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좋은' 가부장제? 가부장제를 바라보는 모순된 욕망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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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지독하게 많이 나오는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을 보며,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좋은’ 가부장을 여전히 원하는 나의 혹은 우리의 모순된 욕망을 들여다본다. 남성성에 대한 곤란한 욕망 대면하기
」
이처럼 아저씨가 지독하게 많이 나오는 <고려 거란 전쟁>을 ‘아저씨 익스플로이테이션’ 장르라고 불러도 될까? 페미니즘은 고사하고 인권이 뭔지도 모를 것 같은 아저씨 여럿이 모여 역사와 민족, 삶과 죽음과 같은 거대한 주제를 마찬가지로 거대한 몸으로 논의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우선 시각적인 만족감을 준다. 서로 죽고 죽이기야 하겠지만 아무도 실제로는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안정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별다른 대사도 없이 주먹다짐을 통해 자신들의 운명은 물론이고 지구 공동체의 미래까지도 결정하는 데 익숙한 이 아저씨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말하는 진보라는 것이 결국 살과 피가 튀는 야만스러운 폭력의 결과일 뿐이라는 익숙한 사실이 상기된다. 이건 뭐랄까, 나의 ‘배운’ 좌파 페미니스트 자아에 따뜻한 위안이 된다. 나는 지금도 힘들지만 그때도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지는 편 소속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대중 매체가 이미 아저씨 과포화 상태임을 고려하자면 <고려 거란 전쟁> 역시 딱히 특별할 건 없다. 하지만 대단히 다채로운 아저씨 스펙트럼을 다룬다는 점에서 <고려 거란 전쟁>은 특별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공략 가능한 20~30명의 미소녀가 전부 다른 외모와 성격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의 정통 사극들과는 다르게 ‘감정적인’, 즉 눈물 많고 겁 많고 애교까지 많은 아저씨들이 이 드라마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아마도 제작자들이 이제 클린트 이스트우드식의 고독한 늑대 같은 마초적인 주인공 하나만으로는 승부를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일 것이다. 전통적인, 그러므로 영웅적인 가부장이 드라마를 홀로 ‘캐리’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런 관점은 전형적으로 ‘남자다운’ 인물이자 시청자들의 ‘최애’인 무장 양규가 32부작의 중반 시점에서 하차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역사라는 ‘팩트’에 따라 양규는 어느 시점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동시에 그의 이른 하차는 <고려 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에 단장의 결단을 요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들의 드라마에서 ‘진짜’ 남자라는 이상을 없애는 결단 말이다. 희생적인 ‘진짜’ 남자 양규가 없는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제멋대로인 현종과 고집불통인 강감찬의 ‘브로맨스’, 그리고 다소 새침한 거란왕 야율융서와 그를 공주처럼 대하는 부하들이다.
과연 최후의 가부장인 양규 없이 이들이 남은 전쟁을 잘 치를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왜 벌써 양규를 이렇게나 그리워하는 것일까? 실은 누구보다 가부장을 간절히 원하는 그런 사람처럼 말이다!
아저씨들이 재현하는 남성성이 변화하고 있다. 보다 솔직하고 유연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좋은’ 가부장이라는 환상과 단번에 결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양규가 <고려 거란 전쟁>은 몰라도 내 인생을 ‘캐리’해주길 바라는 마음, 혹은 그것을 넘어 양규처럼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생각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진 욕망이다. 온갖 병원균의 매개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와 같이 성장해온 낡은 애착 담요를 쉽게 버릴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하달까. 어쨌든 근본주의 페미니즘의 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건 한심한 짓거리다. ‘좋은’ 가부장이란 ‘유해한 남성성’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해한 남성성’은 2010년대 중반 한국은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퍼진 ‘#MeToo’ 운동의 성과와 함께 널리 재조명되기 시작한 용어다. 이 용어는 남성성이 본질적으로 유해하다는 뜻이 아니다. 가부장제 아래서 “남자는 이래야 해”라는 엄격한 성별 규범을 지나치게 따르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의 남성됨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서 타자를 향한 혐오와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좋은’ 혹은 ‘죽은’ 가부장이라 할지라도 가부장은 가부장이다. ‘좋은’ 가부장 역시 ‘유해한 남성성’과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을 공유하며 성별 규범이 재생산하는 폭력의 연쇄를 묵인한다. 그렇다면 역시 이를 한번 악물고 ‘좋은’ 가부장이라는 애착 담요를 내 머리와 심장으로부터 기어이 뽑아내버려야 할까? 역시 그러는 편이 위생상 좋을까?
내가 무슨 대안이라도 갖고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아직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좋은’ 가부장을 여전히 원하는 나의 혹은 우리의 모순된 욕망을 폐기하는 대신 오히려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SNS상에서 발언하는 페미니스트 중 일부는 마치 남성성이 가진 ‘해로운’ 특질들만이 가부장제를 영속시키는 유일한 상수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만큼이나 남성성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는 우리의 욕망 역시도 충분히 분석되어야 한다. 욕망은 현실을 수동적으로 반영한 결과가 아니라 현실을 다시 구성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왜 여전히 <고려 거란 전쟁>의 시청자들이 ‘양규’와 같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인물에 열광하고, 왜 여전히 ‘여성향’ 장르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성과 마초적인 남성을 그린 작품들이 상위권에 랭크되는가? 이는 가부장제를 박살내려는 페미니스트들의 기획이 실패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성에 대한 우리의 곤란한 욕망을 제대로 문제 삼은 적이 없음을 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Writer_이연숙(리타)
시각예술 비평가. 퀴어 부정성과 시각 문화를 주제로 한 책 <진격하는 저급들>을 썼다.
Credit
- Editor 이예지
- Writer 이연숙(리타)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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