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뜨거운 감자, 아이유 'Love wins all'을 보는 새로운 시선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진다. ‘Fun’하고 ‘Fearless’한 2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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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재현의 문제로 제목부터 뮤직비디오 내용까지 뜨거운 감자가 된 아이유의 신곡 ‘Love wins all.’ 아이유를 향해 쏟아진 질책 속에 당사자 중심주의에서 조금 비켜서본다. 그리고 이것을 ‘소수자의 편 확장하기’라는 전략으로 가져간다면 어떨까? 당사자 중심주의 없이도
」
웃자고 하는 이야기냐고?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다. 이런 과격한 해석이 아니라면 ‘Love wins all’은 그저 예쁘고 잘생긴 남녀가 대형 쇼핑몰에서 길을 잃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 결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장애 극복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했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있지만, 애당초 장애 재현이 충분하지도 않다는 이야기다. 피어싱과 오드아이 렌즈라는 상징으로 축소된 그들 장애는 탈착 가능한 패션 액세서리처럼 다뤄진다. 그마저도 정상 몸 규범을 내면화한 ‘캠코더’를 통해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5분 23초의 짧은 시간 동안 ‘말하지 못하는 이와 왼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라 할지라도, 장애 몸으로부터 장애는 그렇게 간단히 분리되지 않는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면 오늘날 문화예술계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장애의 물신화에 일조하게 될 뿐이다. 장애 몸의 복잡한 현실이 아니라 장애 몸의 매력적인 표면만을 전유하는 현상 말이다.
‘Love wins all’은 위협적인 세계와 약한 우리를 대비시키는 정형화된 소수자 서사의 구도를 따르는 뮤직비디오다. 많이 본 이야기, 그러니 굳이 또 만들 필요는 없을 이야기다. 장애라는 소재를 화두로 던졌으나 장애를 은유 또는 장치로만 사용할 뿐 제대로 다룰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 결과 아이유와 뷔의 열연만 남았다. 흥미롭게도 많은 이들이 뮤직비디오가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아이유를 꼽는다. 중증 트위터 중독자인 나는 그간 타임라인에서 아이유의 소수자 재현에 대한 ‘가난한 상상력’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몇천, 몇만 알티짜리 ‘대형’ 트윗’과 자주 마주쳤다. 그동안 좋아했는데 이번 건은 실망이라는, 그의 (구)팬임을 내세우지만 실은 수동 공격에 불과한 감정적인 트윗도 쏟아졌다. 태도야 어쨌든 대부분의 트윗은 아이유가 당사자의 관점을 결여한 채 성소수자와 장애인을 ‘낭만화’, 달리 말해 타자화했다는 관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시쳇말로 그가 ‘게으르다’는 것이다.
당사자는 아닐지 몰라도 몇 주에 걸쳐 ‘성소수자’와 ‘장애인’을 트위터의 ‘트렌드’로 끌어올리는 아이유의 저력에 나는 새삼 감탄했다. 확실히 아이유라는 아이콘에 걸맞은 현상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 지적받을 정도로 ‘Love wins all’의 장애 재현에 주목한 기사가 앞다퉈 발행되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는 만평까지 내지 않았던가. “저희가 만들고 싶은 ‘캠코더 세상’은 장애인이 비장애인으로 ‘극복’되는 세상이 아니라 장애인도 함께 이동하고, 일하고, 지역에서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어그로’라니. 아이유가 정말 ‘게으른’ 게 맞는 걸까? 돌이켜보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이유가 앨범 <CHAT-SHIRE>를 발표하며 ‘여성’ 가수의 자기표현, 더 나아가 나르시시즘이라는 화두를 공중에 쏘아 올린 것이 2015년이다. 9년 전, 좋든 싫든 페미니스트의 상징이 돼버린 ‘메갈리아’가 등장한 시기다. 적군은 물론이고 아군 역시 아이유라는 ‘부역자’를 향해 집중 포화를 가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어린 여자 연예인의 자기표현에 가혹한지 상기해본다면, 아이유가 ‘대혐오의 시대’를 견뎌낸 일종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오해하지 말길. 나는 아이유의 편을 들려는 게 아니다. 9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그에게 별다른 사심이 없는 치사한 방관자에 불과하다. 다만 ‘Love wins all’이 재현하는 장애와 서사의 불충분함을 지적한답시고 아이유가 그 어떤 ‘당사자’도 아닐 거라 가정하는 의견들을 역으로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스스로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라는 소수자적 정체성으로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소수자적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경험을 개인의 문제로 고립시키는 대신 어떻게 모두의 문제로 확장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기실 소수자 정치의 역할이 아니던가. 나는 ‘Love wins all’의 뮤직비디오가 어쩌면 아이유가 지난 몇 년간 경험한 청각 이상에 대한 나름의 반응일지도 모른다고 ‘뇌피셜’해본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장애 당사자 미만일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 근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편의 ‘쪽 수’가 많아지는 걸 무조건으로 환영하는 내 입장에서 이건 좋은 신호다. 구태여 장애를 재현할 충분한 자격을 운운하며 그를 다수자 편으로 내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 이제 이 글의 결론에 거의 도달했다. 아이유를 ‘우리 편’ 취급하는 이 사고 실험을 조금만 더 밀고 나가보자. 만약 이 모든 가정이 옳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서 아이유가 ‘진짜’ 당사자로서 정체화하게 된다면, 그때는 “러브 윈즈 올”의 장애 재현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되는 걸까? 알고 보니 그가 바이섹슈얼로서 “러브 윈즈”라는 성소수자 권리 운동의 구호를 전유했던 거라면, 또 난청 환자로서 뮤직비디오 내에서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이”에 비유했던 거라면, 당사자성을 결여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가해진 비판의 몇 퍼센트가 상쇄될 수 있을까? 본인을 제외하고는 그가 어떤 경험을 해왔고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누구도 온전히 알 수 없다. 아이유가 당사자가 아니니 ‘게으른’ 재현을 할 수밖에 없다고 비난하는 대신 재현 자체의 문제에만 집중하자.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를 주목하라”(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바꿔 말하자면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에 주목하자는 이야기다. ‘누가’의 자격을 따지는 것은 효과적인 정체성 정치의 전략이지만, 돌파해야 할 한계이기도 하다. 장애 당사자만이 장애 정체성을 재현할 수 있다면 결국 우리에겐 아주 적은 수의 장애 재현만이 남을 것이다. 우린 아주 많은 수의 장애 재현을 통해서만 정형화된 장애 재현을 박살 낼 수 있다. “러브 윈즈 올”의 피상적인 장애 재현으로부터 교훈은 얻되, 당사자 중심주의에 함몰돼 장애 재현의 자격을 요구하진 말자.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은, 더 나은 장애 재현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Writer 이연숙(리타)
시각예술 비평가. 퀴어 부정성과 시각 문화를 주제로 한 책 <진격하는 저급들>을 썼다.
Credit
- Editor 이예지
- Writer 이연숙(리타)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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