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말금이 회상하는 [모자무싸] 가장 짜릿한 장면
[모자무싸]의 꼿꼿한 어른, 고혜진을 연기한 강말금을 만나다. 그가 회상하는 명장면부터 배우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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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가 종영한 지 꽤 됐지만, 이 이야기의 여정을 함께한 이들은 여전히 여운에 젖어 있어요.
대본을 제일 먼저 읽는 행운을 누렸죠, 제가.(웃음) 그중 제일 체감하는 사람은 저희 엄마예요. 종영 후에도 재방송은 물론이고 넷플릭스로 여러 번 보시는데, 저보다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높다고 느낄 정도예요. “오늘은 1부부터 8부까지 봤다. 좋은 드라마 해서 너무 좋다”라고 말씀하시죠.
‘고혜진’은 단연 빛나는 인물이었어요. ‘혜진’을 연기하는 동안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나아가 강말금에게 남긴 흔적도요.
‘혜진’이 멋진 캐릭터라 좋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끄러웠어요. 저보다 그릇이 큰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인물을 연기할 때면 몸과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아요. ‘혜진’은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어른이잖아요. ‘마재영’(김종훈) 감독을 만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창작자로서의 존중을 잃지 않았죠. 그런 모습을 연기함에 있어 어쩐지 조심스러웠어요. 그리고 지나고 나서 보니 ‘고혜진’을 통해 모든 장르를 연기해본 것 같은 느낌이에요. 드라마도 있고, 코미디도 있고, 후반부에는 ‘박경세’(오정세)와의 멜로적인 부분도 있었고요. 영화, 삶, 사랑, 창작의 고통. 여러 화두 속에 푹 빠져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 덕분에 너무나 풍성한 경험을 했죠.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혜진’의 대사도 많았습니다. 특히 최필름 대표 ‘최동현’(최원영)에게 “저 재미있게 살랍니다. 혼자 다 드세요. 배 터지세요”라 말하던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봤어요.
그 대목 저도 너무 좋아해요. 대본만 보면 마치 독백 같아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뻤어요. ‘황동만’(구교환)이나 ‘박경세’처럼 인물의 전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대사를 얻고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대사를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하고 싶었어요. 먼저 아침에 눈을 뜨면 입에 붙을 수 있게 매일 30분씩 반복해서 연습했어요. 입에 붙고 난 후에는 거기에 약간의 리듬을 만들어가면서 준비했죠. 그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어요.
준비한 것을 현장에서 펼쳐 보이던 순간은 어땠어요?
잘해내서가 아니라, 일단 대사를 틀리지 않고 촬영을 마쳤다는 사실에 상당히 만족했어요. 이제야 하는 말인데, ‘최동현’ 대표에게 쌍욕을 날리는 장면에 ‘사자후’라는 지문이 있었어요. 그런데 혼자서 연습하다 그 지문이 있다는 걸 까먹은 거예요.(웃음) 감독님께서 기회를 한 번 더 주셔서 그 장면이 무사히 완성됐죠. 덕분에 시청자분들께 통쾌함을 드린 것 같아 좋습니다.
많은 이들이 귀에 쏙쏙 박히는 발성과 발음을 논하지만, 전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무게감을 가져간 균형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것이 ‘고혜진’이라는 인물을 현실적이면서도 극적으로 느끼게 했다고 생각해요.
처음 대본을 받고 ‘혜진’은 어떤 사람일까 여러 생각이 스쳤어요. 왜 ‘박경세’ 같은 사람과 20년 넘게 살까 싶다가도(웃음) 삶의 큰 목적이 있는 인물 같기도, 내면이 복잡하지 않은 사람 같기도 했죠. 그러다 우연히 TV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어요. 북극에 사는 분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는데, 어느 계절이 되면 그 지역에 늑대들이 찾아와요. 매년 늑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데, 그 태도가 굉장히 덤덤해요. 멀리서 늑대를 관찰하고 그들의 동선을 파악해 판단하고 행동에 옮기죠. 그 모습을 보는데 ‘혜진’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문제에 놓였다 하더라도 일단 지켜보는 사람. 그 태도로 ‘혜진’에게 접근해갔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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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을 받으면 인물의 고유명사를 정리해보는 작업을 한다고요. ‘혜진’에게서 길어 올린 단어는 어떤 것들이었나요?
연극할 때부터 생긴 저만의 방법인데요, 처음에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할 때는 대본 필사를 해요. 써 내려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것들이 있어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른 사람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게 자연스럽게 고유명사로 이어진 것 같아요. ‘혜진’에게는 ‘고박필름, 아지트, 8인회, 국민 스트레스 관리반’ 이런 것들이 있겠죠? 반대로 ‘황진만’(박해준)은 저에겐 의미 없는 고유명사고요. 이렇게 정리하다 보면 인물의 역사도 좀 더 촘촘히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한 종영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두고 “반짝반짝한 바보들을 사랑하는 일”이라 말했죠. 그것이 어쩌면 <모자무싸>를 보며 느낀 즐거움이 아닐까 싶었어요. 모두에게 있었던 ‘반짝반짝한 바보’의 시절을 떠올리면서요.
맞아요. ‘혜진’이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겪었던 좌절은 제가 20대 때 느꼈던 좌절과도 많이 닮아 있죠. 사회에 나가서 겪는 첫 좌절의 순간, 그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기도 하니까요. ‘혜진’이 <애욕의 병따개> 시나리오를 읽는 장면에선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고 느끼는 기쁨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이 업을 하고 있는 저로선 너무나 결정적인 기억이기도 해요.
반짝반짝한 바보였던 강말금을 돌아보면요?
애잔해요. 얼마나 막막했을까 싶기도 하고. 반짝반짝한 바보들이 그다음 겪어야 하는 건 100% 환멸이거든요.(웃음) 그렇지만 바보인 상태보다 환멸을 느끼는 것이 낫다고 봐요. 그 시간을 지나 운이 좋게도 지금 배우로 살고 있죠. 지난하고 힘들었던 과정을 돌아보면 애잔하지만, <모자무싸>의 대사에도 나오듯 ‘빛나는 스토리’로 느껴져요.
환멸. 너무 공감돼요.(웃음)
제가 좋아하는 책 <연극 인류학>에 ‘연극이라는 텅 빈 조개껍데기’라는 표현이 나와요. 대단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 열심히 걸어간단 말이죠. 그런데 막상 가보면 상상했던 것과 다르고 텅 빈 모습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과거에 내가 생각하던 연극, 연기에 대해 내려놓게 돼요. 재미있는 게 그렇게 내려놓고 살면 또 어느새 다가와요. 마치 썸 타는 것처럼요.(웃음) 결국 연기란 끊임없이 밀고 당기며 받아들여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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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치열하게 밀당하던 배우 강말금의 시간도 궁금해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호기롭게 극단에 메일을 보내면서 연기를 시작했죠?
딱 ‘동만’이 같았어요. 능력은 하나도 없는데, 매일 술 마시고 억울해하고.(웃음) 서른 살에 처음 연극을 시작했는데, 그때 “너의 연기는 땅에 발이 안 붙어 있어” 이런 말을 되게 많이 들었어요. 몇 년이 흐른 뒤에는 그 말을 듣지 않게 됐는데, 당시 굉장히 큰 역할을 해준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마임과 즉흥극을 주로 하는데, 그때는 그 친구와 매일같이 만나서 수다도 떨고 작은 공연을 기획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렇게 스스로 안정을 찾아갔던 것 같아요. 제 발이 땅에 닿을 수 있었고, 심지어 지금의 강말금을 만들어준 뿌리가 됐죠. 얼마 전엔 그 친구의 공연을 보러 갔어요. 아주 조그마한 극장에서 절로 킥킥거리면서 보게 되는, 기분 좋은 공연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가 가진 재치와 위트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도 재미있는 아줌마가 될래. 저 친구가 관객들에게 나눠준 즐거움과 안도감을 나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곧 50대가 되는데, 그 친구 덕분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마흔 살엔 첫 장편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났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깊게 품고 있는 분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전 절대 자랑스럽지 않아요. 연극을 시작한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그냥 버텼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연기를 너무 하고 싶은데도 그땐 스스로 배우라고 말도 못 했어요. 외모든, 목소리든 배우를 할 정도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스스로도 자신이 없으니 “배우를 하고 싶어”가 아니라, “나 연극할 거야”라고 얘기하고 다녔죠. 참 유치한 생각이기도 한데, 그땐 막다른 골목을 만들어 자꾸만 저를 가둬두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친구를 만나고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었죠.
드레스 Isabel Marant. 슈즈 Christian Louboutin. 글러브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 강말금이 태어난 과정은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혹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순간이 있나요? 고박필름의 ‘고혜진’ 대표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웃음)
‘혜진’이라면 영화로 만들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요. 하하.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추억을 꺼내 온다면… 그 친구랑 매일 아침 망원동에 있는 ‘민중의 집’이라는 공간에 가곤 했어요. 매일 오전 10시에 오픈하는데, 그곳과 인연이 있던 덕분에 오전 8시부터 9시 반까지 연습실을 사용할 수 있었죠. 마음껏 연습하던 그 장면을 가져와 잘하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같은 영화로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오늘 화보는 촬영장에서 당차고 멋진 배우 강말금의 모습 그 자체를 담고 싶었습니다. 배우로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가요?
작품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상념을 적는 공책이 있어요. 늘 나오는 말이 있는데, ‘배우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예요. 그 답은 작품을 할 때마다 하나씩 새롭게 깨닫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막 촬영에 들어간 <혹하는 로맨스>라는 드라마가 로맨스 코미디 장르인데요, 그 작품을 촬영하면서도 또 다른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의 연기와 표정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중년 여성이 표현하는 감정을 10대 청소년이, 70대 할머니가 봐도 잘 느껴질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고민이 이어지고 있어요. 상대 배우와 함께 잘 맞춰가려면 제 안의 용기도 필요할 테고요. 매번 숙제가 달라지는데, 잘해나가 봐야죠. 아까 영상 콘텐츠 촬영 때 나왔던 말처럼요. Fearless. 겁 없이. 네, 겁 없이. <모자무싸>에도 나오잖아요. 천 개의 문을 열고 턱턱턱 가라! 지금 강말금이 열렬히 사랑하는 것이 있나요? 저요. 어떤 순간이든 전 제가 1번이어야 해요. 끝까지 잘 살 수 있게 지켜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요. 끝까지, 이게 참 힘든 일이거든요.
Credit
- 에디터 천일홍
- 사진 방규형
- 헤어 김라희
- 메이크업 정지은
- 스타일리스트 김종우/변진
- 어시스턴트 정주원
- 아트 디자이너 김지은
- 디지털 디자이너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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