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썸만 타는 이유는?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썸만 타고 끝난 연애. 나에게 매력이 없어서일까, 혹은 그가 단지 어장 관리 중이었기 때문일까? 썸 타는 연애에 상처받은 당신을 향한 한 남자의 변. | 썸,매력,어장관리,남녀관계,연애

썸을 과정이 아니라 목적으로 두고 맺는 관계라면 그건 아까운 썸을 낭비해버리는 일이 아닐까?여자 사람 친구(이하 ‘여사친’) A가 최근 데이트하는 남자에게서 들은 말. ‘넌 너무 좋은 아이라서 조심스러워. 내가 함부로 대해선 안 될 것 같아.’ 이게 무슨 뜻인지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물어왔다. 남자는 먼저 연락도 잘하고 만나면 함께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어쩐 일인지 가끔 저런 식의 말을 한다고 했다. “널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 아닐까?” 대답한 건 내가 아니라 여사친 B였다. 우리는 막 수영을 마치고 바닷가에 앉아 꿀맛 같은 낮맥 타임을 보내고 있었는데, 순간 나는 사랑해 마지않는 인디카 IPA를 뒤로한 채 다시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리돔과 돌돔, 복어와 뿔소라만이 내 얘기를 들어줄 바닷속에서 나의 외침은 물거품이 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야, 그는 너에게 반하지 않은 거라고!” 보글보글보글.부끄럽지만 고백컨대, 나도 저런 표현을 구사한 적이 있었다. 차마 내용을 공개할 용기는 없지만 하여튼 그가 A에게 한 말은 ‘넌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야 돼’의 보다 완곡한 응용형으로 보인다.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으면서 상대방을 밀쳐내고 싶은 이가 애용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말했다는 뜻은 아니다. 나 역시 당시엔 내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고, 그게 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 되돌아보니 나는 그녀가 예쁘지만 좀 지루하다고 느꼈고, 섹스하기 위해 늘어놓았던 감언이설을 뒤집을 용기가 없었으며,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나쁜 놈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였다. 그렇다면 남자는 왜 A에게 먼저 연락해 만남을 청하는 걸까? 아직 섹스를 하지 못해서라거나 간단히 ‘어장 관리’라고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의도한 바는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사람의 마음이란 게 삼나무처럼 한 기둥으로 쭉 뻗은 게 아니라 여러 갈래의 가지로 갈라지고 나뉘어 있어,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어느 날은 이쪽 가지, 다른 날은 저쪽 가지가 더 많이 흔들리는 것인지 모른다. 이 얘기를 하면 두고두고 조리돌림을 당할 거라는 친구의 경고가 떠올라 몹시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해보겠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요즘 남자 C는 20대 후반의 취업 준비생인데, 항공사 입사를 준비하며 만난 선배 스튜어디스와 사랑에 빠져 신나게 연애 중이다. 30대 초반의 요즘 남자 D는 페이스북에서 본 어떤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는데, 수소문 끝에 그녀의 직장인 약국으로 찾아가 고백한 다음 사귀는 데 성공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주변에 ‘썸만 타는’ 남자는 건너건너에 한 명 정도일 뿐 모두 잘들 연애하고 있는 것 같다. “음, 글쎄요. 저는 썸 같은 건 타본 적이 없어서. 다가오는 남자들은 다 고백을 하던데…” 썸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사례 동냥을 다니던 중 들은 가장 절망적인 간증이었다. 그러므로 조리돌림을 예감하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의심해보건대, 혹시 ‘남자들이 썸만 탄다’고 말하는 당사자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원인이 있는 게 아닐까? 괜찮긴 하지만 연애할 만큼 매력적이진 않다거나, 남자를 고르는 취향에 좀 문제가 있다거나, 막상 데이트해보면 뭔가 깨는 점이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신에 대해 돌아볼 여지는 없는 것일까? (지금 문득 창밖에서 까마귀 떼 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은 머지않아 닥쳐올 나의 비참한 말로를 예고하는 게 아닐까?)‘썸’이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던 무렵을 기억한다. 모두가 경험하고 있으되 미처 명명되지 못한 채 어렴풋이 우리의 마음속을 굴러다니던 그것은, ‘썸씽’ 혹은 ‘썸’이라 이름 붙여지면서 연애 전선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 설렘과 기대감이 미열처럼 몸과 마음을 뭉근하게 달군다. 그도 과연 나와 같은 마음인지, 혹시 그가 보내는 신호를 놓치거나 오해해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지 상대의 말과 행동은 물론 문자 메시지의 구두점 하나, sns에 올린 글귀 하나까지 낱낱이 뜯어보고 맞춰보기를 반복한다. 상대방의 마음 한 조각을 얻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이때가 연애에서, 아니 어쩌면 삶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몇 안 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이른바 ‘썸만 타는’ 행위, 썸을 과정이 아니라 목적으로 두고 맺는 관계에서도 이렇게 반짝이는 설렘이 유지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아까운 썸을 낭비해버리는 일은 아닐까?“그냥 적당히 섹스나 하고 진짜 연애는 착한 남자랑 하라고 써.” 조리돌림을 경고한 친구는 글의 결론을 고민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랬다가 너무 잘 해서 마음을 빼앗겨버리면?” “몇 번 더 하라 그래.” 아무래도 이 모든 건 나를 조리돌림으로 내몰기 위한 그 친구의 치밀한 음모였던 것 같다.HE IS… 정우열 만화가이자 애니메이터, 캐릭터 디자이너. 대중문화에 전문가적인 식견이 있는 ‘올드독’의 일기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며 인기 작가로 떠올랐다. 2년 전부터 제주에 이주해 살며 제주 감성이 담긴 맛깔스러운 글을 담아내고 있다. 최근 작으로는 에세이집 <올드독의 제주일기>가 있다.