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 왜 항상 희생해야 할까?
유숙열, 한민용, 함윤이, 박소연(퀸소복) 4인의 여성 필진과 나눈 대담하고도 뜨거운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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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 1
K-장녀는 있는데, 왜 K-장남이란 말은 없을까? 무엇이 여성들에게 K-장녀 콤플렉스를 갖게 했나?
유숙열
1970~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나 같은 세대에게는 ‘K-장녀 콤플렉스’라는 말이 낯설다. 대신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친숙하다. 우리 시대에는 맏딸이 집안의 살림과 동생 돌봄을 맡아 희생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통적 효 사상과 남아 선호 배경에서 자주 쓰였던 이 말이 오늘날의 K-장녀 콤플렉스로 발전한 것 같다. 내가 딸로 자란 1970년대에는 장녀가 아니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상급 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를 졸업한 10대 시절부터 공장 생활을 하며 취업 전선에서 가정 경제를 책임지거나 남자 형제의 학비를 대는 딸들이 정말 많았다. 형제가 많은 가정에서 자라난 우리 세대와 달리 요즘 젊은 세대들은 한두 자녀만 있는 집에서 자라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남녀 불문하고 특정 성의 자녀에게 과도한 책임과 기대를 부과해 부담을 지우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함윤이
‘어른(長)’과 ‘여자(女)’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원인이지 않을까? 나는 삼남매의 장녀이며,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은 장녀로서의 나를 여러 면모에서 존중해준다. 그럼에도 제사에서 술을 올리거나 절을 할 때 나를 후발대로 세우려던 몇몇 어른의 제스처를 마주치곤 했다. 지금도 명절마다 친가에 먼저 들르고 외가로 이동하거나, 부엌에 내내 서 있던 여성들이 가장 늦게 식사하는 장면을 보곤 한다. 책임과 의무를 요구받는 와중에 ‘의례’나 ‘법도’의 자리에선 뒤서야만 하는 일을 연이어 마주하면 내부에서 모순과 균열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악에 받친다’고 할 수 있겠다.
박소연
해외에 살면서 치열하게 일상을 일구는 장녀들이 “나만 행복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라고 말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그들이 느끼는 일말의 죄책감은 여전히 작동 중인 ‘장녀 콤플렉스’를 방증한다. 타지에서 1인분의 몫을 하기 위해 누구보다 독하게 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부모를 부양하고 형제를 챙겨야 한다는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K-장녀는 결코 태생부터 의젓했던 것이 아니다. 고생하는 엄마를 보며, 딸이기 전에 같은 여성으로서 그 고통을 외면하지 못해 일찍 어른이 돼버렸을 뿐이다. 그렇게 엄마의 의무를 조기에 나눠 가졌던 과거의 장녀들이 자라 엄마가 된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보란 듯이 ‘이기적인 장녀’를 키워낸다. 가족보다 본인의 성공이 우선인 딸, 엄마의 짐을 함께 짊어지지 않는 딸. 이기적인 K-장녀, 눈물 나게 환영이다!
TOPIC 2
미디어 속 고루한 ‘엄마’상을 꼬집는다! 엄마는 왜 희생을 강요받아왔나? 이 시대 엄마에게 주어져야 할 자유는?
한민용
계엄과 탄핵, 그리고 대선. 쌍둥이를 품었을 때 나는 뉴스의 최전선에 있었다.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또 다른 세계에선 ‘주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강요받았다. 남편이 산후 도우미를 예약했을 때 업체에서는 남편이 함께 육아할 예정이라는 설명에도 “아빠는 잘 모른다. 엄마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고집했다. 그렇다. 내가 무얼 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 엄마가 된 순간부터 나는 주 양육자여야만 했다. 그래서 바란다. 앞으로 내 두 딸이 살아갈 사회에서는 “주 양육자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이 낯설지 않기를. 그리고 그 답이 꼭 ‘엄마’일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말이다.
함윤이
그래도 최근 들어 미디어에 새로운 ‘엄마’상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어느 특수한 모델이나 영역을 선별하기보다 가능한 한 다종다양한 엄마의 모습이 그려지고 소개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엄마를 더, 제대로 살피는 순간이 많아졌으면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생하는 엄마’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이채로운 면모를 품고 있지 않은가? 작년과 올해 나는 박완서 작가의 단편들을 발행 순서대로 읽으며, 그 안에 있는 각종 엄마의 모습에 질색하기도, 찬탄하기도 했다. 접하는 땅이 넓어질수록 만날 수 있는 자유의 가짓수도 많아질 것이다.유숙열 한국 사람은 ‘어머니’에 대해 아주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희생과 헌신의 어머니상은 식민 경험, 가난, 전쟁 등 공통의 어려움 속에서 자식들을 데리고 끈질기게 생존해낸 많은 한국 어머니의 절대적 공로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러나 엄청나게 달라진 사회적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요즘, 그런 눈물겨운 어머니상은 더 이상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드라마나 미디어 속 엄마의 모습은 왜 그렇게 한결같이 고루한 걸까? 내 생각에 우리 사회의 모성상은 ‘현모양처’라는 고리타분하고 낡은 이상형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전업주부’라는 허상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여전히 ‘전업주부’이면서 ‘현모양처’이기도 한 어머니들의 모습은 현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여성들의 모습과 닮지 않았다. 나 자신도 아이가 있는 엄마로 오랫동안 양육과 직업을 병행하면서 ‘워킹맘’으로 살았지만 드라마나 미디어가 나를 대변해준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박소연
모성 본능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돼 있다. 열 달의 기다림과 산고 끝에 엄마가 된다는 생물학적 숭고함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후에 뒤따르는 한 개인의 개별적인 희생까지 ‘모성애’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 당연시해선 안 된다. 엄마에게도 이름이 있고, 직업이 있으며, 분명한 취향이 있다. 이름 대신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는 순간 기꺼이 응해야 하는 수많은 포기는 겪어보지 않은 나로선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엄마가 된 여성들에게 사회는 ‘좋은 엄마’라는 가혹한 성적표를 내밀며, 엄마의 헌신에 작은 균열이라도 생기는 순간 사회는 기다렸다는 듯 혐오 섞인 낙인을 찍어버린다. 동시대 엄마에게 필요한 건 모성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서툴 자유다. 우는 아이 앞에서 당황하고, 일과 삶의 무게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기도 하는 엄마.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싶은 욕망. 그 인간적인 엄마를 더 많이 보고 싶다.
함윤이
그래도 최근 들어 미디어에 새로운 ‘엄마’상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어느 특수한 모델이나 영역을 선별하기보다 가능한 한 다종다양한 엄마의 모습이 그려지고 소개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엄마를 더, 제대로 살피는 순간이 많아졌으면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생하는 엄마’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이채로운 면모를 품고 있지 않은가? 작년과 올해 나는 박완서 작가의 단편들을 발행 순서대로 읽으며, 그 안에 있는 각종 엄마의 모습에 질색하기도, 찬탄하기도 했다. 접하는 땅이 넓어질수록 만날 수 있는 자유의 가짓수도 많아질 것이다.
TOPIC 3
엄마라서, 딸이라서, 할머니라서. 가족 안 여성의 역할이 과연 필요할까?
함윤이
나는 엄마나 할머니에게 뚜렷한 역할을 기대하지 않으며, 그들 또한 내게 특정한 역할을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내 속내를 깊이 살핀다면, 분명 엄마나 할머니에게 바라는 특정한 역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내밀한 마음을 마주했을 때 “이건 선입견이야”라거나, “상대를 옭아매선 안 돼”라는 식의 ‘건강한’ 태도를 쉽게 가질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안다. 가족, 그중에서도 여성 가족 간의 관계는 그만큼 사적이며 다면적이니까. 어쩌면 서로의 그런 마음을 알아내고, 나누는 일이 엄마-딸-할머니가 할 수 있는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한민용
가족 안에서 여성에게만 주어진 역할,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그런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엄마가 더 잘한다’고 여겨지는 일들. 이를테면 아기를 재우는 일이나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는 일 가운데 오히려 남편이 더 능숙한 것이 많다. 돌봄은 누군가의 성별이 아니라, 그 순간 더 여유가 있는 사람의 손을 따라 흐른다. 엄마와 딸, 할머니. 아빠와 아들, 할아버지. 어떤 호칭으로 불리든 우리는 서로의 삶을 함께 지탱하는 가족 구성원으로 존재해야 한다. 역할은 정해져 있기보다, 살아가며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박소연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구성원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분배의 기준을 너무 오랫동안 성별에만 가두어왔다. 가족 내 여성의 역할이라고 했을 때 당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사라졌으면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 프랑스 가정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을 때 나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주방에 서고, 요리하지 않은 사람이 뒷정리를 맡는 자연스러운 풍경 때문이었다. 내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주방이든 거실이든 이제 각자가 잘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모습이 지금 우리 세대에겐 훨씬 익숙하다. 엄마, 딸, 할머니라는 이름 위에 덧씌워진 관습적 의무를 그만 걷어낼 때다. 가족이라는 역할 놀이에는 성별이라는 낡은 대본 대신, 각자의 이름과 재능이 적힌 새로운 대본이 필요하다.
TOPIC 4
그렇다면 한 명의 여성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유숙열
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자가 창작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라고 역설하며 ‘왜 여성 중에는 위대한 예술가가 나오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울프는 셰익스피어의 시대 조건에 맞춰 상상한 여동생 ‘주디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옛날에 태어난 위대한 재능의 여성은 틀림없이 미쳐버렸거나 아니면 자살을 하거나 어쨌든 공포와 조롱의 대상으로 일생을 끝마쳤을 거라고 단언한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자신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기만의 방>이 쓰인 지 100년이 다 됐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들에게 ‘돈과 자기만의 방’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한민용
평론가 신형철은 세상에 교환이 아닌 것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고, 생명은 시간으로 이뤄져 있으니 결국 생명을 준다는 것은 시간을 주는 일이라고 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엄마가 된 뒤, 나의 생명과 나의 시간은 온전히 사랑스러운 두 딸의 것이다. 하루하루 아기들에 대한 사랑이 커지는 만큼 ‘날 잃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도 선명해진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에게도 생명을 나눠주려 애쓴다. 깊은 밤, 두 아기를 간신히 재우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이제는 ‘뉴(New)스’라고 말하기 어려워진, 하루 지난 신문을 펼쳐 든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엄마가 아닌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다.
함윤이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다양한 논의의 장에서 내가 걱정했던 것은 많은 이가 여성의 이상적인 모델을 또 다른 방식으로 한정 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존의 여성상과 거기서 비롯되는 선입견을 비판하고, 새 방향을 찾는 시도는 중요하지만, 그 시도가 실재하는 여성을 옥죄는 또 다른 사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여성을 응원하는 것만큼이나, ‘여기 있는 여성’들을 존중하는 순간이 현실에서도, 이야기에서도 더 많아지길 바란다.
박소연
누구나 내면에는 겁 많고 외로움을 타는 모습이 있다. 잘못된 선택을 해서 무너지는 약한 나도 분명 존재한다. 한 명의 여성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건, 그런 나를 미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힘이다. 사회적으로는 여성 앞에 붙는 수식어가 다양해지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수식 없이도 온전해지길 바란다. ‘예쁜’, ‘현명한’처럼 여성을 평가하는 단순한 형용사들이 잣대가 되는 순간, 그 기준에 닿지 못했다고 여기는 개인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특정한 성취나 외형적인 완결성을 요구하기보다, 그저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따뜻한 신호를 오랫동안 바라왔다. 윤이형의 소설 <붕대 감기>에 나오는 구절처럼, 기꺼이 ‘너는 네가 되렴’이라 너그럽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을.
TOPIC 5
‘나’로서 바로 서고자 꿈꾸는 FFF에게 보내는 한마디
박소연
나는 여자들이 인생에서 더 많이 틀리고, 시원하게 실수하면서 그 과정을 유쾌하게 즐겼으면 좋겠다. 그럴싸한 가짜 정답을 인공지능(AI)이 단 1초 만에 뚝딱 만들어내는 시대다. 이런 세상에서 규격화되지 않은 인간의 엉뚱한 실수와 오답은 흠이 아니라 강력한 무기다. 모두가 마음껏 틀릴 용기를 가지길 응원한다.
유숙열
내가 창간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창간호에서 소개한 ‘이프 스피릿’으로 메시지를 대신한다. “웃자!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려왔다. 그러나 이젠 웃고 싶다. 웃음은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든다. (중략) 뒤집자!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우리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자라온 하나의 욕망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그 욕망이 파괴적이라는 것을. 이 세상을 한 번 신나게 뒤집어버리고 싶다. (중략) 놀자! 여자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고통과 인내, 희생의 지겨운 학습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중략) 이젠 싫다. 즐겁고 싶다. 그리하여 여자들을 즐겁게 만들고 싶다.”
한민용
쌍둥이를 임신한 채, 불룩한 배로 뉴스의 문을 열었을 때 예상보다 큰 박수를 받았다. 그 박수는 나 개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임신한 여성 앵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때가 됐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 응원 덕분에 임신한 여성 앵커의 모습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됐다. 7년 동안 여성 앵커로 시청자 앞에 서며, 나는 늘 개인을 넘어선 지지와 응원을 받아왔다. 이제는 내가 박수를 보낼 차례다. 용감하고 유쾌한 반란을 계속해주길 바란다. 그 박수 속에서 내 두 딸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세상이 나는 무척 기대된다.
함윤이
두려워하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용감한 여성도, 용감하지 않은 여성도, 유쾌한 여성도, 불쾌한 여성도 모두 자신이 원하는 모험에 잘 가담할 수 있기를!
writers
」유숙열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 5·18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강제 해직, 이후 미주조선일보를 거쳐 문화일보 기자로 일하며 1997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현 이프북스 대표.
한민용
JTBC 최초의 여성 단독 앵커이자 메인 앵커. 지난해 만삭의 몸으로 뉴스를 진행해 화제를 모았다. 현재는 육아휴직을 하며 두 딸을 키우고 있다.
함윤이
202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를 펴냈고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평단의 주목을 받는 작가다. 최근 첫 장편집 <정전>을 출간했다.
박소연
인스타그램에서 ‘퀸소복’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 4년이면 졸업하는 대학을 이것저것 경험해보느라 6년을 다녔고, 잘 다니던 회사를 마다한 채 온전한 내 세상을 찾고자 돌연 프랑스로 떠났다. 현재는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매일 새로운 문을 열며 살고 있다.
Credit
- 에디터 천일홍
- 아트 디자이너 김지은
- 디지털 디자이너 이연우
코스모폴리탄 유튜브♥
@cosmo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