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여자로서 첫 발자국을 새긴 한국 최초의 여성 7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존재감이 흐릿하던 시절, 지워지지 않는 첫 발자국을 새긴 7명의 여성에게 ‘샤라웃’을 외친다.

프로필 by COSMOPOLITAN 2024.03.05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1901 ~1988)
일제강점기에 여자로 태어난 권기옥에겐 꿈이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 막연한 꿈으로 시작된 그의 목표는 점차 구체화됐다. 비행사가 돼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도쿄로 가 일왕의 궁을 폭파하는 것. 권기옥은 중국으로 건너가 윈난항공학교에 입학해 각종 교육과 훈련을 마치고 비행사가 됐다. 비록 비행기를 타고 폭탄을 투하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그는 충칭 임시정부 산하에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여성들을 독립운동에 끌어들이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등 애국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광복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온 권기옥은 전 재산을 장학 사업에 기부하고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밑거름이 된다. 군용 비행기를 조종하던 항공인 독립운동가, 권기옥의 일대기를 그린 웹툰 <꿈의 날개>는 카카오페이지에서 무료로 열람 가능한데, 권기옥의 끈질긴 집념과 뛰어난 능력을 짐작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 열사 권기옥은 여성이라 가지 못할 길은 없다고, 그 시대에도 지금도 유효한 메시지를 전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1914~1998)
변호사 이태영은 여성이 대학을 다니는 것도 흔치 않았을 시절인 광복 직후,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한 최초의 여학생이었다. 수석으로 졸업해 판사에 지원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용되지 못했다. 그 길로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돼 가난한 여성들에게 무료로 법률 상담을 해주며 가족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결혼을 한 여자는 행위무능력자가 돼 법률행위 시 남편의 동의가 필요한 제도인 ‘처의 무능력제도’ 등을 문제 삼은 그의 투쟁 끝에 1958년, 가족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태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가정법원을 설립했으며 가부장제의 근간인 ‘호주제’를 뿌리 뽑기 위해 힘썼다. 호주제는 2005년에 폐지되며 한부모가족과 같은 다양한 유형의 가족이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여성 법조인의 존재를 한 톨의 편견도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 오늘, 저편에는 투쟁의 삶을 산 최초의 여성 변호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경의를 보낸다.
 

한국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  

 박미옥(1968~) 
“어디 여자가”부터 “현장에 웬 냄비가 왔냐”, “립스틱 정책이냐” 등등 여성 비하 발언을 수도 없이 들은 형사 박미옥은 그들의 말을 대차게 받아치면서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미행과 같은 위장 수사를 주로 맡았지만 곧 성폭행 사건, 스토킹 사건, 마약 범죄, 살인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연이어 맡으면서 특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2000년,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이 돼 신창원 탈옥 사건, 유영철 연쇄 살인 사건 등 강력 사건 해결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활약엔 날카로운 판단력과 발로 뛰는 체력,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기민함, “범인을 잡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범인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 끊임없이 연구하는 수사 태도가 있었다. 많은 미덕 중에서도 밑줄 긋고 싶은 것은, 많은 범인을 검거한 그의 철학은 형사라면 모름지기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 박미옥은 2021년 명예퇴직했고, 많은 경찰과 여성들에게 귀감으로 남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임영신 (1899 ~1977)
독립운동가이자 중앙대학교 설립자 임영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초대 상공부(현 산업자원부) 장관이 된다. 취임 첫날 “어찌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에게 결재 서류를 들고 가 고개를 숙이겠냐”는 직원들의 쑥덕임에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왜놈과 맞서 싸웠고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못지않게 뛰어다녔다. 그런 나에게 결재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지금 당장 책상을 정리하라. 언제든지 사표를 수리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해 남성 간부들에게 경외감을 심어줬다. 여성의 사회 참여 자체가 드물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행보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 임영신은 장관에서 그치지 않고 1949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타이틀까지 쟁취했다. 그 후로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 국회의 여성 의원 비율은 19%에 그친다. 더 많은 제2의, 제3의 임영신들이 국회에서 활개를 칠 날을 고대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카레이서 

 
카레이서 김태옥은 1993년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1996년, 4명의 자녀에게 유서를 남기고 지옥의 랠리를 완주하러 떠난다. 그리고 유럽에서 시작해 사하라사막을 건너 아프리카까지 가는 지상 최대의 자동차 경주인 파리-다카르 랠리를 한국 선수 최초로 완주한다. 50℃ 이상의 극심한 일교차를 견뎌야 하고 사막과 안데스산맥 구간이 포함된 오지의 비포장도로를 열흘 이상 달려야 해서 당시 완주율도 30%에 그치던 코스다.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돌연 카레이서에 도전해 볼케이노 레이싱팀에 입단했지만 “아줌마가 주책”이라는 말과 싸워야 했다. 김태옥은 남자들 틈에서 밤새 차량을 정비하고 테크닉을 익히며 입단 4년 만에 여성 단장이 됐다. 그는 1989년 부산에서 열린 짐카나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고 한국모터챔피온십 여성전에서 우승을 포함, 각종 레이스 28개에서 우승했다. 그의 눈부신 활약에 국내에도 여성 카레이서가 늘어났고, 여성 라운드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질주하는 스포츠카 같은 김태옥의 인생에 후진이란 없다. 돌아가더라도 앞으로 전진할 뿐. 금기를 깨고 편견에 맞서는 여성의 도전은 늘 ‘델마’와 ‘루이스’처럼 용맹한 것이니까.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1877~1910)
여성이 어떻게 의사에게 몸을 보이냐는 편견 때문에 조선의 여성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의사는 당연히 남자였고 의사는 남성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미국의 의료선교사이자 여성 의사인 로제타 홀은 조선의 여성을 진료하고 여성 의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박에스더는 통역일을 돕다 로제타가 구순구개열 수술을 집도하는 것을 지켜보고 의사의 꿈을 키웠고, 로제타는 그가 미국 의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 박에스더는 조선으로 돌아와 평양의 광혜여원과 서울의 보구녀관을 세우고 18000여 건 이상의 진료를 봤다. 거리가 먼 곳은 당나귀를 타고 다니며 왕진했다. 그렇게 죽어가던 많은 여성들을 치료하고, 선교에도 힘쓰다가 과로와 결핵으로 서른다섯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한 세기가 흐른 지금, 한국의 여성 의사 비율은 25.7%에 이르며 점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 ~2017)
등에 갓난아기를 업고 한 손에는 기저귀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메가폰을 든 감독이 있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이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에 투자하려는 사람이 없자 제작비를 직접 마련하고,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의 밥까지 손수 지어 먹였다. 촬영이 끝난 후엔 편집과 배급 역시 도맡아 했다. 후반 작업 때는 녹음실 스태프가 “여자의 작품을 녹음할 수 없다”며 작업을 꺼리기도 했다고. 온갖 차별과 맞선 끝에 겨우 첫 독립 장편영화 <미망인>을 극장에 올렸다. <미망인>은 한국전쟁 후 남편을 잃은 주인공 ‘신자’가 홀로 어린 딸을 키우면서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아내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신자’와 그로 인해 겪는 내적·외적 갈등, 여성의 시각으로 연출한 감정선이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여성 감독으로서 새로운 시선과 앵글을 선보였고 배우의 연기를 훌륭하게 이끌어냈다는 평단의 인정을 받은 작품이다. 그 후로도 홍은원 감독, 최은희 감독이 여성 영화감독의 맥을 이었다. 한국 영화 산업이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지금도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영화가 주류는 아니지만, 여성 서사를 그려낸 크고 작은 영화들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여성 영화인 모임이 3년마다 ‘영화계 성희롱, 성폭력 실태조사’를 시행 중이고,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설립해 성희롱·성폭력 지원 및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는 등 한국 영화 산업은 점점 나아가고 있다. 카메라 뒤에서 고독, 빈곤, 편견, 차별과 싸웠을 박남옥 감독이 닦아놓은 그 현장 위에서.   

Credit

  • Editor 김미나
  • Art designer 장석영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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