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워 바디>, 한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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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저 코스 아카이브 에디션. 가죽 팬츠 자라. 이너 톱, 목걸이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아워 바디>는 8년 차 고시생 ‘자영’이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런 얘길 해야겠다고 언제, 왜 마음먹었어요?
운동 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제 주변에 실제로 운동을 강박적으로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저한테도 권해서 같이 운동을 했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있었죠.
‘강박적’이라는 표현을 한 건 ‘왜 굳이 그렇게까지 운동하는 걸까?’라는 회의감이 들었다는 얘긴가요?
물론 운동해서 좋은 점은 분명히 있지만… 친구들이 야근을 하고 나서도, 피곤해도 운동을 하는 걸 보니 ‘달리는 목적이 뭐지? 건강하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가?’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죠. 그래서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물었어요. “살면서 뭔가 노력한다고 해서 딱히 보상받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운동은 다르다. 한 대로 몸이 바로 바뀌니까 그게 너무 좋다. 그런데 운동을 많이 하다 보니까 더 세게 운동을 해야 그만한 자극이 와서 조금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기를 중단하면 마치 내가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이 영화의 출발점이에요.
포스터나 영화 홍보 문구를 보면 ‘달리기로 몸과 마음, 삶까지 건강해지는 어떤 한 여성의 서사’가 나올 것 같은데, 실제 결론은 예상을 조금 벗어나요. ‘자영’이라는 여성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어떤 답을 전하고 싶다기보단 ‘운동이 꼭 삶의 해답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이야기를 쓸 당시에 제 나이가 30대 초반이었고, 저도 친구들도 크고 작은 어려움, 취업 실패 등을 겪으면서 좌절을 많이 했었거든요. 이런 시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뭔가 ‘그래도 잘 살 수 있다’, ‘괜찮다’ 정도의 위로는 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죠. 사실 “운동하면 모든 게 해결돼”라고 말하는 거는 거짓말이니까. ‘내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을 땐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까?’ 하는 화두를 던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자기 몸 긍정주의, 탈코르셋 같은 움직임 안에서 여성이 자기 몸을 인식하는 방법, 가져야 할 시각에 대한 변화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점이에요. 이 영화도 그런 흐름을 의식하고 있나요?
이래야 한다, 이게 좋다 혹은 나쁘다 같은 판단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요즘 여성이 타인의 혹은 나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다양한 욕망과 시선이 있다는 걸 꾸밈없이 담고 싶었죠. 사실 ‘자영’이 갖는 몸에 대한 욕망이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데 굉장히 중요한 동기가 됐기 때문에, 달리기를 하게 된 계기를 준 친구를 보며 그 몸이 가진 생명력, 에너지에 엄청 빠지거든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어떤 면에선 그것도 일종의 대상화일 수 있죠.
마지막에 ‘자영’인 결국 ‘혼자서’ 자기 욕망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걸 ‘파격적’이라고 표현하는 반응이 꽤 있어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그 친구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수동적인 ‘자영’이가 이제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건데,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시선도 있더라고요. 파격적이라는 반응을 얻을 줄은 몰랐어요.
‘희망’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궁금해요. 고시 준비를 중도에 포기하고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은 회사를 그만둔 ‘자영’이는 일반적인 시선에선 전혀 희망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기준에선 결국 백수로 돌아온 ‘자영’의 삶에 딱히 희망이 없다고 볼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막상 영화 속에서 그런 ‘성공’을 가진 친구들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진 않았을 거예요. 그들도 스스로도 회의하고 있고. ‘이렇게 사는 게 괜찮은 건가?’ 하고요. 저는 행복은 어떤 기준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본인의 태도에 따라 가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자영’의 삶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내가 그 때 못 했던 걸 ‘자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대리 만족한 거죠.
뭘 못 했어요?
‘자영’은 되게 용감한 사람이거든요. 저는 그렇지 못했고. 고시를 오래 준비했지만 계속 떨어질 게 분명해서 시험을 안 보는 것,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걸 코앞에 두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직장을 나온 것, 엄마가 다시 집에 들어와 살라고 했지만 들어가지 않은 것. 저는 그런 행동들이 되게 주체적이고 용감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밀고나가니까.
영화가 생각한 대로 안 흘러가서 불편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어요. 감독님은 ‘자영’의 변화를 긍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누군가는 “변한 게 뭐야?”라는 질문으로 끝났다고 해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알게 된 것, 자기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깨운 것만으로도 되게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해요. 막연한 희망 같은 걸 영화에 넣고 싶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20대 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제 친구들도요. 그 힘들었던 일,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모두의 바람대로 잘 해결되는 결말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어요. 만약 그런 끝을 선택했다면 그 시절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냥, “나 요즘 진짜 힘들어” 하는 친구들이 이 영화를 본다는 가정하에 거기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더 진짜 현실을 반영하고 싶었죠.
힘든 시기를 지나는 청춘을 위로하고 싶었다는 말일까요?
제가 누구를 위로할 만큼 성취를 이룬 게 아니라, 그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들도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어라’ 하는 마음? 하하. 왜냐하면 저는 ‘자영’이 앞으로도 잘 살 것 같았거든요. 엄청 좋은 직업을 갖지 않아도,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고시 공부를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그런 거 없이도 잘 살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