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미란)터틀넥 가격미정 코스. 재킷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진주)베스트, 터틀넥 모두 가격미정 코스.
이진주 PD(이하 ‘진주’) 제대로 얘기하자면 정말 긴데요,(웃음) 왜 연애하다가 헤어지면 내 X가 누구랑 사귀는지 궁금하잖아요? 새 애인한테 “걔가 실은 이러저러하다” 얘기해주고 싶기도 하고. 직장에서 입사 면접을 볼 때도 레퍼런스 체크를 하는데 연애는 늘 0에서 시작하죠. 만약 연애하기 전에 상대의 이전 연애에 대한 모든 것을 공유받고 나도 X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가 있다면 어떨까 싶었어요.
출연진 섭외에만 5개월이 걸릴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죠?
염미란 작가(이하 ‘미란’) 저희 작가가 총 9명인데 모두 합쳐 DM을 2만 개 정도 보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연애 리얼리티라고만 얘기를 했고, 성격이나 연애관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전 애인과 연락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는 질문을 던졌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 열려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비밀 유지 서약서를 쓰고 콘셉트를 이야기했죠.
진주 그럼에도 “네? X랑 같이 산다고요?” 하고 기함하는 분이 많았어요.
미란 생각보다 나쁘게 끝난 커플이 정말 많더라고요.
〈환승연애〉라는 제목이 시청자들에게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거라는 예상도 했을 텐데요. 프로그램 제목에 다른 후보도 있었나요?
진주 처음에는 ‘환승정류장’이라는 이름을 생각했는데 끝에 가서 ‘환승연애’로 바뀌었어요. ‘I LOVE X’도 마지막까지 후보에 있었고요. “X를 사랑한다” 혹은 “사랑하지 않는다”의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제목인데 이 프로그램이 OTT 서비스로 공개된다는 특성을 생각했죠. 사람들이 비디오 가게 서가에 꽂힌 수많은 비디오 중에서 제목을 보고 작품을 고르듯,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눈에 확 띄는 타이틀을 원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 앞서 제작진이 직접 프로그램을 시뮬레이션했다던데, 과정이 궁금해요.
진주 처음에는 촬영 동선을 정하려는 목적이었어요. 출연자가 어떤 공간을 가장 편안해하고 오랫동안 시간을 보낼지 알아야 저희도 그쪽에 카메라를 집중적으로 배치할 수 있잖아요. 제작진이 출연자들의 이름을 가슴에 붙이고 그들의 아바타가 돼 하루 정도 생활을 해봤어요. 밤에 오늘 마음이 향하는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까지요. 그런데 어떤 후배가 “당신의 X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자를 받고 실제로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는 거예요.
미란 그때 비로소 확신이 들었어요. 저희가 기획한 이 장치들이 제 기능을 하겠구나라고.
막상 촬영에 들어갔을 때 의외의 포인트에서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와 당황스러웠던 적은 없었나요?
진주 출연자들이 X에게 그렇게 미련이 많이 남아 있을지 몰랐어요. 특히 보현·호민 커플은 사전 미팅 당시에는 둘 다 마음이 잘 정리된 걸로 보였거든요.
미란 저는 그렇게 자발적으로 데이트를 자주 나갈 줄 몰랐어요.(웃음)
진주 촬영에 앞서 불안한 마음에 〈러브캐처〉를 연출했던 박소정 PD에게 전화해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정말 이들이 이 하우스에서 사랑에 빠져?”라고요. 근데 정말 그렇다는 거예요.
미란 그뿐만 아니라 같이 생활하는 걸 너무 재미있어 해서 매일 새벽 3~4시까지 술을 마셨죠.
진주 저희가 정권 씨 볼 때마다 “술 너무 마시지 마라”, “잠 좀 일찍 자라”, “부어서 얼굴 못생겨지면 안 된다” 걱정을 엄청 했어요.(웃음)
미란 참, 꼭 해명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요. 정권 씨가 한남동 하우스 살 때 밤에 소파에서 자는 모습이 자주 나왔잖아요. “튀는 행동 한다”라고 비난받은 걸로 아는데 알고 보니 호민 씨가 잠버릇이 좀 있더라고요.(웃음)
사실 정권 씨가 민영 씨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X인 혜선 씨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정권 씨는 시청자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었죠. 급기야 혜선 씨가 잠시 하우스를 떠나는 상황까지 생겼고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진주 전혀 예상 못 했죠. 그런데 하우스에서 너무 힘들어하며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고 판단했어요.
미란 혜선 씨가 나가면 혜선 씨와 얽힌 서사가 다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어요. 저는 끝까지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진주 PD가 큰 결정을 내렸죠. 다행히 돌아온 혜선 씨 표정이 훨씬 밝아져서 저희도 기분 좋았어요.
진주 풀 충전 후 “내가 왔다!” 느낌으로 재등장했죠.(웃음)
미란 결국은 오히려 그게 더 ‘리얼’해서 좋았다고 생각해요.
매 화 출연자들의 솔직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개인 인터뷰가 있어요.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각 출연자가 매번 인터뷰에 같은 옷차림으로 나오는 건 무슨 이유인지 궁금해요.
미란 출연자들이 인터뷰 룸을 일종의 대나무숲처럼 생각해주길 바랐어요. 저랑 진주 PD랑 담당 작가, 담당 PD가 들어가는데 대화 중에 함께 울기도 하고 다른 출연자 흉도 봐주고 했어요.(웃음) 이 인터뷰가 PD들에게는 편집의 기준점이었고요.
진주 24시간을 다 보여줄 수 없으니 인터뷰를 중심으로 서사를 짜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정권 씨가 아침마다 식사 준비를 하고 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그날 민영 누나 주려고 커피를 내렸는데 누나가 못 보고 출근했어요”라고 했다면 그날 정권 씨에게 중요한 일과는 요리하고 커피 내리는 모습인 거죠. 인터뷰 때 옷차림이 모두 같은 건 타임라인 때문에 시청자들이 헷갈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출연자 한 명 한 명의 이미지를 시청자에게 각인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어요.
미란 호민 씨는 회색 스웨트셔츠, 고민영 씨는 흰 블라우스 이렇게요.
흥미로운 건 리얼리티 프로그램임에도 종종 작가들이 화면에 나온다는 점이에요. 6화에서 호민 씨가 울음을 터뜨릴 때 달려와 위로해준 사람도, 11화에서 한글이 서툰 민재 씨를 위해 아바타처럼 X 채팅을 대신 진행해준 사람도 각자의 담당 작가였죠. 담당 작가들의 역할이 정확히 뭔가요?
진주 우선 출연진의 매력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구성을 짜요. 예를 들어 뒤늦게 입주한 상우 씨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스하키를 했는데, 그 포인트를 살리기 위해 제주도에서 코코 씨와의 첫 데이트 때 롤러장에 가는 걸 생각했죠.
미란 하우스에 처음 들어오면 막막하다고 느낄 수 있잖아요. 이 안에 ‘내 편’을 하나 만들어준다는 의도였어요. 늘 친구처럼 붙어 다니며 이전까지 어떤 연애를 했고, 앞으로 어떤 연애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 얘기해요. 예를 들어 정권 씨가 민영 씨랑 첫 데이트로 베이커리 공방에 가잖아요. 정권 씨가 “누나가 빵을 좋아한대요” 하면 작가는 “그럼 빵 만드는 걸 해볼까?” 하며 대화 나누듯 데이트가 구성되는 거예요. 특히 정권 씨 담당 작가가 정권 씨를 너무 예뻐해서 저희가 ‘정권맘’이라고 부를 정도예요.(웃음) 나이 차이가 꽤 나다 보니 막냇동생처럼 챙겨주거든요. 촬영 끝나면 새벽 3~4시인데 그때 집에 가서 잠을 자도 모자랄 시간에 작가들끼리 모여서 또 맥주 마시며 회의 아닌 회의를 해요. “우리 정권이는 이런 마음인데 민영이는 지금 어떤 마음이니” 하면서요.
진주 거의 서로 아바타가 돼서.
미란 출연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연애를 떠올리기도 하는 것 같아요. “다음에는 저런 연애를 해보고 싶다”, “내가 X한테 저렇게 보였을 것 같은데 이불킥 각이다” 하면서요.(웃음)
방송을 보는 모두가 그러지 않았을까요?(웃음) 방송을 본 출연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미란 사실 제일 신기해하는 건 다른 출연자들의 개인 인터뷰일 거예요. ‘저때 저런 심정이었다고?’ 싶겠죠. 하우스 안에서는 X를 들킬까 봐 말을 아끼다 보니 서로의 마음을 쉽게 추측하기가 어려워요.
진주 시청자와 출연진이 가진 정보 차에서 오는 재미가 이 프로그램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시청자들은 너무 쉽게 “어떻게 민영이는 정권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모른 척할 수 있어?” 하고 판단해요. 실제로 몰랐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제가 나서서 “여러분, 진정하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웃음)
이 과정을 시청자보다 한발 앞서 지켜본 패널들의 과몰입도 상당했어요. 패널들은 어떤 기준으로 섭외했나요?
진주 우선은 20대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기준이었고요. 김예원 씨와 김윤주 씨는 제가 예전부터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였어요. 패널 역할이 결국은 라디오에서 사연을 듣는 진행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죠.
미란 이용진 씨나 사이먼 도미닉 씨는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거나 공개 연애를 오래 했던 분이다 보니 연애나 사랑을 가볍게 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요.
진주 이용진 씨가 생각지도 못했던 포인트를 짚어줄 때가 많아요. 특히 “코코 씨 머릿속에 있는 건 19살의 민재인데, 보현 씨를 자상하게 챙겨주는 31살 민재를 보고 이성적 마음이 다시 생길 수도 있다”라고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시즌 2 계획도 있나요?
진주 글쎄요. 너무 힘들어서….(웃음) 모르니까 했지,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못 했을 거예요.
그래도 섭외하다 보이스 피싱으로 오해받는 일은 없을 테죠.(웃음)
진주 그렇죠. 그런데 이번만큼 진솔하게 나올까 싶기는 해요. 출연자들이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참여하는 걸 경계하고 있어요.
미란 머릿속에 스스로의 포지션을 생각해둔다거나, 이전 시즌에서 X를 세심하게 배려하지 않은 출연자들이 욕먹었던 걸 생각하면서 초반에는 X에게만 문자를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진주 늘 출연자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할 장치를 궁리해야 해요. 저희 말을 한마디도 허투루 듣지 않고 “지금 X 공개하는 거 아냐?” 하면서 서로 회의를 하더라고요.(웃음) 시즌 2는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겠죠.
힘든 점도 많았겠지만, 〈환승연애〉의 모든 제작 과정에서 가장 즐거운 기억으로 남은 순간은 언제인가요?
진주 처음 티빙 인기 프로그램 1위 했을 때요. 잠시만요, 아직 1위인지 확인해볼게요. 제가 평소에도 수시로 확인하거든요. 어! 아직 1위네요.(웃음)
미란 저는 섭외 기간 중 정말 많은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원래 남의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고 또 잘 들어주는 성격인데, 이런 기회가 앞으로 또 있을까 싶어요.
그래서 두 분은 오래된 관계의 힘을 더 믿나요, 아니면 새로운 사랑에 이끌리는 편인가요?
진주 아무래도 오래된 관계에 더 힘이 있기는 한 것 같아요.
미란 책 한 권 같은 완결된 서사를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사람들이 새로 쓰는 책보다는 완결된 책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연애할 때 보통 편안함보다 설렘과 긴장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X의 존재는 또 크게 다가와요. 이미 끝을 아는데도 말이죠. X의 마력이란….
미란 ‘사랑’이나 ‘연인’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도 있어요. 보현·호민 커플이 그랬어요. 보현 씨가 하우스에 와서야 비로소 이별을 실감하면서 힘들어하는데 막상 호민 씨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러 갈 때는 옷을 골라주잖아요. 그럴 때 ‘도대체 저건 뭐지?’ 싶거든요.
진주 호민 씨가 “옷 좀 봐주시죠, 형님” 하는 그 장면을 지금도 가끔 돌려 봐요.(웃음)
〈환승연애〉가 종영했을 때 시청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이 남았으면 하나요?
미란 한국 사람들은 전 연인과 잘 지내거나 연락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닫혀 있는 편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이별은 없겠지만, 관계를 잘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연애를 할 때의 나도 나고, 거지 같은 연애에서도 배울 점은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코코·민재 커플이 이전 연애를 잘 마무리하는 장면을 보고 뭉클했어요. 그 자체가 너무 판타지처럼 느껴졌고, ‘이것도 굉장히 멋진 일이구나’ 하는 걸 보여준 것 같아서 좋았거든요.
진주 시청자들이 출연자 한 명 한 명을 응원하게 됐으면 해요. 마지막까지 보고 나면 관계들이 입체적으로 구성되면서 ‘저 사람이 그랬던 이유가 있었구나’ 이해하게 되거든요.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아마 느끼게 될 거라 생각해요. 결국은 모두 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