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2030이 내린 새로운 '썸'의 정의

이제 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연애 방식이 됐다. 누군가에겐 연인보다 가성비 좋은 관계로, 누군가에겐 연애보다 설레는 로맨스로. 2030이 들려주는 요즘 '썸'의 새로운 정의는?

프로필 by 김미나 2025.09.18

2014년, 소유와 정기고의 ‘썸’이라는 곡이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모두가 ‘썸’을 타고 있는 듯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를 열창했다. 그 당시 ‘썸’은 연애의 전초전을 뜻했다.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정의’ 내리는 게 중요했고, 하루에 얼마나 연락을 주고받는지가 감정의 온도를 가늠케 하는 기준이었다. 썸은 연애로 이어져야만 의미가 있었다. 썸의 끝은 사귀거나 끝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떨까? 요즘도 썸을 통해 연애로 이어지는 게 당연한 흐름처럼 여겨질까?

“데이트는 했지만, 썸은 아니에요.” 28세 디자이너 A는 최근 데이팅 앱에서 만난 남자와 세 번의 저녁 약속을 가졌다. 서로 음식 취향도 비슷했고, 대화도 잘 통했다. 하지만 네 번째 만남이 없었다. “그 사람도 나쁘지 않았고, 나도 나름 재밌었는데 갑자기 바빠졌다며 연락이 뜸해지더라고요. 그때 아, 이건 썸도 아니었구나 싶었죠.” 과거였다면 몇 번의 데이트 후 사귀는지 아닌지를 두고 고민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관계의 의미를 규정짓기보다, 일단 ‘그 시간이 좋았는지 아닌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는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썸인지 뭔지 따지기도 전에 그냥 흐름이 멈춘 거예요. 요즘은 그런 게 많아요.”

“우리는 썸만 타는 관계예요. 서로 그걸 알고.” 마케터로 일하는 31세 B는 일 년 전부터 한 남자와 지속적인 썸을 타고 있다고 말했다. 퇴근 후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서로 힘들 때 위로도 해주고, 가끔은 술 한잔도 함께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관계를 정의하는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둘 다 연애를 할 준비가 안 됐다는 걸 알고 있고, 이 애매한 관계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그 사람이 왜 나랑 안 사귀는지, 왜 애매하게 구는지 고민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냥… 이 정도가 좋은 거죠. 감정적으로 소모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단 느낌이 드니까요.” 그는 그와의 관계를 ‘감정은 나누지만, 책임은 없는 사이’라고 말했다.

“썸도 결국 효율 문제야.” 34세 IT 기획자 C는 연애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솔직히 연락 몇 번 하면 딱 감이 와. 잘 안 맞는다 싶으면 그만두고, 바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거지. 지금은 썸도 가성비 따지는 시대야.” 그의 말은 다소 계산적으로 들리기도 했지만, 분명 그만의 연애 방식이 숨어 있었다. 감정의 낭비를 최소화하고, 피로하지 않은 관계를 지향하는 태도였다. 요즘의 썸은 상대의 감정을 가늠하기보다 자신의 에너지를 더 고려하는 듯했다. 설레지만 피곤한 감정보다 아쉽지만 덜 복잡한 ‘적당한 관계’를 택하는 것이다.

“SNS 속 썸은 현실보다 더 피곤해요.” 26세 콘텐츠 크리에이터 D는 SNS 속 플러팅이 만들어내는 가벼움에 지친다고 했다. “스토리 올리면 바로 하트 보내고, 괜히 질문 스티커에 답 달고, 사진에 이모지 하나 달면서 플러팅을 이어가요. 근데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오래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프라인보다 더 빠르게 생기고, 쉽게 사라지는 디지털 썸은 반쯤 열린 창문 같은 관계를 만든다. 그는 이제 그런 썸은 피하고 싶다며 웃었다. “오히려 요즘은 명확하게 표현하는 사람한테 끌려요. 헷갈리는 감정은 너무 피곤하니까.”

요즘의 썸은 연애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고, 감정 자체가 목적일 수 있다는 걸 서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제 썸은 더 이상 연애의 전 단계가 아닌, 그 자체로 완결적인 관계가 됐는지도 모른다. 굳이 서로 이 관계가 무슨 의미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각자에게 맞는 거리에서 감정을 주고받고, 딱 그만큼만 기대할 뿐이다. 썸 자체가 하나의 감정 경험으로 소비되며 그 순간의 설렘과 긴장이 관계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의 불확실성은 회피해야 하는 요소가 아닌, 오히려 관계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아슬아슬한 ‘애매한 로맨스’를 즐기는 것이다.

나 역시 썸도, 연애도 아닌 애매한 관계를 경험한 적 있다. 그 무렵 나는 한 건축가에게 빠져 있었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에서 처음 알게 됐다. 그와는 매일 연락하고, 주말엔 데이트를 하고, 가끔은 함께 밤을 보내기도 했다. 서로 “사귀자”라는 말만 없을 뿐, 연인처럼 지냈다. 그런데 딱 하나, 그가 내 전화번호를 묻지 않는 건 꽤나 찜찜하게 느껴졌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꼭 번호를 알아야만 연락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DM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카카오톡으로 넘어갔고, 오프라인 만남으로 이어진 관계였으니까. 사실 그때도 이상하긴 했다. 그는 전화번호를 물을 상황에서 굳이 카카오톡 아이디를 물어봤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맥주를 사러 간 그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보이스톡이 걸려왔다. 그 순간에도 그는 번호를 묻는 대신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만 인정해야 했다. 그는 나와 진지한 연애를 할 생각이 없음을. 이후로 내 감정은 서서히 식었고, 점차 매일 오가던 연락도 뜸해졌다. 우리는 감정만 있을 뿐 끝내 확신은 없었다.

이러한 썸의 진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감정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계의 형태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건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옛날처럼 무조건적인 연애가 목적이 아닌, 스스로의 감정에 더 솔직해지는 흐름은 어쩌면 감정 자체에 대한 존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까?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확실한 관계를 갈망한다. 불확실함이 주는 짜릿함은 순간이지만, 마음을 나누는 안정감은 오래 남으니까. 썸은 가볍고, 자유롭지만 그만큼 쉽게 휘발된다. 단순한 설렘이 목적이라면 그 순간을 충분히 누리면 된다. 하지만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되길 바란다면, 분명하게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애매한 관계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건, 진심을 담은 한 끗의 용기다. 연애 리얼리티 예능 속 ‘직진 남녀’들이 유독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리저리 재지 않고, 오직 한 사람에게만 명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귀하니까. 서툴더라도 확실한 태도는 모든 애매함을 걷어내고, 두 사람을 진정으로 연결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사랑의 시작이다.

Writer 이봄(프리랜스 에디터)

Credit

  • Editor 김미나
  • Writer 이봄
  • Illustration By Limoo
  • Art Designer 진남혁
  • Digital Designer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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