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있을 때 J. R. R. 톨킨의 〈실마릴리온〉을 읽었다. 맙소사. 진취적인 여성들이 주로 보는 잡지에 군대 이야기부터 꺼내다니 이 글은 시작부터 글러 먹었다. 어쨌거나 이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아니니 좀 더 참고 들어주시라. 〈실마릴리온〉은 톨킨이 일생을 바쳐 집필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끝난 거대한 책이다. 아니, 그냥 책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실마릴’이라는 보석 3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책은 가상의 신화집이다. 톨킨은 평생 부러워한 그리스신화를 영국식으로 새롭게 창조했다. 심지어 그 시기 유럽의 역사와 교묘하게 연결 지점을 만들어내며 요정어, 인간어 등등 새로운 언어까지 집어넣었다.
그래서 재미있냐고? 이건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책에 가깝다. 그래서 재미있냐고? 군대란 모든 책이 재미있어지는 기이한 마법을 부리는 장소다. 내가 군대를 다닌 시기는 1990년대 초반으로, 이등병과 일병 초호봉에게는 책을 마음껏 읽을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미개한 시대였다. 뭐라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군대 신문인 〈국방일보〉를 읽고 또 읽었다. 일병을 달고 몇 달 지나서 드디어 책을 읽을 자유가 생겼다. 첫 외출을 나가자마자 구입한 책이 바로 〈실마릴리온〉이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호빗〉은 이미 읽은 터였다. 그의 사후에 아들인 크리스토퍼 톨킨이 미완성 원고를 정리해 출판한 마지막 책이라는 〈실마릴리온〉의 홍보 문구를 보고 도저히 읽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미있냐고? 어려웠다. 무려 1만 년이 넘는 세월의 가상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중요한 캐릭터만 수백 명이 나온다. 무대는 여러 대륙으로 연결된 지구 그 자체다. 나는 행정반 사무실에서 B4 용지를 하나 얻었다. 대륙의 모양과 각 대륙에 사는 인물과 그들의 역사를 모두 포함한 지도를 직접 만들었다. 엄청난 시간이 걸렸지만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걸 펼쳐놓고 책을 읽으니 이해가 훨씬 쉬웠다. 내가 이런 짓을 벌인 또 다른 책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다. 비슷한 스페인어 이름을 가진 여러 세대의 이야기라 A4 용지에 ‘가계도’를 그려놓고 책을 읽었다. 혹여나 이 ‘마술적 리얼리즘’의 걸작을 아직 읽지 않은 분이라면 나와 같은 방식을 시도해보길 권한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다시 〈실마릴리온〉으로 돌아오자. 내가 톨킨의 책 중에서 가장 낯설 수 있는 이 책을 먼저 거론한 건 톨킨의 세계가 〈반지의 제왕〉의 세계보다 훨씬 광대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다. 만약 〈반지의 제왕〉을 〈실마릴리온〉 속에 포함시킨다면 아마도 열 페이지 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호빗〉? 그건 두 페이지 정도면 충분하다. 톨킨의 세계는 정말이지 거대하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9월 2일 공개 예정인 드라마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이하 〈힘의 반지〉)는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과 〈호빗〉 3부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포괄적인 역사를 다룬다. 〈호빗〉 3부작보다 몇천 년 전인 ‘제2시대’가 배경이다. 제2시대가 무엇이냐. 분노의 전쟁 이후 벨레리안드가 침몰하고 헬카락세가 사라진 가운데⋯ 잠깐. 이렇게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당신이 오랜 톨킨 팬이라고 해도 이런 설명은 무리다. 그러니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사우론’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는 여러 주인공이 나온다.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압도적인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하나 있다. 거대한 타워 위의 불꽃으로만 묘사되는 악당 ‘사우론’이다. 당신은 사우론이라는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롯데월드타워를 ‘사우론의 눈’이라고 부르는 데 매우 익숙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롯데 회장이 〈반지의 제왕〉의 맹렬한 팬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둘은 쏙 빼닮았다. 특히 석양이 질 때 올림픽대로를 운전하다가 타워를 보게 되는 순간, 내가 마치 절대 반지를 용암 속에 빠뜨리려 달려가는 ‘프로도’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야 만다. 〈힘의 반지〉는 ‘사우론’의 이야기다. 〈실마릴리온〉에 등장하는 ‘켈레브림보르’라는 인물은 ‘사우론’에게 속아서 ‘힘의 반지’를 만든다. 그 힘으로 ‘사우론’은 거대한 힘을 얻어 세상을 거의 지배하지만 결국 요정들을 위시한 동맹군들이 절대 반지를 빼앗으며 ‘사우론’을 가둔다. 그렇다. 〈힘의 반지〉는 아주 경솔할 정도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호빗〉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이다. 갇혀 있는 ‘사우론’이 절대 반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계략이 바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라고 생각하면 간단할 것이다. 이 정도만 알면 당신이 〈힘의 반지〉를 볼 기본적인 준비는 다 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 외의 정보는 아예 모르고 보는 게 낫다. 알려고 할수록 방대한 세계관에 지레 겁먹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당신은 아마 HBO의 그 유명한 시리즈 〈왕좌의 게임〉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저게 뭐라고 사람들이 저 난리를 치지? 저 우중충한 중세 이야기를 꼭 봐야 하나?’ 그리고 몇 년 뒤 당신은 우연히 〈왕좌의 게임〉을 보기 시작했다가 일주일 정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출근해 ‘다음 주에는 끝을 내기 위해 휴가를 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본 뒤에는 ‘이제 뭔 재미로 세상을 살라는 건가?’라며 깊은 허무함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힘의 반지〉는 오랜 기다림의 보상이 돼줄 것이 틀림없다. 아마존 프라임은 5개의 시즌으로 기획된 이 작품에 무려 15억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했다. 한화로 2조에 가까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압도적인 돈 지랄이다. 아니, 돈 낭비다. 아니, 돈 자랑이다. 9월 2일 공개될 1시즌 다섯 에피소드를 만드는 데만 4억65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었다. 이건 TV 시리즈 역사상 최대 제작비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다. 한 에피소드당 거의 1억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셈이니 〈힘의 반지〉는 TV 시리즈라기보다는 여러 편의 연속적인 영화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피터 잭슨이 만든 〈반지의 제왕〉 극장판 3편의 총 제작비가 2억8000만 달러였다. 20년에 걸친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더라도 〈힘의 반지〉 제작비는 꽤 천문학적이다. 제작비가 천문학적이면 시각적 스펙터클은 확실히 더 근사해진다. OTT로 보는 게 아까울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이 시리즈를 제대로 즐길 생각인데 어차피 TV도 좀 큰 걸로 바꿀 예정이었다면 지금이 적기다. 개인적으로는 65인치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내가 갖고 있는 TV도 65인치인데 25평 아파트 거실에 아주 적합하다. 더 작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이건 내가 확실히 보장할 수 있다. 기억하라. 중간계는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좋다.
「 알고 보면 더 좋을 5가지 잔잔바리 정보
」 ① 첫 시즌의 첫 에피소드 2편은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의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가 연출을 맡는다. 사실 내놓는 영화마다 퀄리티가 좀 들쑥날쑥한 감독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거대한 스펙터클 연출에는 꽤 어울리는 선택이다.
②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 시리즈의 인물들은 ‘사우론’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다들 수명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수명이 거의 영원에 가까운 엘프들은 여기서도 만날 수 있다. ‘갈라드리엘’, ‘엘론드’와 ‘이실두르’다. 아쉽게도 배우들은 이전 극장판과 다르다.
③ 〈실마릴리온〉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재미있게도 아마존 프라임은 이 책의 판권을 사지 못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반지의 제왕〉 소설 부록에 나오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각본을 썼다. 톨킨 자손들은 쉽게 저작권을 내주지 않기로 악명이 높다.
④ 그런데 왜 〈반지의 제왕〉과 〈호빗〉을 꽤 훌륭하게 만든 피터 잭슨 감독은 참여를 못 했느냐. J. R. R. 톨킨의 셋째 아들이자 모든 저작권을 관리하는 크리스토퍼 톨킨이 피터 잭슨의 영화들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건 피터 잭슨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20년 동안 만든 영화 대부분이 톨킨 원작 각색물이었으니 이젠 좀 다른 걸 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⑤ 정치적 올바름 논쟁이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사진이 공개되자 하드코어 톨킨 팬들은 흑인 배우가 요정을 연기하는 등 비백인 배우들이 주요 캐릭터를 맡은 것이 원작 오독이라며 난리쳤다. 물론 톨킨의 세계가 고릿적 유럽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어차피 결국은 가상의 세계 아닌가.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게 톨킨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마음을 좀 넓게 가지자. 이왕이면 나는 정호연의 엘프 연기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