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갭이어(Gap Year)’는 미국이나 유럽의 고등학생들이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기 전 봉사, 교육, 인턴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며 견문을 넓히는 기간(보통 1년)을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 이 개념을 직장에 적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례로 실리콘밸리에서는 5년 근속 시 한 달 정도 ‘딴짓’할 수 있는 재충전(Recharge) 기간, 번아웃이 왔을 때 유급으로 쉴 수 있는 안식월(Medical Leave) 등을 직원들에게 제공한다. 모두 직장인의 갭이어에 해당하는 복지 서비스인 셈. 이런 흐름을 타고 한국의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갭이어 문화가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한국형 갭이어’에 필요한 기술은 무엇일까? 직장 생활 만렙인 ‘언슬조’ 멤버들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갭이어 팁을 아낌없이 공유한다.
「 휴식은 타이밍! 갭이어 시그널 알아채기
」 “힘들게 취업 후 마음에 드는 회사에서 일하던 어느 날, 점심을 잘 먹고 들어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부장님께 말했어요. 회사를 그만두면 큰일날 줄 알았던 제가 말이죠. 죽을 만큼 힘든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 당시 6년 차 직장인이었던 ‘언슬조’ 이 과장은 그렇게 갭이어를 실행에 옮겼다. ‘퇴사 후 하고 싶은 것’ 따위를 작성하는 것마저 지겨워질 무렵이었다. 누구나 긴 시간을 달리다 보면 ‘잠시 멈춰야 할 때’라는 시그널이 온다. 직장 생활 10년 차에 갭이어를 가진 직장인 J씨는 말한다. “아침마다 회사 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하던 일이 싫어졌죠. 긍정적이고 일을 즐기는 성격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제가 변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에디터로 일했던 M씨는 “동료와의 관계에서 일의 의미를 찾았는데, 그것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갭이어를 갖게 됐다고 말한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일을 지속하는 중요한 동력을 상실했을 때’ 이를 갭이어의 시그널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촘촘한 계획 따위 없었어요.” 이 과장은 친구와 대낮에 강남 거리를 활보하고, 평일에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는 ‘팔자 좋은 짓’도 몇 번 하니 즐거움에 끝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고. 이 과장은 미국 백인들이 노후를 보내는 작은 도시에서 연수를 하고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는 등 6개월의 재충전 시간을 가진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갭이어 기간에 금전적으로 불안하진 않았을까? “회사 그만뒀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더니 점심에 밥 사준다며 한가한 백수를 부르는 지인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그런데 이들과 연락하거나 만나려면 필수적으로 통신비와 교통비가 필요했고 보험은 계속 유지해야 했죠. 매일 얻어먹을 수만은 없으니 커피도 종종 샀는데, 이런 약간의 사회 활동만으로도 도시에서는
한 달에 최소 50만원이 필요했어요. 6개월 동안 어학연수와 여행에 쓴 돈은 천 단위가 거뜬히 넘었는데, 모두 그동안 피땀으로 모은 월급으로 충당했죠. 사실 통장 잔고가 조금씩 줄어들 때마다 불안했어요.” 하지만 이 과장은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가끔 나 자신에게 물어요. 그때 그 돈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 내 통장 잔고가 차고 넘칠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샤넬 가방 한 개 정도 남았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덕분에 에너지를 빵빵하게 충전한 데다, 그렇게 얻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구직 한 달 만에 재취업까지 했으니까요.”
직장인 J씨는 말한다. “쉬는 동안 주로 혼자 많은 것을 했어요. 하고 싶은 것을 일기장에 적은 뒤 하나씩 지워가면서요. 제일 하고 싶었던 게 그림 배우기여서 그림 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 갔고 일본어도 배웠죠. 특히 매일 책을 읽고 일기를 쓰는 것이 제 감정을 돌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언슬조’의 신 차장은 주니어 시절 충동적으로 퇴사했지만, 덕분에 이후 커리어의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회사란 어떤 회사인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나, 그리고 그걸 위해 난 뭘 갖고 있는가, 셀링 포인트는 뭘까. 이런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던져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신 차장은 갭이어 기간에 스스로 원하는 조건을 구체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취업 전략을 세워 원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회사로 이직했다. 이처럼 갭이어는 회사 생활을 할 때 놓쳤던 것들을 돌아보게 해준다. 전직 에디터 M씨는 갭이어가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에게 책임과 의무를 지우던 환경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로만 설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쉬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