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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천재! 영화 속 미장센을 더하는 미술감독, 류성희
스크린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만든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개념조차 생소할 때부터 한국 영화 미술을 일궈낸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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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두 배우의 음성은 벽지 패턴이 됐고,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들여다보면 추한 현실은 <작은 아씨들>의 푸른 난초가 됐다. 아주 작은 한 조각으로 시작해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영화와 드라마 속 세계로 데려가는 류성희 미술감독의 마법. 프로덕션 디자이너 류성희
」
최근엔 어떤 작품을 하고 있나?
배우 고현정, 나나가 나오는 <마스크걸>이라는 네이버 웹툰 원작 넷플릭스 시리즈를 하고 있다. 굉장히 파격적인 여성서사다. 전 세계 시청자들을 생각하며 작업했으니 기대해달라.(웃음) 그리고 <나의 아저씨> 김원석 감독님과 <동백꽃 필 무렵> 임상춘 작가님의 새 드라마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3대에 걸친 여성들 이야기다. <작은 아씨들>까지 계속해서 여성 서사를 하고 있다.
확실히 여성이 주연으로 나서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맞다. 시대가 변하고 있고 그걸 맡게 돼 즐겁다. 과거 내가 했던 범죄 장르물,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등은 당연한 듯 남성들이 주연을 맡곤 했다. <마스크걸>이나 <작은 아씨들>도 스릴러와 범죄물의 형식인데, 여성들이 주연으로 나서는 걸 보면 많은 게 변했구나 싶다. 영상을 하는 입장에서는 확실히 시대가, 시청자와 관객들이 여성 서사를 요구하고 있다고 느낀다.
<작은 아씨들>은 기존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퀄리티 높고 호화로운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평이 이어졌다.
나는 드라마가 처음이었다. 영화는 티켓값을 지불한 관객들이 보기 때문에 표현 방식과 수위에 대한 허용도가 높지만, 드라마는 어쩌다 보는 시청자도 많기 때문에 취향을 너무 드러내기보단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게 도전이었다. CP님도 영화와 드라마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걱정이 있으셨는데, 전체 톤앤매너와 개별 캐릭터에 대한 계획, 공간 분석 PT를 해서 보여드리자 “감동받았다”고 따듯한 문자가 와서 뿌듯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가지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잘 받아들여주시더라. 그만큼 보는 이들의 안목이 높아진 거겠지.(웃음)

<아가씨> 벽지 테스트 중인 배우 김민희.
박찬욱 감독의 영화로 자주 합을 맞춰 온 정서경 작가의 작품이다. 벽지부터 류성희 미술감독의 인장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박찬욱 감독님이 자주 소환되시더라. 아무래도 셋이서 너무 오래 같이 일을 해왔다 보니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젠 어떤 게 박찬욱스러운 거고·정서경스러운 거고, 류성희스러운 건지 사람들은 잘 모를 정도로.(웃음)
상아의 집, 푸른 난초, 자매들의 집, 화영의 집 등 한국의 공간이면서 동화 속 공간 같은 묘한 환상성이 있는데, 이 작품은 미술로서 어떻게 구현하려 했나?
바로 그 지점이 중요했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밸런스를 잡는 것. 난초 나무 같은 건 환상 문학에 가까운데, 작가님의 고유한 세계를 보여주면서도 시청자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 그 조율을 통해 디자인된 푸른 난초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그걸 극단적으로 찍진 않았다. 멀리서 보면 그냥 예쁜 푸른 난초처럼 보이도록. 이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미술적 주제이기도 하다. 멀리서 봤을 때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어두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아’(엄지원)의 집은 그의 연극적인 성격에 따라 정교하게 꾸며진 연극 세트처럼 구현하려고 했다. ‘혜석’(김미숙)의 집은 옛날 멋쟁이가 사는 모던한 집으로 만들었다. 할머니 집이라고 다 자개장이 있는 건 아닐 테니, 멋을 아는 부자의 느낌으로 차별화했다. ‘화영’(추자현)의 집과 닫힌 방의 벽지는 같은 벽지고, 카펫도 같은 푸른색을 써서 서사의 연결성을 줬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파도 같고도 산 같으며, 푸른색 같고도 녹색 같은 미술도 큰 사랑을 받았다.
처음 각본을 보고 받았던 느낌은 이 작품에서 음성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래’(탕웨이)는 ‘해준’(박해일)의 목소리를 녹음해 끊임없이 듣고, ‘해준’은 ‘서래’의 말을 번역기를 통해 음성으로 듣는다. 언어로는 완벽하게 소통되지 않지만 음성이 가진 파장이 누군가의 마음을 계속 울리고 있는 거다. 그걸 미술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밀려오는 파도, 이어지는 산의 능선, 그런 걸 보면서 ‘서래’ 집의 벽지를 디자인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아도, 벽지는 계속 그 말을 하고 있었으면 했다. 많은 버전이 있었고, 박찬욱 감독님께서는 이 최종 버전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아가씨> ‘코우즈키’의 서재 스케치업.
<작은 아씨들>부터 <헤어질 결심> <아가씨> <박쥐> <올드보이>까지 감독님의 벽지는 특별하다. 윌리엄 모리스가 떠오르는 정교하고 화려한 벽지들이다. 박찬욱 감독님 인터뷰할 때 들었는데, 벽지를 직접 디자인한다고.
박찬욱 감독님이 제일 좋아한 건 <박쥐>의 ‘라 여사’(김해숙) 집 벽지였다. ‘태주’(김옥빈)가 ‘상현’(송강호)에게 “너는 병균이야”라고 이야기하듯 병균은 이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다. 그리고 남편 ‘강우’(신하균)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데서 물이끼를 떠올렸다. 호수 안의 물이끼는 병균을 모티브로 아름답게 디자인했다. <아가씨>의 벽지는 윌리엄 모리스풍의 화려함이 있지만 들여다보면 여성의 성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야하다. <올드보이>는 좀 다른데, ‘대수’(최민식)의 거칠고 뜨거운 감정의 표현 그 자체였다. ‘우진’(유지태)이 설계한 지도 속 공간들에 벽지가 등장하는데,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색깔도 강해지고 패턴도 세진다.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감정의 표현 그 자체다. 벽지 작업은 영화의 표현을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담아내는 재미있는 작업이다.
칸영화제에서 만장일치로 벌칸상을 받은 <아가씨>의 미술을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고아하고 정교하며 웅장한 <아가씨>의 세계를 만든 건 어떤 경험이었나?
<아가씨>는 오랫동안 협업해온 팀의 소통이 절정에 이른 결과였다. 박찬욱 감독님, 정서경 작가님, 정정훈 촬영감독님, 조상경 의상감독님, 송종희 분장감독님, 조영욱 음악감독님, 김상범 편집감독님까지 서로의 마음을 다 알아 안심할 수 있었다. 단지 예쁘기 위해서뿐이 아닌, 촬영을 염두에 둔 공간 설계를 했다. 하나의 기쁨이 열이 되는구나 느꼈고, 시네마를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즐거움이 컸다. 영화는 감독만의 예술이 아닌 여러 사람이 모여 협업하는 것이고, 박찬욱 감독님은 탁월한 지휘자다.

<외계+인> 밀본.
시상자 클로드 를루슈 감독은 말했다. “흔히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고들 말한다. 아니면 시나리오 작가 혹은 배우들을 말한다. 그들이 마치 이 장르를 장악하거나 소유한 예술가들인 것처럼 이야기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인들은 눈앞에 존재하는 것 이상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영화의 테크니션들로 인해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며 감독의 창의성은 현실로 구현될 수 있다. 이 예술은 개별적인 기술이 집약적으로 결합해 완성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오늘 이렇게 놀라운 영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준 류성희 감독에게 상을 줄 수 있어 무척 기쁘다. 류성희 감독은 미술감독의 존재로 인해 이렇게 훌륭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영화가 완성됐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정말 존경하는 영화 <남과 여>의 감독님께 이런 극찬을 받다니, 너무 영광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거의 모든 작업을 함께 하면서 공유하는 미감이 있을지도 궁금하다.
저희의 공통점은 작고 초라한 것부터 극단적으로 화려한 것까지 그것들이 가진 괴괴한 고유성에 집중하고, 아름다움을 확장하고 싶어 한다는 거다. 박찬욱 감독님은 못나고 비루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는다. 무엇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단지 예뻐서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아름다움이 비롯된 것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선 시체의 눈동자에 개미가 기어간다. ‘해준’의 집 벽에는 온갖 살인 사건의 증거 사진이 붙어 있다. 나는 그 패턴이나 색감이 아름답게 보이길 바랐다. 무섭고 추한 것이지만, 이게 우리 삶과 우리 세계의 단면이니까. 존재감을 가진 것들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또한 감독님은 미에 대해 규정하려 들지 않고, ‘이 상황은 뭔가 이상하다’거나 ‘이 만남은 낯설다’는 느낌을 주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런 점 역시 나와 비슷하다. 했던 거 또 하는 거는 감독님도 나도 병적으로 싫어한다.(웃음) 설사 성공했던 것이라도 되풀이하는 건 싫다. 늘 새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다.

<암살> 미쓰코시 백화점.
박찬욱 감독과 함께 한 영화의 태도는 뭘 보여주든 우아하다.
영화 <아가씨>에 고문 의자가 나오는데 그런 것도 감독님께서는 우아하게 만들고 싶어 하신다.(웃음) 나 역시 그렇고. 추한 것, 벌거벗은 상태로 있는 사물, 그런 걸 어디까지 우아하게 담아낼 것인가, 어느 정도로 모호하게 두어야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당신은 어떤 걸 아름답다고 생각하나?
개개인의 고유성이 드러날 때, 그것들이 하나의 세계에 조화롭게 담길 때 아름답다고 느낀다. 일관된 톤으로 맞춰지는 것보다는 어딘가 부족한 듯한 것, 징그러울 정도로 화려한 것, 각기 다른 것들이 이상하지만 교묘히 어우러져 섞여 있는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단면이다.
당신이 만들어낸 것엔 당신의 어떤 일면이 담겨져 있나?
담대함과 우아함이 담겨져 있기를 바란다. 영화 <고지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귀신 나오는 공포 영화나 전쟁 영화는 안 할 거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프로덕션 기간 내내 무서운 생각만 해야 할 거 아닌가.(웃음) 그런데 <고지전>을 제안받고 실제 공중에서 찍은 자료 사진을 봤다. 여기가 이겼다 저기가 이겼다 해서 벌레 먹은 사과나 할머니의 손금처럼 쪼글쪼글해져 있는 당시 고지 사진을 보니 눈물이 툭 떨어지더라. 그 하나의 비주얼이 나로 하여금 전쟁 영화를 하게 했다. ‘지옥 같은 산을 어떻게 표현할까? 땅을 조각해보자’고 생각했다. 아주 담대하게 접근해야 했다. 세트를 만드는 작업과는 달리 이 영화는 땅과 씨름해야 하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나무 하나 없는 황무지라 쉴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었는데, 흙을 파고 갈아엎으며 형상을 만들었다. 산의 형상에서 숭고미가, 비장미가 느껴지길 바라면서. 거친 작업도 담대하게 택하고 그 안에서 어떠한 우아함을 이끌어내는 것. 그게 내가 지향하는 지점이다.

<박쥐> ‘라 여사’ 방.
원래 홍익대학교에서 학부와 석사까지 도예를 전공했다.
27살 때까지 도예를 했다. 나는 ㅍ여전히 도예가 너무 멋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한국의 분청사기나 달항아리는 완벽하지 않아서 완벽하다. 대칭도 맞지 않고 어떤 부분은 비어 있고 어떤 부분은 차 있다. 앞서간 미학이고, 과감한 현대미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도예의 아름다움을 지닌 한국적인 SF 영화의 미술을 해보는 게 꿈이다.
마음 한편엔 영화의 꿈이 계속 있었나 보다.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보고 영화를 꿈꿨다는 <씨네21> 칼럼을 본 적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반항심도 있고 대학에 가기도 싫어 친구 무리와 함께 몰려다녔지만 사실 깊게 소통이 되지 않고 껴 있을 뿐인 사춘기 소녀였다. 그때 한 괴상한 영화가 대륙을 지나 바다를 건너 어린 소녀의 영혼을 만진 거다. ‘엘리펀트 맨’으로 불린 ‘존 메릭’은 외형은 추하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이다. 모두가 추하다고 손가락질할 때 셰익스피어의 시를 읊고 자기만의 종이 성당을 완성하는 그는 추한 존재일까, 아름다운 존재일까? ‘어떤 것이 아름답고 추한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예술이 나에게 온 거다. 그리고 미대 진학을 결심했다. 대학 진학 후에는 도예에 빠져 있었는데, 하다 보니 나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지 않고 시리즈를 만들고 있더라. ‘나는 시간성이 있는 작업,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구나’ 깨달았고, 작은 전시를 한 번 하고서는 내게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다가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그렇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건 영화 미술이란 생각에 유학을 결심했다.
그렇게 홀연히 미국영화연구소(AFI)로 떠난 건가?
내가 영화를 꿈꾸게 한 데이빗 린치가 나온 학교로 갔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 영화를 만드는 게 너무나 행복하더라.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미국에 남아 일할지, 한국에 돌아갈지 고민해야 할 순간이 왔다. 서부극을 작업하며 웨스턴 바 세트를 만들다가 갑자기 ‘내가 왜 남의 걸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서양의 시대극과 역사극을 만드는 게 나의 평생을 잘 쓰는 일일까? 꼭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쓰여져야지?’ 와인을 사 들고 비디오테이프 가게에 가서 미 서부가 아닌 동양에서 벌어지는 액션들, 영화 <동사서독> <백발마녀전> <소나티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테이프를 사와서 보기 시작했다. 서부극의 여자는 늘 술집에서 일하거나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는데, 거기엔 칼을 휘두르고 무공을 자랑하며 호리병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임청하 같은 여자들이 있었다. 가슴이 뛰었고, 뿅 갔다.(웃음) 한국은 아직 미국처럼 영화가 발전되지 않은 곳이지만, 내 열정과 에너지를 다 쏟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귀국했다.

<헤어질 결심> 산해경.
대단한 결단력이다. 그렇게 한국에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부터 영화 미술을 시작했다.
오긴 왔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웃음) 기존의 영화판은 중앙대 영화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영화아카데미 위주로 돌아가는 곳이다 보니 진입이 힘들었다. 미국에서 만든 단편영화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프로덕션 디자이너’ 명함을 팠고, 제작사를 찾아다니면서 대표님들과 미팅하자고 졸랐다. 당시엔 세트팀에서 거의 모든 걸 하던 때고, 영화 미술이란 것에 그렇게 예산을 들일 수 없던 시기였는데,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찾아다니니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기더라. 그러다 한 영화제 GV에서 임필성 감독님에게 질문을 던지다 통성명을 했는데, 그가 감독님들에게 나의 존재에 대해 전해줬다더라. 영화계에 “어떤 이상한 사람이 미국에서 영화 미술을 공부하고 왔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퍼졌고(웃음), 송일곤 감독님과 류승완 감독님이 연락을 줘서 드디어 한국 영화를 하게 됐다. 그렇게 그 시절 루키였던 봉준호·박찬욱·김지운 감독과 일하게 됐고,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 거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절, 봉준호 감독과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를, 박찬욱 감독과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김지운 감독과 <달콤한 인생>을, 류승완 감독과 <피도 눈물도 없이>를 함께했다. 뚜렷한 인장을 지닌 감독들의 개성을 미술로 구현한 건 어떤 경험이었나?
내가 정말 인복이 있다.(웃음) 감독들의 고유성, 각자의 스타일에서 많은 걸 배웠다. 봉준호 감독님은 <살인의 추억>을 할 때 “1980년대의 공기를 디자인해주십시오”라며 현장 사진을 보여주셨다. 봉 감독님은 사전에 굉장히 많은 리서치를 하고, 머릿속에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분이다. 그의 세계를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목표를 찾아 땅을 캐는 광부처럼 작업해야 한다. 로케이션 베이스로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게 중요하고. 한편 박찬욱 감독님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는다. 둘을 동일시하시지. 그리고 선입견이 없고, 오지로 함께 모험을 떠나듯이 작업한다. 김지운 감독님은 말씀이 없다.(웃음) 디자인 전공한 사람들이 <달콤한 인생>을 되게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내가 한 것 중 가장 우아한 누아르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남자 배우 얼굴을 담아냈고, 나도 차곡차곡 화폭에 담듯 디자인했다. 류승완 감독님의 <피도 눈물도 없이>는 내 첫 상업 영화였는데, 그 시기 우리는 쿠엔틴 타란티노에 미쳐 있었고 젊은 혈기로 즐겁게 일했다. 배우 전도연과 이혜영 투톱인, 당시엔 보기 드문 여성 서사기도 했다.
그 시절의 어려움은 어떤 것이었나?
지금에 비하면 상당히 거칠었다. 여성 스태프는 프로페셔널한 능력보다 분위기를 좋게 하는 고분고분한 성격이 환영 받는다며 키스탭 감독에게 지적당하기도 할 정도였다. 내 성은 ‘유’와 ‘류’로 표기할 수 있는데, 당시 ‘유성희’라는 이름을 쓰다가 세 보이려고 ‘류성희’로 바꿨다. 현장에서 아무리 살벌한 말이 들려도, 술자리에 불러도, 나는 내 일에만 집중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나는 지금 당신들과 그런 다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할 일이 너무 많고,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것이 뭔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고, 한국에도 훌륭한 영화 미술이 있다는 걸 보여줄 거다. 저런 말을 들을 시간이 없다.’ 그런 마인드로 자기최면을 걸 듯 자신감을 주입한 거다. ‘나는 나랑만 싸우자’고 생각했다. 어떤 육두문자나 편협한 말들이 들려도 저 사람이 하는 말은 ‘그냥 외국어다’라고 생각하면서.(웃음) 좌절하려면 끝이 없지만 나는 당시 아는 사람도 없고, 물어볼 선배도 동료도 없었기에, 스스로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오로지 성장하는 데만 힘을 쏟았고, 얼른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작은 아씨들> 닫힌 방 옷장.
격세지감이 든다. 이젠 현장에서 성평등 교육부터 시행하니, 세상이 한 발짝 나아가고 있다.
너무 좋다. 너무 좋아졌다. 그리고 이젠 현장에 여자들이 많다.(웃음)
감독님은 어떤 것에 영감을 받나?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다른 점은, 디자인의 목적이 캐릭터 내면을 시각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거다. 그저 멋진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물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공간을 구성한다. 틈이 요만큼 뚫렸다면 틈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바람이 들어오고, 빛이 들고, 빗물이 떨어지고, 그런 게 중요한 거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 바람에 비닐이 펄럭펄럭대는 형상,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사운드, 그 모든 게 디자인적 요소가 된다. 영감은 시각적인 레퍼런스에만 있지 않다는 거다. 시네마는 오감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고, 나는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소리, 스스로의 심장박동 같은 것에서도 영감을 받는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사물을 관찰해야 하고. 어느 새벽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면 창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차갑고 파릇한 공기, 서리의 질감 같은 감각이 기억에 남겠지? 이렇게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은 내겐 이 스튜디오 조명의 색깔, 조도, 분위기, 기자님이 말하는 톤, 그런 것들이 뒤엉켜 기억될 거다. 이렇게 쌓인 오감의 기억을 적재적소에 꺼내어 효과적으로 배치할 수 있으면 좋은 미술감독이다. 이건 단순한 디자인 실력과는 다르다. <헤어질 결심>의 두 배우 목소리가 참 좋지 않나? 그들 음성의 파장이 벽지의 패턴이 됐다고 생각한다.
미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영화는 무엇인가?
스탠리 큐브릭의 모든 영화. 요즘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드니 빌뇌브 감독의 프로덕션 디자인이 뛰어나다. 란티모스는 기이한 영화 속 세계를 미술로도 설득력 있게 구현한다. 빌뇌브의 <듄>은 말할 것도 없고, <컨택트>를 보면 미술적으로도 굉장히 용감하다. 여태까지 보지 못한 이상한 문어 같은 크리처 디자인의 외계인과 주인공 사이에 막 하나를 두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심플한 세트인데 서사와 에이미 애덤스의 절절한 연기가 모든 걸 다 하도록 둔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 미술은 어떤 건가?
영화의 세계와 적합하게 맞는 미술. 같은 시대극이어도 <아가씨>의 미술이 <암살>이거나, <암살>의 미술이 <아가씨>면 이상하겠지?(웃음)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완성도보다는 이야기가 지향하는 것과 함께 가는 게 중요하다. 벽의 색깔, 패브릭의 종류, 수백 가지 선택에 대한 기준은 이 영화에 맞는가, 아닌가다. 기자님과 박찬욱 감독님의 인터뷰를 보니, 감독님이 “디테일에 모든 것이 있다”고 하셨더라. 작업하시면서도 종종 하는 말씀이다. 전체 미술에서 딱 한 소품만 집어 들어도 그 소품에 영화가 담겨 있어야 한다. 배우의 디테일한 손동작 하나도 영화다워야 하듯이. 하나의 순간이 모여 전체를 이루니까.
영화 미술도 동시대의 예술과 영향을 주고받을 것 같은데, 최근 분야를 막론하고 눈여겨보는 비주얼리스트가 있나?
러시아 작가 막심 제스트코프. 디지털 아트 작업을 하는 작가인데,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혹은 파도처럼 움직이고 쏟아지고 팽창하는 구체들을 만든다. VR, 메타버스의 세계로 가면서 영화 미술이 과연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심하게 되는데, 이런 미래적인 작품들을 보면서 실마리를 찾아가려 하고 있다. 시대를 불문하고 변치 않고 좋아하는 건 작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MoMA와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에서 베이컨의 작품과 맞닥뜨렸을 때, 압도적인 고독감이 공간 가득 팽팽하게 느껴졌다. 존재 자체로 느껴지는 고독의 양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 팔리는, 사랑받는 비주얼엔 어떤 특징이 있다고 생각하나?
아마도 이 특집의 인터뷰이들은 젠지들이 좋아하는 이미지에 대해 답할 것 같은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문화 소비에 중장년층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헤어질 결심>이 N차 관람 열풍을 일으켰는데, 놀랍게도 2030이 아닌 4050의 비중이 더 컸다. <작은 아씨들> 시청자층도 중년층이 많았다. 프리즈 서울에 갔을 때도, 종종 갤러리에 갈 때도 중년층을 더 많이 마주쳤다. 실제 경제권을 지닌 이들이 적극적으로 문화 소비를 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나는 대중의 요구가 즉각적이고 휘발되는 ‘인스타그래머블’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이 좋아할 법한, 좀 더 사려 깊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비주얼로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비주얼 디렉팅을 한다는 건 어떤 일인가?
SNS가 이토록 활성화되지 않았을 시기에 영화 미술은 영화 안에서 소비되고 끝났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자기 마음에 드는 한 장면을 캡처해 공유하며 분석하고, 의미를 재생산하며 향유하는 시대다. 영상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고, 영상을 제작한 이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은 윤리가 중요해졌다는 거다. 검열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작업이 수없이 재생산되는 이 시대에 오리지널을, 원본을 만드는 사람은 책임감을 가지고 충분한 고민과 윤리적 판단을 토대로 하여 만든 작업물을 세상에 내놔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독님은 무엇을 믿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라고 파블로 피카소가 말했다. 내가 전자의 사람이냐고? 그건 모르겠다. 다만 그 믿음으로 전자가 되려 노력해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최선의 의도를 만들어내 어쨌든 결국에는 해낸다. 그것이 나의 프로페셔널리즘이다.
Credit
- editor 이예지
- Photo by 송시영
- digital designer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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