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여러분을 해할 수도, 침묵시킬 수도, 무시할 수도 없고 여러분의 생각과 신념에 간섭할 수도, 여러분이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너의 권리를 주장해> 서문 중)
안젤리나 졸리가 국제난민기구에서 활동하며, 다른 사회운동들도 힘껏 지원하는 모습에 늘 깊은 경의를 느끼고 있었다. 인권 문제부터 환경문제까지 너무나 필요한 곳에 기꺼이 스스로의 영향력을 기울여왔고, 수년간 멈춤 없이 계속해온 것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올해 5월 발간된 <너의 권리를 주장해>는 안젤리나 졸리가 국제앰네스티, 인권 변호사 제럴딘 반 뷰런과 함께 쓴 어린이 청소년 인권에 대한 책인데 큰 가방에 가득 넣어 다니며 나눠주고 싶을 만큼 좋은 책이다. 안젤리나 졸리는 매년 놀라운 행보를 갱신할 것이며, 그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단단한 조각을 이식시켜줄 것이다. 모두 그만큼의 자원을 가지고 행동하지는 못해도 신념을 함께 가지는 사람들이 한 걸음씩 움직이게 된다면 그려지는 큰 그림은 얼마나 다를까? 항상 경탄의 대상이었던 졸리가 자신이 경험한 가정 폭력에 대해 증언한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용기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법정에 제출한 증거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인데, 그렇게 되리라는 예측으로 각오가 필요했을 것이다. 폭력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 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더 큰 위협을 당할 수도 있고, 피해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수많은 사람이 난입하기도 하며, 진실은 흔히 힘에 가려진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리라 짐작한다. 안젤리나 졸리마저 안전하지 않은 이 세계에 대해 쓰린 슬픔을 느끼면서도, 직시하고 말하고 보호하기로 한 선택에는 먼 곳에서 지지를 보낸다. 올해 나의 영웅은 안젤리나 졸리였으며, 올해가 지나도 한동안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정세랑(소설가)
여성 캐릭터가 아름답고 착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부족함이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 사랑받기를 바란다.
산업 관계자가 아니라도 대중이 단번에 이름을 댈 수 있는 유명 드라마 작가는 많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는 어떨까?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출처 불명의 말이 떠도는 것 자체가 시나리오 작가의 기여도가 평가절하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정서경은 좋은 시나리오 작가의 존재가 전과 다른 영화, 특별한 시선이 깃든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꾸준히 증명해온 이름이다. 올해는 <헤어질 결심>과 <작은 아씨들>, 다른 감독(박찬욱, 김희원)과 다른 형식(장편영화와 12부작 시리즈)으로 협업한 작업물을 연이어 공개하며 정서경다운 인장을 추리해가는 묘미를 안겨줬고, 그 중심엔 좀처럼 조명되지 않았던 이상하고 뒤틀리고 유해한 여성들이 있었다. 그뿐인가. 정서경은 대중과의 만남을 주저하며 텍스트로만 기억되는 작가로 남는 대신 TV 프로그램과 언론 인터뷰에서 멋진 입담을 뽐내며 굳이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시나리오 작가 역시 매력적인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요컨대 정서경은 분명 존재하지만 무시돼왔던 다양한 층위의 타자 혹은 소수자의 경험과 언어를 작품 안팎에서 근사하게 확장한다. 무엇보다 스스로 걸어온 길을 어떤 사명이 아닌 논리와 실리로 설명한다는 점이 기분 좋은 임파워링이 된다. 연출보다 시나리오가 잘 맞았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이 자연스러웠고, 보다 잘 알고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여성 캐릭터를 주로 썼고, 캐릭터에 결함이 있어야 스토리가 확장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하는 모습은 어쩐지 통쾌하기까지 하다. 정서경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 여성의 존재와 욕망은 인정받고 재현될 만한 가치가 있다. 임수연(<씨네21> 기자)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박은빈은 ‘우영우’인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의 문지원 작가가 단언했듯이 박은빈이 아닌 ‘우영우’는 생각할 수 없다. 0.9%에서 시작해 17%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끝맺은 <우영우>는 명실공히 올해의 드라마다. 또 법정 드라마야? 또 자폐스펙트럼 천재야? 콘텐츠 헤비 유저 입장에서는 하나 새로울 것 없는 소재와 장르였다. “진짜 재밌다니까? 일단 한번 잡숴봐”라는 권유에 시청을 시작한 후에는 매주 <우영우> 방영일만 기다렸다. 처음에는 등장인물이 너무 착하기만 해서 가자미눈을 뜨고 바라봤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냉소하기도 지겹고, 제발 드라마에서라도 선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인정받고 잘되는 걸 좀 보고 싶어졌다. 27년간 시청자 앞에서 성장한, 쉼 없이 연기를 해온 ‘바른생활 배우’ 박은빈이 ‘우영우’를 연기하고 그 드라마가 착한 스토리텔링으로 성공한 것은 그래서 위안이 된다. 이 어려운 역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로 다짐하고 엄청난 대사량을 소화하며 중압감을 버텨낸, 배우의 굳건함. 하얗게 불태워놓고도 징징대지 않고 “어쩌겠어? 그래도 해내야지”(박은빈의 말버릇이다)라며 끝까지 링 위에 서 있는 복서를 보는 것만 같다. ‘우영우’는 정규직 변호사가 된 자신의 감정을 ‘뿌듯함’으로 정의한다. 시청자들이 그 뿌듯함을 내 것처럼 느끼게 만든 것은 온전히 배우 박은빈의 힘이다. 자신이 외뿔고래라고 여기는 모든 이에게 ‘우영우’의 이 말은 크나큰 응원이었을 것이다.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이 삶을 살아내자고 ‘우영우’, 아니 박은빈은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두드린다. 김송희 (<빅이슈> 편집장)
세상이 당장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누군가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살아남은 누군가 앞에서 나는 최소한 부끄럽지 않고 싶다.
(<그녀를 만나다> ‘작가의 말’ 중)
2022년 한국 출판계와 문학계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부커상이었다. 롱리스트에 박상영 작가와 정보라 작가가, 그리고 최종 후보인 쇼트리스트에 정보라 작가가 오르면서 한국 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어색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됐다. 정보라 작가가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는데, 정보라 작가는 웹진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디지털 작가상을 받으며 한국 문단에서는 결코 주류라고 할 수 없는 과학소설과 환상 문학 작품을 써왔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정보라 작가를 잘 보여주는 것은 사회 참여다. 정보라 작가는 소설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에 연대하는 명확한 목소리를 냈고, 차별금지법 제정과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을 위한 오체투지에 참여했다. 연세대에서 시간강사로 11년간 일했지만 학교에서 퇴직금을 지불하지 않자 소를 제기했다. 대학이 법을 교묘히 사용해 강사들을 연차도 주휴수당도 없는 비정규직의 지위로 유지시키는 데 대한 항의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주류 문단에 속하지 않고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작가, 사회적 분노를 명확히 표출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작가, 이에 대해 변명하지도 타협하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작가를 얻었다. 강연 자리에서 정보라 작가를 만났을 때 느껴지던 단단함이 지금도 기억난다. 오랜 분노가 누적돼 만들어진 그의 초연함과 단단함은 오랜 시간 유튜브를 하며 날 선 댓글에 지친 나에게 등대처럼 느껴졌다. 그처럼 단단할 수 있다면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일을 너무 두려워하지는 않아도 되리라. 김겨울(유튜브 <겨울서점> 운영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