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블과 〈스타워즈〉 시리즈 등 쟁쟁한 프랜차이즈를 갖춘 디즈니플러스를 올해 2중으로 분류한 이유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는 프랜차이즈가 주는 기대만큼 구독자를 사로잡지 못한 지난해 성적 때문이고, 두 번째는 지난 11월 30일 싱가포르에서 야심 찬 출사표를 던진 디즈니플러스의 2023년 라인업이 최민식과 손석구가 출연하는 〈카지노〉, 강풀 웹툰이 원작으로 류승룡·한효주·조인성을 앞세운 시리즈 〈무빙〉, 지창욱과 위하준이 출연하는 사나이픽쳐스표 범죄 액션 드라마 〈최악의 악〉 정도를 제외하면 시장의 질서를 바꿀 만한 오리지널이 아직 많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내가 디즈니플러스보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플랫폼은 완성도 높은 학원물 시리즈 〈약한영웅 Class 1〉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웨이브다. CJ ENM과 스튜디오드래곤 등 자사 계열사로부터 영화, 드라마, 시리즈를 공급받는 티빙과 달리 자체 제작사인 스튜디오웨이브는 창립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개성 있는 콘텐츠 제작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찬호 스튜디오웨이브 대표는 “오리지널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무턱대고 스케일을 키우기보다 ‘에지’를 가지는 데 주안점을 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뚝심에서 강렬하고 완성도 높은 학원물 시리즈 〈약한영웅 Class 1〉이 탄생했으리라. 내년에 공개 예정인 조진웅과 김희애가 출연하는 오리지널 영화 〈데드맨〉, 인기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오리지널 영화 〈용감한 시민〉, 배우 이나영의 복귀작인 〈박하경 여행기〉 등 신작 오리지널은 콘셉트도, 장르도, 출연 배우도 ‘에지’가 느껴진다. 규모보다 한 편을 만들더라도 시청자에게 인정받겠다는 웨이브의 전략이 얼마나 주효할지는 올해 라인업의 결과에 달렸다. 디즈니플러스나 웨이브는 언제든지 티빙의 자리를 위협하는 다크호스가 될 수 있다.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플러스, 웨이브 등 한국 시장에서 오리지널 제작이 활발한 이 4개 플랫폼 간에 웹툰, 웹소설 등 검증된 원작, 연출력을 인정받은 개성 강한 젊은 감독과 작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은 지금보다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시리즈에 도전하는 영화감독들의 숫자 또한 지금보다 더 늘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한편 3약으로 분류한 왓챠, 애플TV플러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는 저마다 오리지널 제작 속도도 방향도 제각각이다. 모기업으로 든든한 지원을 받는 티빙이나 웨이브와 달리 왓챠는 스타트업에서 시작한 저력의 토종 OTT로 올해는 심기일전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매각설에 휩싸이며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인력을 감축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같은 이미 완성한 오리지널은 공개하되, 새 오리지널 기획·개발은 회사의 체질 개선 작업에 맞게 속도를 조절하면서 내실을 기한다는 계획이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는 서울에 한국 지사를 내고 한국 시장 진출을 도모한다는 얘기가 2021년부터 들려왔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은 아직 없다. 애플TV플러스는 올해 여러 시상식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오리지널 히트작인 〈파친코〉의 시즌2를 린 웰햄, 이상일 감독이 연출할 거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쟁을 펼치는 OTT와 달리 2022년 극장가는 활력을 되찾지 못했다. 2023년에는 이해영 감독의 〈유령〉, 황정민과 현빈이 출연하는 임순례 감독의 〈교섭〉, 공유·수지·최우식·탕웨이·정유미 등 스타 배우들의 출연 소식만으로 크게 화제가 됐던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 김혜수·염정아·조인성·박정민 등이 출연하는 류승완 감독의 〈밀수〉, 하정우와 주지훈이 출연하는 김성훈 감독의 신작 〈피랍〉, 설경구와 도경수가 처음 호흡을 맞춘 김용화 감독의 첫 SF 영화 〈더 문〉 등 스타 감독들의 신작이 연초부터 줄줄이 개봉을 앞뒀지만, 이 영화들이 코로나19 이전처럼 관객을 폭발적으로 불러모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더군다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실사 영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Volume 3〉(5월 개봉 예정)와 호크 아이의 기원을 그려낸 〈에코〉(여름 개봉 예정) 그리고 캡틴 마블의 실사 영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더 마블스〉(7월 28일 개봉 예정) 등 마블 시리즈가 연달아 개봉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인 〈오펜하이머〉가 뒤이어 등판하는 올해 여름 시장에는 한국 영화가 개봉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도 벌써부터 나온다.
많은 젊은 사람이 OTT 플랫폼을 평균 두세 개씩 구독하고 있고, 평균 영화 관람료가 사상 처음으로 1만원을 넘어섰으며, 영화와 시리즈의 경계가 희미해진 현재 관객이 예전처럼 영화를 중복 관람하는 시대가 지났다는 사실이 2022년 여름 극장가를 통해 확인됐다. 지난여름 극장가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범죄도시2〉 이후 극장에 다시 숨통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외계+인 1부〉 〈비상선언〉 〈한산 : 용의 출현〉 〈헌트〉 등 한국 영화 4편이 한 주 간격으로 개봉해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펼치는 바람에 어느 누구도 활짝 웃지 못했다. 관객의 선택이 신중하고 엄격해진 상황에서 올해 극장가는 〈탑건: 매버릭〉이나 〈아바타: 물의 길〉처럼 극장에서 관람해야 하는 영화와 안방에서 감상해도 되는 영화의 구분이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2023년 콘텐츠 산업은 극장과 OTT 산업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