여성들이 존재한다면, 민 대표가 드러낸 날것의 표현에 감정적인 직장 상사를 대입하며 불호를 드러내는 여성들도 있다. 나아가 아이돌 산업의 아동·청소년 착취와 여성 혐오적인 성격을 강조하며 비윤리적인 산업에서 성공한 여성이 남성을 고발했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여성으로서 연대감을 느끼는 것에 반기를 드러내는 여성들도 존재했다. 이렇게 성공한 여자의 울분을 지켜보는 여자들이 같은 편이 돼줄 수만은 없었던 이유는 여성 간의 관계는 당연히 그보다 복잡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여성들은 여성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여성의 창작물과 여성이 일하는 과정이 윤리적이었기를, 어떤 착취에도 연루되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은 여성이 여성에게 유독 더 가혹해서 그렇다기보다, 그만큼 여성에게 심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성공한 여성이 희박한 사회인 만큼 성공한 여성일수록 다른 여성들에게 역할 모델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 여성들은 성공한 여성에게 더 큰 기대와 엄격한 기준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는 성공한 여성들에게 더 기대하게 하는 만큼, 성공한 여성이 중심에서 이탈하는 것도 쉽게 만든다. 여기서 이탈이란 작은 실수가 될 수도 있고, 어떤 규범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일 수도 있다. 남성 중심의 사회, 특히나 일터에서 체계와 규범은 여성의 편이었던 적이 없으므로 아무리 성공한 여성이라도 이러한 구조를 타파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성을 위한 사회가 아니기에 더더욱 성공한 여성 개인에게 더 큰 기대를 하게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여성들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성공한 여성이 가진 막대한 부와 권력, 책임을 근거로 여성으로서 동일시하기를 거부하기도 하며, 이것은 한편으로 일리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어느 위치에서나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 다시 돌아가 우리는 ‘민희진’이라는 스펙터클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곤경을 헤쳐나가는 그에게 일방적으로 편이 돼줄 필요도 없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다만 여성에게 가지는 기대의 크기에 때론 질문하며, 개인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는 만큼이나 여성에게 편협한 사회를 함께 인식하고, 그 편협함에 목소리 내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나 짚어볼 문제는, 민희진 대표의 2시간 15분에 걸친 긴급 기자회견 가운데 ‘개저씨’나 ‘맞다이’와 같은 비공식적인 언어를 써서 밈이 된 영상은 5분이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2시간 10분은 이 사태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에 대한 곡진한 설명과 호소였음에도 우리는 마치 그 5분이 긴급 기자회견의 전부인 것처럼 밈이 되고, 화제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희진 대표의 이번 기자회견은 오히려 그에게 우호적인 대중을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공감을 샀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에게 가혹한 미디어 환경이 새로운 미디어 수용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이번이 특수한 사례였던 걸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문제가 스펙터클로 전환되면 단기간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어모을 수는 있어도 문제의 근원을 지속적으로 첨예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스펙터클이 되지 못해 영원히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는 문제들의 존재이다.
Writer 연혜원 사회학 연구자. 책 <퀴어돌로지>를 기획하고 함께 썼으며, 퀴어 예술 매거진 <them>을 발행하고 있다.
Credit
- Editor 이예지
- Editor 천일홍
- Writer 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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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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